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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속 시대 읽기/다큐 리뷰

[다큐리뷰] 진짜, 가족의 탄생 <마이 플레이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4. 2. 25. 12:01

진짜, 가족의 탄생 <마이 플레이스>,
“그건 평균이지, ‘정상’이 아니에요”

 

 

글 성지훈/ acesjh@gmail.com 


 

사고 (事故)[사ː고][명사]
1.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
2.사람에게 해를 입혔거나 말썽을 일으킨 나쁜 짓.

 

“사고를 쳤어”. 한 숨을 푹 내쉬는 아버지, 죄를 지은 듯 침통한 표정을 짓는 어머니, 고개를 푹 숙인 딸, 흥분한 듯 숨을 씩씩거리는 오빠. 사랑의 도피행각 끝에 배가 불러 나타난 딸이 ‘사고’란 대사를 뱉으면 비장한 배경음악과 함께 이런 장면이 연출된다. 전형적인 한국의 홈드라마라면 그렇다.

 

사전에 나온 것처럼 ‘사고’는 ‘불행한 일’이며 ‘나쁜 짓’이다. 하여 공공기관의 수장을 낙마시킬 만큼 혼외임신을 부도덕한 짓으로 여기는 한국사회에서 결혼하지 않은 처녀의 임신(사실 이 표현도 지극히 모순적이다. 처녀가 어떻게 임신을 하나)은 분명 ‘사고’다. 더구나 임신을 했으면서 결혼은 굳이 하지 않겠다는 딸이라면 이보다 큰 사고뭉치는 없다. 딸을 임신 ‘시킨’ 그 놈(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사위는 아니다)은 결혼해 딸과 손주의 인생을 ‘책임’지려 하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인 거다.    

 

# 정상성에 대한 질문

전형적인 한국의 드라마에서 사고친 딸의 귀환 시퀀스만큼이나 흔한 연출은 또 임신한 연인에게 “내가 책임지겠다”며 “결혼하자”말하는 남자의 결기어린 선언이다. 임신한 연인을 대하는 남성들의 책임감은 대부분 ‘결혼제도로의 편입’이라는 형태로 이어진다. 그것은 그대로 결혼제도 바깥에서의 출산과 육아를 무책임한 것, 그리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긴다는 의미다.

 

<마이플레이스>는 어느날 느닷없이 임신해서 나타난 감독의 여동생과 가족들, 그리고 여동생의 아들 소울이의 삶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그야말로 계획되지 않은 사고를 치고 집에 돌아온 딸과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버지, 그리고 한국사회에 대한 이야기.

 

<마이 플레이스>의 박문칠 감독은 영화에서 “평소 자신을 꽤나 진보적이라고 생각해왔지만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아이를 임신해서 돌아온 여동생이 무책임하게 느껴졌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숫제 딸의 임신소식을 철저히 비밀에 부친다. “알려지면 이제 난 교회에도 못다닌다” 면서. 아버지는 손자 소울의 돌잔치 초대장에도 누구의 아이인지 정확히 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생 문숙은 이 임신이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니었고, 결혼하지 않더라도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는 계획을 분명히 갖고 있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캐나다의 정부가 지원하는 육아지원금과 학자금 대출을 통해 생활을 꾸리고 학업을 마친 이후에 대출금을 갚아나가겠다는. 실제로 문숙과 소울은 계획대로 캐나다 정부의 보조금과 학자금대출, 무상보육 시스템을 활용하며 충분히 행복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주변에서 우려한 것처럼 ‘계획에 없던 사고’, ‘무책임하고 철없는 행동’이 아님을 삶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

 

흔히 말하는 ‘정상가족’이란 어쩌면 판타지에 다름없다. 혹은 편집증이나 강박증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양부모와 미혼의 자녀로 구성된 핵가족이 역사적으로 가장 보편적인, 가족을 대표하는 가족형태이며 정상성을 획득한다”는 이데올로기는 우리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사생아(私生兒)라는 표현은 이 이데올로기가 우리사회에서 갖는 역할을 여실히 드러내는 말이겠다. “공식적이지 못하고 사사롭게 태어난 아이”라는 뜻인 사생아의 영어 표현은 ‘Love Child’. 오히려 사랑과 출산, 행복 같은 말은 결혼 바깥에 있는지 모를 일이다.

 

 

조금 심각해져본다면, 엄부자모의 단란한 4인 가정이라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국가와 자본이 ‘국가권력’과 ‘생산수단’을 소유한 채 다양한 방법으로 ‘시민의 성’을 통제하여, 가능하면 최고의 노동력, 즉 국민을 끊임없이 가장 싸게 제공받음으로 궁극의 이익인 국가경쟁력, 자본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만들어낸 장치다. 미셸푸코는 “성권력의 두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국가와 자본이 ‘육체의 규율’과 ‘인구조절’이라는 두 가지 극을 중심으로 이용해 ‘생명의 정치적 배치’를 관리하고 통제한다”고 말한다.
 
