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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생동하는 ‘대동(大同)’의 꿈, 영산줄다리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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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생동하는 ‘대동(大同)’의 꿈, 영산줄다리기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4. 26. 11:29

살아 생동하는 ‘대동(大同)’의 꿈, 영산줄다리기 


글 | 조정현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연구교수 folkcho@hanmail.net 




이 시대의 진정한 향토축제, 영산3.1문화제 

21세기 문화의 시대를 맞이하고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과연 우리 축제의 현실은 어디쯤 와 있는 것인가. 지방자치단체의 관주도 구조로 인해서 주민들은 소외되고 정치인들의 생색내기 장으로 변질된 축제들이 넘쳐나고 있으며, 문화 논리가 아닌 경제 논리가 지배하는 축제문화가 만연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전통적인 우리 축제의 전형을 이어가면서 살아있는 축제로서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지역이 몇 군데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경남 창령군의 영산삼일문화제이다. 

삼일문화제의 중심적 전승지인 영산면 일대는 구 영산현의 읍치지역이다. 읍치는 해당 고을의 정치, 문화, 행정, 군사 등의 중심지로서 고을 축제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전통사회에서 영산은 고을축제의 전통이 살아 있던 지역이었다. 영산 대보름축제의 핵심은 대동놀이인 쇠머리대기와 큰줄다리기였으며, 이들 연행에 서낭싸움과 골목줄다리기, 그리고 ‘진잡이’가 함께 연행되었다. 영산면 주민들은 동서부로 편을 갈라서 연대하고 각 편의 지휘부를 구성하였다. 각 편의 지휘부는 일정한 기부금을 내고 향촌사회 유력인사들의 찬조금을 끌어들이는 한편 각 편의 인적 네트워크를 최대한 동원함으로써 대동의 축제를 가능케 하였다. 

영산삼일문화제가 지금까지 계승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일봉 조성국 선생님의 열정과 헌신이 바탕에 자리잡고 있다. 조성국 선생님은 경남 창녕군 영산면 출신으로 일제 이후 단절된 영산줄다리기를 복원하신 분이다. 박정희 정권 당시 교원노조 활동을 하다 해직을 당했고 지역에서 양파재배법(1972)을 전파해 영산을 양파의 주산지로 만들었다. 지역문화에 큰 관심과 열정을 가진 선생님은 <영축설화>(1974), <영산의 노래>(1975) 등을 집필하였으며, 영산줄다리기를 전국적인 신명의 전도사로 재창조했다. 1982년 고려대 대동제, 이화여대, 부산대, 서울대 등 전국의 대학축제에서 대학생들과 함께 줄다리기 판을 벌였고 이는 대학축제의 중요한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쌍룡(큰줄)’을 맞이하기 위한 쇠머리대기 놀이 

영산 쇠머리대기(중요무형문화재 25호, 1969.02.11)는 일종의 편싸움 놀이로, 마을을 동·서로 갈라 두 패로 편을 짜는데 이긴 편 마을에는 풍년이 들고 진 편 마을에는 흉년이 든다고 해서 농경의식의 하나로 전해져 왔다. 영산지역에서는 나무쇠싸움[목우전(木牛戰)]이라고도 불렸으며, 정월 대보름에 행해지던 민속놀이였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30여 년간 중단되었다가 1968년에 복원되었다. 현재는 3·1문화제 행사의 하나로 줄다리기와 함께 행해지고 있다. 유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영산의 영축산과 작약산(함박산)의 형상이 마치 두 마리의 황소가 겨루고 있는 것 같다 해서, 산의 나쁜 기운을 풀어주고 풍요를 기원한다는 의미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또한 대동놀이의 절정에서 등장할 쌍룡을 위한 희생물로서 소싸움이 벌어졌을 가능성, 경남 지역에서 성행했던 소싸움을 모의적으로 연행했을 가능성 등도 제기되고 있다. 


