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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리뷰] 마음을 빨래해주는 다큐, 우리학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3. 10. 24. 23:08

마음을 빨래해주는 다큐, 우리학교


 - 학교가 아이들을 키운다는 믿음


글 성지훈/ acesjh@gmail.com 


 

대학수학능력 시험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공교육 12년간의 모든 노력이 투여될 단 하루에 수험생들은 물론 그 주변사람들도 애가 녹는 시기다.

 

작년 이맘쯤에는 한 도시에서 십 수 명의 청소년들이 잇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제각각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지만 그들 모두의 공통점은 아마 가정, 학교, 사회 어느 곳에도 전할 수 없었던 외로움이었을 테다.

 

국제중, 특목고, 자사고, 명문대. 언제부턴가 한국사회에서 학교의 역할은 ‘교육’보다는 ‘진학’에 방점을 찍고 있다. ‘높은 교육열’은 곧 ‘높은 사교육비’로 이어졌다. 한국은 GDP 대비 사교육비 비중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다. 교실에는 친구, 우정, 선생님, 꿈, 희망 같은 말보다 ‘일타강사’, ‘쪽집게 과외’, ‘합격비법’ 같은 말이 넘쳐난다. 최근 어느 사교육업체는 광고에서 “우정이란 그럴듯한 명분으로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라”며 “친구는 네 공부를 대신해주지 않는다”고 설교했다.

 

그러나 정말 말만 그럴듯한 우정이란 우리에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일까. 그럼 학교란 우리에게.

 

# 글로 배우지 않아도 아는 ‘함께 사는 법’

김명준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학교>의 제목은 ‘혹가이도 조선 초중고급학교’(남한의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훗카이도’가 올바른 표기지만 영화에서 문화어인 ‘혹가이도’를 사용하기 때문에 본문에서도 혹가이도로 통칭)의 구성원들이 조선학교를 ‘우리학교’라 부르는데서 왔다.

 

조선학교는 해방 이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재일조선인들이 조국의 말과 글, 조선인으로서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세운 학교다. 영화의 배경이 된 혹가이도 조선학교는 북해도 섬의 유일한 조선학교로 초중고등부가 모두 함께 생활하며 학교 아이들 중 일부는 12년의 학창시절을 같이 보내기도 한다.

 

사실 ‘우리학교’라는 말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말이다. 우리집, 우리학교, 우리엄마, 우리편. 한국어는 ‘나’라는 표현보다 ‘우리’란 표현을 더 즐겨 사용한다. 영어의 소유격 ‘My’를 해석하면 대부분의 것들은 ‘우리’로 번역된다. 그건 아마 내가 소유하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오직 나만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두의 것에 더 가깝다는 인식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 하는 경구들을 굳이 빌지 않더라도 살아가는 일이란 결국 나 아닌 것들과 관계 맺고 그 관계를 유지하는 노력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을 길러내는 교육은, 또 그 교육의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는 학교의 본령은 분명히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데 있다.

 

영화 <우리학교> 속 ‘우리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과 선생님들은 그 교육과 학교의 본령을 충실히 지키고 있다. 사실 너무나 당연한 그 모습이 그토록 뭉클했던 이유는 그 본질에 충실한 학교의 모습에 그대로 비치는 지금 이곳의 학교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혹가이도 우리학교의 아이들은 타국 땅에서 고국의 말과 글을 지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학내 조선말 100% 사용’이라는 약속을 정한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오직 조선말만 사용하며 생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려서부터 조선학교에 다니지 않았던 편입생들은 더 그렇다. 어린 시절 내내 일본학교에 다니다 고등학생이 돼서야 조선학교로 편입한 ‘려실’은 그래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일본어로 말하지 않으면 목표달성에 지장을 주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자연히 아이들과는 계속 서먹해지고, 적응은 곱절로 힘들어지는 악순환. 그러나 반장 재훈은 “조선말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편입생들이 일본어를 쓰는 것은 약속을 깨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잘 쓰지도 못하는 조선말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더 쉬이 조선말을 배우고 익힐 수 있는 물꼬를 터주는 일. 려실은 후에 그 날을 떠올리며 “울듯이 기뻤다”고 말했다. “말하지 않았는데 너는 어찌 나의 사정을 알아주었느냐”면서.

 

<우리학교>가 개봉한 2007년, 남한의 서점가에는 <배려>란 자기계발 서적이 불티난 듯 팔리고 있었다. 경쟁하는 삶이 아니라 배려하는 삶이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전하는 내용이었다. 3, 40대 직장인들에게 이 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모습을 보며 려실에게 일본어를 써도 괜찮다고 말해주던 재훈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다 큰 어른이 돼서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책 한 권으로 배우겠다고 덤비는 모습이 어쩐지 ‘말하지 않아도 친구의 사정을 이해하는’ 열일곱 재훈의 진짜 배려 앞에 부끄러웠다.

 

나이가 들면 분명 알게 되는 일들이 있다. 공존하는 삶, 서로를 이해하는 일이 결국엔 자신을 살아가게 해준다는 것. 어쩌면 요즘 힐링이니 위로니 격려니 하는 ‘말’과 ‘글’이 득세하는 것은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 때문이겠다. 그러나 사실 이미 학교에서 친구들과, 선생님과 살 부대며, 다투고 화해해가며 배웠어야 할 ‘생활’들.

 

“우리를 보시라 그 어디 부럼 있으랴,
마음껏 배워가는 이 행복넘치네”

 

-<우리학교> OST ‘우리를 보시라’ 中

 

 

# “어려움이 있을 땐 사양 없이 우리학교를 찾아오십시오”

군사부일체라고 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선생님들은 ‘담탱이’나 ‘꼰대’같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양 극단의 어느 쪽이든 선생님이란 존재는 언제나 어렵고 멀다.