결국 덧없고 무의미한 정상가족, 정상성에 대한 강박이 오히려 우리의 삶을 통제하고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한국사회의 비혼 여성이 아이를 키우기 어려운 것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들어 놓은 것’에 가깝다.

 

 

# 가족의 의미

하여 한국사회에서 가족은 모든 억압과 통제의 기초단위다. 그러나 그럼에도 가족은 살아갈 힘을 만들어주는 모든 행복의 기초단위이기도 하다. <마이 플레이스>에서 감독은 회사를 그만두고 자신이 연출했던 단편영화를 소개한다. 사회로부터 결국 소외당한 주인공이 결국은 엄마 품으로 찾아드는 내용의.

 

언젠가 가족의 정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족을 “억지를 부릴 수 있는 사람과 공간”이라는 말로 정의한 적 있다. 부당하고 불합리하고 다소 폭력적이지만 의례히 받아 줄 것이라고 여기며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는 대상들이라는 의미였다. 어디서 큰 빚을 지거나 혹은 말도 안되는 범죄를 저지르거나 그도 아니라면 방구석에서 잉여노릇하며 백수로 피둥피둥 한심하게 살아도 받아줘야하는, 받아 줄 수 있는 존재들. 최후의 순간까지 치달은 후에 결국 돌아갈 수 있는 공간이라는 믿음의 대상 같은 것. (물론 가족이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는 당위를 강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의 대상이 되는 존재가 가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가족이란 친족간의 혈연적 유사성이 아니라 오히려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유대관계가 그 핵심에 더 가깝겠다.

 

결혼은 하지 않더라도 아이는 갖고 싶었던 문숙의 솔직한 속내는 “어떤 경우라도 자기 편이 돼주는 존재”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기존의 가족에서 느끼지 못했던 유대관계를 자신의 분신으로 부터 얻고 싶었던 마음. 

 

 
# 다시, 가족의 탄생

<마이 플레이스>에 등장하는 가족들은 서로 오해하거나 잘 모르고, 그래서 왜곡되거나 삐뚤어졌던 혈연적 가족관계에서 소울의 탄생이후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가까워지는 유대관계를 형성한다. 다시 하나의 가족이 탄생하는 듯한 모습이다.

 

딸 문숙은 폭력적이고 권위적이었던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미워했지만 소울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또 한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마찬가지로 ‘정상적이지 못한 삶’을 살아야 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알게 되면서 아버지를 이해할 계기를 갖게 된다. 감독 역시 ‘이방인’과 ‘비정상’으로 살아야 했던 가족사를 더듬으며 “자기 자신을 숨기는 것에 능숙했던” 어린 시절과 지금의 모습을 되새긴다.

 

차별과 가난에서 도망쳐 캐나다를 찾았던 부모세대와 다시 돌아온 한국에 적응하지 못하던 자식세대. 두 세대의 고통은 ‘다름’을 배제하고 ‘평균’을 강요하는 사회적 억압이었다. 남들과 다른 삶을 용납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경직성에 ‘이방인’으로 떠돌던 가족. 그러나 결국 서로를 이해하고 지탱시켜주는 것 역시 가족이라는 것을 이들은 소울의 탄생을 통해 다시 깨닫게 된다. 한 곳에 모여 살지 않아도, 매일매일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유지되며 서로의 버팀목이 돼주는 가족, ‘마이 플레이스’의 탄생이다.

 

# 소울

감독 가족의 결합을 이끌어낸 소울은 어느덧 아홉살이 됐고 캐나다에서 행복하게 성장 중이다. 가끔 아버지에 대한 질문을 하기도 하고 아버지와 함께 살지 않는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엄마를 원망하거나 자신의 가족을 ‘비정상’이라고 여기지 않는 건강한 어린이로 자라고 있다 한다. 소울은 한국과 몽골(감독의 아버지는 몽골에 거주하며 봉사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캐나다에 각각 떨어져 사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삼촌, 엄마를 모두 가족이라 부르며 “사람들은 생김새와 피부색이 모두 다르다”는 사실을 관찰해낼 만큼 영특하고 “그래도 모두 같아졌으면 좋겠다” (글쓴이의 자의적 해석일 수 있지만, 모두 똑같은 마음으로 살면 좋겠다는 의미로 들렸다)고 말할만큼 기특한 어린이로 자라고 있다. 다름을 인정하고 체화하며 ‘정상’을 강요받지 않는 아이들이 자라 만들 미래에 대한 기대를 증폭시키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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