대보름이 다가오면 산신에게 고사를 지내고 나무를 베어와서 쇠머리를 만든다. 쇠머리를 메고 싸움터로 나가기 전에 동서 양편에서는 농악을 울리고 깃발을 흔들며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쇠머리 위에서는 대장, 중장, 소장 세 사람이 올라타고 지휘를 하는데, 사람들은 대장의 지휘에 따라 힘차고 민첩하게 행동해야만 승리할 수가 있다. 싸움은 상대방의 쇠머리를 쓰러뜨리거나 자기편의 쇠머리로 상대방의 쇠머리 위를 덮쳐 땅에 닿게 하면 이기는 방식이다. 놀이 편제는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겨루는데, 서부는 여성을 상징한다고 하여 서부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속신이 있다. 쇠머리대기 싸움을 하기 전에 한낮 동안 동서 양군이 진잡이 놀이를 겨루게 된다.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풍물패가 앞장서서 가락을 잡으며 서낭대를 비롯한 각종 깃발이 쇠머리를 둘러싼다. 놀이꾼들은 “오왜증산이야” 하며 노래를 부르고 구경꾼은 길을 메운다. 장군들은 칼춤을 추면서 기세를 올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쇠머리를 맞부딪쳐 상대편 쇠머리 위에 올라가 덮쳐 짓누르면서 한데 엉겨 일대 공방전을 벌인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한쪽의 쇠머리가 주저앉으면 승부가 판가름 난다. 

큰 줄의 전초전이자 자연스러운 교육놀이로서 골목줄다리기 

조성국 선생님은 영산줄다리기의 축소판이자 전초전으로 골목줄다리기에 많은 애정을 쏟았다. 교육자로서 영산줄다리기의 신명을 아이들에게 전해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골목줄다리기에서 맘껏 신명을 펼쳐내는 것을 보면서 각급 학교와 단체에 영산줄을 전파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셨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선견지명은 그대로 통했고 전국의 수많은 대학과 초중고등학교, 기업 등지에서 영산줄다리기가 시연되었다. 골목줄다리기에서도 진잡이가 연행된다. 축소된 형태이지만 양팀의 성원들이 저마다의 깃발을 들고 서로 깃발을 치고받으면서 위세를 과시하는 형태이다. 진잡이가 끝나면 마침내 새끼용 두 마리가 꿈틀거리면서 결합된다. 줄을 당기기 전에 양편 학생대장의 ‘이싸움 놀이’가 시작되는데, 줄 위에서 상대편 대장을 떨어지도록 밀어내는 놀이다. 이싸움이 끝나면 본격적인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아이들의 골목줄이지만 구경하고 있던 주변 어른들도 줄을 당기고픈 욕망을 참지 못하고 달려든다.


“영산줄다리기의 내적 원리는 애살(열정)로 만들어지고 신명으로 진잡이를 하고 몰음(협화)으로 당겨진다”(조성국) 

아이들은 일봉 조성국 선생님의 말씀과 같이 자신의 모든 것을 놀이판에 던지는 ‘애살’, 경쟁이 아닌 ‘신명’, 마침내 하나로 어우러지는 ‘몰음’을 체험한다. 골목줄다리기는 영산지역 초중등학교 학생들이 선생님과 보존회원들의 지도를 받아 이루어진다. 화려함이나 장엄을 연출하지는 않지만 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큰 줄을 당길 수 있는 ‘놀이이자 교육’의 장이 되고, 사뭇 진지한 아이들의 신명 속에서 영산줄의 미래를 전망할 수 있다. 

풍년을 보장받고 신명의 절정을 만들어가는 큰줄다리기 

영산줄다리기(중요무형문화재 26호, 1969.02.11 지정)의 신명은 줄로 형상화된 거대한 용의 위용과, 수를 헤아리기 힘든 깃발들의 술렁임으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에 심장을 울리는 풍물패의 가락과 집단적인 군무는 도무지 헤어나기 어려운 가슴 벅참을 이끌어낸다. 용으로 인식되는 줄은 각 동네에서 미리 꼬아 두었다가 결전 전날 동서부가 각기 동네 줄을 모아서 큰길에 30가닥을 80미터 길이로 길게 펴고 물과 소금을 뿌려서 단단하게 한다. 이것을 새끼줄로 엮고 둥글게 만 다음 반을 접어서 한 줄로 만든다(길이 40미터, 60가닥의 둘레 155센티미터 내외). 이때 목줄은 타원형으로 구부린다(암목줄 길이 6미터, 숫목줄 길이 5미터). 암수 목줄에 끼우는 목나무(비녀목)는 길이 260센티미터, 지름 25센티미터이다. 다음에 벗줄(종줄, 젖줄)은 40〜50가닥을 준비했다가 진잡이를 할 때에 몸줄 밑으로 한 번 감고 위로 빼어서 양쪽에서 당기게 한다(길이 5미터, 둘레 25센티미터 내외). 꽁지줄도 진잡이 때에 60가닥의 끝줄을 풀어서 부채살처럼 편다(길이 20〜30미터). 