 

그러나 ‘우리학교’의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지근거리에 있다. 그들은 아이들과 말뚝박기를 하고 함께 케이크를 만들고 한 이불을 덮고 잔다. ‘우리학교’의 선생님들에게 아이들은 통제와 감시, 훈육의 대상 보다는 말벗이고 놀이동무고 사춘기를 겪고 있는 동생에 가깝다.

 

그건 우리학교의 특성보다는 어쩌면 재일조선인 공동체의 유대감에 가까울 수도 있다. 무국적자나 다름없는 신분으로 온갖 박해와 소외를 겪으며 살아온 이들이 다시 그런 삶을 이겨나가야 할 다음 세대의 동생들, 후배들에게 갖는 안타까움 섞인 사랑. 때문에 ‘우리학교’ 선생님들은 지식의 전승이나 진학지도가 아니라 서로를 의지하고 기대는 법을 가르친다. 낮선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할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가르침. (하지만 사실 어느 시간 어느 공간이든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 이방인이 아닌 사람이 있을까)

 

영화의 말미, 혹가이도 우리학교 21기들의 졸업식에서 아이들은 한 명, 한 명 학교생활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눈물짓는다. 그리고 그 추억의 한 켠에는 반드시 선생님들이 있다. 강사나 교사, 꼰대, 담탱이가 아니라 ‘선생님’. ‘우리학교’의 아이들에게 선생님은 ‘먼저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액면 그대로의 의미다.

 

선생님들은 험난한 세상을 맞이할 아이들에게 “어려움이 있을 땐 사양 없이 우리학교를 찾아오라”고 말한다. 언제까지고 기댈 수 있는 선생님과 학교가 돼주겠다는, 외롭고 고단한 삶을 함께 견뎌주겠다는 소중한 다짐과 약속.

 


# 이념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요

조총련, 재일조선인, 북한. 남한의 사람들에게 여전히 낯설고 두려운, 또 어려운 이름들이다. ‘우리학교’의 교실엔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초상화가 걸려있고 아이들은 ‘북조선’을 조국이라 부른다. 운동회엔 인공기가 걸리고, 표준어가 아니라 문화어를 배운다. ‘우리학교’의 사람들은 “고향은 남쪽이지만 조국은 북쪽”이라고 여긴다. 어쩌면 어떤 이들은 ‘종북빨갱이’를 운운할지도 모르겠다. 

 

해방이후 남한도 북조선도 선택하지 않고 사라진 나라 ‘조선’의 국적을 선택했던 동포들을 남한정부가 어떻게 외면했는지, 일본정부가 얼마나 박해했는지를 논하면 그들이 조국을 북쪽이라 말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학교’의 아이들에게 남과 북, 북과 남은 실체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대립하고 적대하는 관념의 대상이 아니다. 아이들은 한반도에 살고 있는 이들보다 더욱 분단의 비극과 지난시절의 비극에 맞닿아 있다. 등굣길에 치마저고리가 찢어지고, 수없는 협박전화를 받아야 하는 아이들. 국적선택을 강요받으며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삶. ‘우리학교’의 아이들에게 분단이란 모호한 이념의 대립이나 첨예한 정치의 영역이 아니라 삶의 일부다. 정작 색안경을 모로 끼고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은 오히려 분단을 만들고 대립을 유지하는 어른들.     

  

조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은 일본 우익들의 입항반대시위를 만났을 때 성에가 낀 버스 유리창에 통일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는다. 그건 아마 ‘적대’가 아니라 ‘평화’를 바라는 마음. 오직 그것만이 이 무의미하고 지루한 싸움을 끝낼 길이라는 것을 체득한 아이들의 마음이겠다.

 

어린 품속에 그려본 사랑하는 조국은 하나였네
오랜 세월에 목이 다 말라도 마음은 서로 눈물로 적셨네
- <우리학교> OST ‘하나’ 中


 

# 학교가 아이들을 키운다는 믿음

어떤 삶과 어떤 교육이 옳은 것이라고 분명히 단정할 수 없다. ‘우리학교’의 모습만이 이상적이고 아름답다고 마냥 찬미할 수도 없다. 고도의 자본주의사회에서 학벌과 경쟁의 승리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작금의 교육현실에서 이상론만을 주절거리고 지금 딛고 있는 현실과 한참이나 동떨어진 꿈만을 강요하는 일이 얼마나 허무하고 의미 없는지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경쟁하고, 서로를 적대하고, 험난한 삶에 지칠 아이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한 시절만큼은 쥐어주고 싶다. 내가 이기는 법보다 우리가 함께 하는 법을 먼저 떠올리고 선생님 눈을 피하기보다 선생님께 조언을 구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시절, 세상은 지금보다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 믿고, 나만 잘 사는 일을 어리석다 여기는 시절. 삶에 그런 한 시절쯤 있어야 평생을 두고 곱씹으며 힘낼 수 있는 동력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학교. 어려움이 있을 땐 사양 없이 찾아 갈 수 있는 ‘우리학교’. 우리를 키워주고 언제까지나 최후에는 기대서 쉴 수 있는 그런 학교에 대한 꿈.

 

# 덧붙여

지난번 소개했던 <그리고 싶은 것>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일본은 점차 극우세력이 득세하고 있다. 북일관계는 해를 거듭하며 악화되고 국제정세도 급변하고 있다. 그리고 당연히 재일조선인들과 ‘우리학교’들은 전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는다. 재일동포들이 북쪽을 조국이라 여기게 된 이유는 남한정부의 무관심과 무기력함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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