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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속 시대 읽기/다큐 리뷰

[다큐리뷰] 결국 우리가 그려야 하는 것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3. 8. 25. 21:49

결국 우리가 그려야 하는 것


글 성지훈/ acesjh@gmail.com 

 

  

한국에서 일본은 여전히 금기다. 친일파, 일제의 잔재 같은 말들은 어디서든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전가의 보도다. 선거판에서 친일파의 후손 운운하며 상대를 공박하는 정치인의 모습은 그다지 낯선 풍경도 아니다. 그 영향인지 이 사회엔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에 대한 증오도 곳곳에 도사린다. 후쿠시마에 재앙이 닥쳤을 때, 도움의 손길을 거부하거나 오히려 고소해하는 한국인이 적지 않았다.

 

사실 그 증오심이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지난 세기 일본은 한국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군국주의의 깃발을 세우고 젊은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가난한 촌부들의 식량을 빼앗았고, 나라 고유의 말과 글을 없앴고, 학대하고 착취했다. 그리고 여성들을 집단 강간했다. 먼 과거의 일도 아니다. 고작 60여 년. 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당했던 일이다. 어찌 그걸 그대로 잊어버릴 수 있을까.

 

그러나 전쟁과 증오, 폭력, 착취, 학대, 복수. 그걸 그대로 일본에 돌려준다고 하여 과연 아픔이 치유되고 상처가 아물고 다시는 그런 일들이 반복되지 않는 것일까.

 

 

 

# 그려야 하는 것

영화는 2007년에서 시작한다. 당시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기점으로 전 일본에 우경화의 바람이 불어 닥치는 시기였다. 한중일의 그림책 작가들은 평화그림책만들기 프로젝트를 제안해 삼국에서 아시아의 평화를 주제로 한 그림책을 동시에 출판하기로 한다. 한국에서는 권윤덕 작가가 참여했고 권 작가는 13살에 위안부로 끌려갔던 심달연 할머니의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만들기로 했다. 전쟁과 폭력 속에 무기력하게 내던져진 소녀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

 

위안부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의 성적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한국과 중국, 베트남 등의 식민지 국가에서 징용된 일본군의 성노예를 지칭한다. 일본군은 위안부를 동원하기 위해 납치나 인신매매 등의 방법을 동원했다. 위안부들은 정해진 일정표에 따라 하루에 수 십 차례 강간을 당했으며 갖은 폭력과 학대에 시달렸다.

 

1990년대 중반까지 일본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위안소는 군 당국의 요청으로 설치됐고, 군이 위안소 설치 관리와 위안부 이송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고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최근 일본사회의 급격한 우경화로 위안부 범죄 자체를 부정하거나 오히려 위안부 피해자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등 범죄사실을 축소 은폐하려는 움직임도 가시화되고 있다.
  
영화에서 권윤덕 작가는 일본의 청소년들을 만나 그림책의 초안을 보여주며 일본이 저지른 전쟁 중 성폭력 문제에 대해 질문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은 하나같이 “알지 못하는 일”이라고 답한다. 평화그림책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일본의 출판사 인사도 “평화로운 시기를 살아가는 일본의 아이들에게 전쟁의 기억을 알려주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은폐. 실제로 일본사회는 위안부 범죄에 대한 국가의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 없이,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 국민기금’을 통해 피해자들에게 개인적인 위로금을 지급한 것으로 사건을 종결지으려 하고 있다. 

 

잊혀지거나, 잊게하거나.

이제 고작 60여 년이 지났을 뿐이지만, 어느덧 생존한 피해자가 57명(이 글을 쓰고 있는 8월 11일에도 피해자 이용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뿐이 남지 않았다. 기록하고 기억해야 할, 그려야 하는 이야기들.

 

  
# 그들이 그리지 못하는 것

그러나 권윤덕 작가의 ‘꽃 할머니’는 여전히 일본에서 출판되지 못했다.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본의 우익세력들, 그들이 득세하며 급격히 우경화되는 일본사회. 비단 그들이 아니라도 지난 시기 자국의 범죄를, 그것도 이렇듯 더럽고 잔인한 범죄를 들춰내서 아이들에게 알려주는 일이 쉽지는 않은 일이다.

