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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공 - A Battle or Wits 본문

문화 속 시대 읽기/영화 속 시대읽기

묵공 - A Battle or Wits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1. 6. 10. 11:19

묵공 

- A Battle or Wits



글·김봉석 영화평론가/lotusidnaver.com


기원전 5세기의 중국은 많은 소국이 힘을 겨루는 춘추전국시대였다. 나라의 힘이 강해지면 어김없이 약한 이웃 나라를 침공 했고 힘이 약해지면 반대로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아야 하는 약육강식의 시대. 하루아침에 나라를 잃은 왕의 신세도 비참했겠지 만 가장 힘든 것은 백성이었다. 다른 나라를 침략할 때에는 병사나 짐꾼 등으로 전쟁터에 나가야만 했고 침략을 받을 때에는 무
참하게 학살당해야 했다. 원하지 않은 혼란과 고통은 진나라가 통일을 할 때까지 반복 되었다. 하지만 통일이 되었다고 해도 백성들의 고난은 여전하다. 다시 진나라의 폭정에 시달려야만 했으니까. 강자만이 살아남았던 춘추전국 시대에 는 백성들에게 공자나 노자의 가르침이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당대에 나타난 묵자는 독특한 사상을 펼쳤다. 묵자는 공자의 인(仁)을 차별적인 사랑이라 비판 하고 모든 사람 심지어 노예까지도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침략당한 나라에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찾아가 힘을 빌려주었다. <묵자>에는 도덕적 인 가르침만이 아니라 성을 방어하는 방어 기술들도 자세하게 실려 있다. 공격을 위한 병법으로는 <손자병법>이 최고였지만, 수비를 위해서는 묵가의 병법이 더 뛰어났다고 한다. 묵가는 침략 전쟁을 비난하는‘비공’이라는 사상으로, 약소국을 위협하는 강대국에 맞서 평화를 지켰다. 결코 남을 먼저 공격하는 일이 없으며, 다만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만 전투에 임했던 것이다. 이 처럼 난세의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묵가이지만, 묵가를 따르던 사람들은 진나라가 대륙을 통일한 후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묵가의 헌신적인 노력을 그려낸 영화 <묵공>의 원작은 모리 히데키의 만화다. <묵공>은 일본 만화가의 작품을 중국과 한국이 합작으로 만들어낸 동북아시아의 3국이 하나로 뭉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묵공> 은 원작의 서두인 조그만 성(城) 양성을 둘러싼 공방전을 영화화한다. 춘추전국시대, 조나라의 10만 대군이 인구가 겨우 4천명인 작은 성, 양성으로 진군한다. 묵가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도착한 사람은 혁리 하나뿐이다. 혁리는 모든 병권을 넘겨받고 조나라의 장수인 항엄중과 맞선다. 혁리는 양성의 백성들과 함께 성을 지켜내고 혁리를 미더워하지 못하던 장수와 병사들의 신임도 얻어낸다. 하지만 혁리의 고뇌와 고난은 그 때부터 시작된다. 온몸에 불이 붙어 죽어가는 병사들, 혁리의 함정에 빠져 떼죽음을 하는 적군의 병사들을 보면서 혁리는 절망한다. 아무리 약소국을 도와주는 것이지만 죽어가는 침략국의 병사들 역시 무고한 백성이다. 눈앞에서 사람의 팔다리가 잘려 나가고 피를 토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아무리 정당한 전쟁이고 아무리 적군이라도 한탄을 할 수밖에 없다. 죽어가는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인 것이다. 혁리의 헌신은 백성들에게 지지를 얻지만 교만한 양왕과 아첨꾼인 귀족들에게는 오히려 질시를 받는다. 조나라를 물리친 혁리가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틀림없이 왕권을 위협할 것이라면서 귀족들은 당장 혁리를 성 밖으로 내보내라고 간언한다. 그 말 을 들은 양왕은 당장 혁리를 배신한다. 그가 원한 것은 양성의 평화가 아니라 권력의 안정이었다. 혁리는 배신당하고 그를 따르던 자들은 반역죄를 뒤집어쓴다. 전쟁을 없애기 위해서 약자를 돕는다고 했지만, 약육강식의 법칙뿐이었던 춘추전국시대에 그것이 가능했을까? 혁리는 양성을 조나라 군사에게서 구해냈지만, 양왕의 손에서는 구해내지 못했다. 포악하고 어리석은 왕은 과거나 미래나 여전히 양성을 지배하고 있다. 물론 조나라 군사가 들이닥쳤다면 남자는 노예로 끌려가고 여자는 능욕을 당했을 것이다. 혁리는 최악을 막았지만, 차악을 피하게 할 수는 없었다.


묵가와 혁리는 이상주의자다. 그들은 이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친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 아니 세상은커녕 양성 하나도 구하지 못한다. 혁리를 쫓아낸 양성은 끔찍한 지옥도로 변한다. 혁리에게 동조했던 사람들은 붙잡
혀 죽거나 팔을 잘리거나 한다. 양왕의 아들은 혁리를 따라 가겠다고 하지만 혁리는 거절한다. 당신이 묵가의 일원이 되는 것보
다는 왕이 되어 양성을 평화롭게 다스리는 것이 백성을 위해 더 좋은 일이라고. 현실 적으로는 그게 맞는 말이다. 성을 구하고 나라를 구해 줘도 권력층의 학정은 바뀌지 않는다. 혁리, 아니 묵가가 던진 돌 하나로는 역사가 바뀌지 않는다. 연인이 된 일열 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애절하게 찾아 헤매던 혁리이지만 결국은 그녀조차도 구하지 못한다.

<묵공>은 혁리가 양성을 위해 헌신하다가 마침내 배신당하는 과정을 쓰라리게 보여준다. 혁리는 양성을 구해낸 영웅이지만 결코 초월적인 인간이 아니다. 혁리라는 인간은 이겨내겠다는 정신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의 힘을 하나로 뭉쳐내는 구심점일 뿐 이다. 혁리가 사라지자, 무심한 대중은 그들을 살린 영웅을 한순간에 잊어버린다. 그들은 오로지 눈에 보이는, 그들이 믿고 있던 허상만을 쫓아간다. 혁리는 고아들과 함께 떠나가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비참하게 죽어가고, 양왕은 폭정 끝에 백성의 반란으로 죽는다.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게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장지량 감독은 영웅적인 드라마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겪어야만 하는 잔인하고 비정한 현실의 역사를 그려낸다. 어깨에 힘을 주거나 과장하지 않고 그저 혁리와 양성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관계’를 신중 하게 파고들어가는 것이다. 관객은 때로는 무심하게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처절하게 ‘현실’자체를 목도해야만 한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묵가의 사상은 남았지만 묵가군은 완전히 소멸해버렸다. 영화는 깔끔하게 양성의 이야기만으로 마무리하지만 원작은 장황하게 묵가의 고뇌를 말해준다. 약자의 편에서 수비를 하는것이 옳을까, 아니면 무력으로 모든 이를 굴복시켜 평화로운 강대국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장이모우의 <영웅>은 진시황의 손을 들어주지만, <묵공>은 묵가의 평화사상에 손을 들어준다. 물론 양성을 위해 그토록 애쓴 혁리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갈 길만을 갔다. 그러나 현실이 아무리 잔인해도 결코 이상을 버릴 수 는 없다. 이상이 없이는 인류의 진보도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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