편제는 영산면의 마을들을 동서부로 나누고, 면외는 대구·마산 간 도로를 경계로 동서 구분을 한다. 면내 이장 중심의 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추진위원장을 선출하여 사령부가 생기면서 본격화된다. 추진위원회는 7〜8일 전에 대장·중장·소장들을 선출한다. 당일 오전에 서낭대를 선두로 농악대들, 무수한 깃발들과 줄이 뒤를 따르고, 군중이 다시 그 뒤로 길을 메운다. 양줄이 결전장에 도착하면 줄머리를 경계로 진잡이가 시작된다. 진잡이는 줄다리기 전에 양편이 서로 기세를 올리는 전초전이고, 이것이 제일 장관을 이룬다. 고조된 풍물 속에서 양군 행렬이 운동장을 돌다가 피차 거리가 좁아지면 사람들이 갑자기 흥분하여 욕설과 주먹질, 발길질이 오가며, 깃발로 상대방을 내려치고 순식간에 패싸움으로 번진다. 결전은 오후 4시가 넘어야 시작된다. 먼저 암숫줄 고리에 통나무를 끼워야 줄다리기를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 거의 어두워진 뒤에야 줄이 걸렸다는 신호가 오고 긴장 속에 총성이 울리면 “위야차!” 하는 함성과 함께 피어오르는 먼지가 하늘을 뒤덮는다. 그리고 10여 분 만에 승부는 끝이 난다. 


줄을 당기던 사람들과 관중들은 이긴 편의 젖줄이나 꽁지줄을 풀고 한 움큼씩 짚을 떼어내서 가져간다. 이긴 편의 짚을 지붕 위에 올려놓으면 아들을 낳게 되고, 관운이 트이며 집안이 잘된다고 하는 속신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용마루 가운데 올려놓고 양밥(비방)을 삼기도 한다. 줄을 썰어서 소를 먹이면 소가 잘 크며 튼튼해져서 일을 잘하고, 거름으로 쓰면 풍작이 된다고도 한다. 그러므로 예전에는 이 줄을 베어서 팔기도 했는데, 풍어를 소망하는 뱃사람들이 마산 같은 먼 곳에서까지 와서 사가기도 했다. 줄다리기에서 이긴 쪽은 ‘사대부’가 되고, 진 쪽은 ‘물개똥’이라 비하된다. 이러한 승패감은 2〜3달이 지나서까지도 여운을 남긴다고 한다. 

영산삼일문화제의 변화와 전망 

영산줄다리기 역시 변화의 바람을 비껴갈 수 없었다. 첫째, 1964년 이후 그 연행시기가 정월대보름에서 3·1 문화제 행사로 날짜가 바뀌는 근원적인 변화가 있었다. 또 정초 어린이들 골목줄다리기부터 시작해서 대보름의 어른들 줄다리기까지 여러 날 행했으며, 어른 줄다리기는 당기다가 쉬며 곰방대도 피워가며 밤늦게야 끝났던 것이 지금은 정작 당기는 시간이 10여 분 내외로 줄었다. 장소도 무제한 넓던 논보리밭이 다 양파 재배로 없어지고 제일 넓다는 영산중학교 교정으로 이동했는데, 이 장소 이동은 영산줄다리기의 결정적인 축소 요인이 되었다. 한쪽 줄 길이가 40미터로 제한되니 거의 옛날 150미터의 1/4로 줄면서 굵기도 몸줄 115가닥이 30가닥으로 줄어들었다. 참여 인원도 현저히 감소했다. 옛날 줄다리기의 압권은 줄다리기보다 그 전초전인 진잡이였다. 대장·중장·소장들이 비호같이 말을 몰고 적진에 달려드는 공격과 수비는 손에 땀을 쥐는 장관이었는데 말이 소로 바뀌었다가 현재는 인공적으로 만든 이동식 말상을 타고 칼춤을 추는 식으로 변화해왔다. 

영산줄다리기는 여러 가지로 여건이 불리한 농촌지역의 소규모 지연공동체가 운영하는 성공적인 향토축제의 한 모델로서의 위상을 지속, 강화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여전히 어색한 부분도 없지 않다. 전통적인 장군 복장에 선글라스를 쓰는 것이나 칼을 들고 춤을 추는 동작 역시 어설프기만 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장면이 바로 21세기 한국 축제의 현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전통문화의 계승으로서 군사복의 착용, 낭만적 군사문화의 잔존물로서 선글라스, 평상시 생활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칼춤 등 영산줄다리기의 장군은 그렇게 우리 역사와 현재를 담아내고 있지만, 여전히 영산 줄다리기의 신명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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