 

그림책의 일본 내 출판을 맡았던 ‘동심사’의 회장은 작가를 만나기 위해 직접 한국을 방문하고 서대문 형무소를 견학, 참배하는 열의를 보인다. 그러나 그녀가 권 작가에게 보내온 메시지는 끝내 “일본 사회 내에선 태평양 전쟁 이전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어 더욱 빈틈없이 준비해 출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늘 일본의 정계는 심각하게 우경화되고 있다. 아베 총리는 평화헌법의 개정을 촉구하고, 어느 유력 정치인은 “위안부는 정당했다.”는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일본 내 우익집단들은 위안부 범죄에 대한 양심적 활동을 벌이는 시민단체들에 대한 테러도 자행하고 있다.

 

 

# 결국 우리도 그리지 못하는 것

그러나 이 같은 일이 비단 일본에 국한돼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전쟁 중 성폭력의 피해자임과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다. ‘라이따이한’. 영화 속에서 권윤덕 작가는 어린 청소년들을 만나며 한국의 군인들도 1970년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많은 민간인 여성들을 강간했던 사실을 설명했다. 그리고 한국의 어린 아이들도 일본의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같은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베트남의 민중들이 그 광경을 봤으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살인과 폭력, 그 광기의 소용돌이에서 분출되는 욕구. 그 욕구의 해소를 위해 피해를 입은 여성들. 사실 위안부 문제는 (그 규모와 잔혹함에서 한국군과 일본군의 그것에 양적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질적으로 완전히 동일하다.) 가해국과 피해국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전쟁이라는 광기에 희생된 여성인권의 문제다. 기실 한국사회, 특히 정부도 라이따이한의 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물론이고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조력에 대단히 인색하다. (이용과 조력은 엄연히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지 ‘않는’ 것들은 일본의 우경화와 우익세력이 아니라 범죄를 범죄라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 때문이다. 그것이 서푼짜리 애국주의든, 전근대적 마초이즘이든.

종종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나 소설들은 피해자 할머니들을 질곡과 수난의 역사를 견뎌온 가여운 피해자로만 포장하거나, 일본군의 잔인함과 군국주의를 성토하는 선동을 일삼는다. 혹은 일본군에게 ‘더럽혀진’ 여리고 약한 소녀의 이미지를 덧씌우거나. 이런 일련의 시도들은 모두 본질의 은폐를 호출한다.

 

영화에서도 한국의 또 다른 남성 작가와 출판사 인사들은(남성이다) 권 작가의 그림책에 욱일승천기가 빠져있음을 지적하며 가해자로서의 일본을 강조하려 한다. 그러나 권윤덕 작가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일본군 가해자에 희생된 피해 소녀들이 아니었다.

 

 

# 그리고 싶은 것  

결국 그리고 싶은 것은 전쟁과 거기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성범죄, 그를 종용하는 국가권력과 그를 부러 은폐하는 애국주의다. 일본의 위안부 범죄에서 방점이 찍혀야 할 곳은 ‘일본’이 아니라 ‘성범죄’인 것.

때문에 영화를 보는 우리가 분노해야 할 것은 일본의 우익세력이나 과거의 전범들이 아니다.(그들의 사과가 필요 없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성범죄 보다 일본 그 자체에 분노하고 있던 자기 자신이다. 따라서 일본정부가 사과해야 할 것도 한국정부가 아니다. 전쟁을 일으키고 무고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강간했던 자신들의 과거와 그에 희생된 인류 전체에 대한 사과가 우선이다.

 

그림(畵)의 어원은 그리움이다. 권윤덕 작가도 그녀의 그림책을 보고 자랄 아이들도 그리고 그녀와 그 아이들을 모두 지켜보는 이들도 무엇을 그리워해 무언가를 그린다. 그리운 것은 증오가 아니다. 때문에 그려야 할 것, 그리고 싶은 것도 증오나 복수가 아니다. 그려야 할 것은 오직 평화와 위로, 용서, 화해. 그리고 그것은 과거를 올바르게 직시하고 기억하는데서 출발하며 직시하는 일이란 표면이 아니라 본질을 꿰뚫는 일이다.

 

상처가 아픈 것은 낫기 위해서다. 벌을 받는 것은 다시는 잘못을 하지 않기 위해서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미래의 거름이 되기 위함이다. 사과는 용서받기 위해 하는 것이고, 화해는 사랑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전쟁과 폭력, 학대가 없는 꽃 같은 세상. 꽃할머니가 마침내 그렸을 그 세상을 그리는 것은 남은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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