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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속 시대 읽기/다큐 리뷰

[다큐 리뷰] 나의 살던 고향은 춤추는 성미산 - <춤추는 숲>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3. 6. 26. 11:17

나의 살던 고향은 춤추는 성미산 - <춤추는 숲>


글 성지훈/ acesjh@gmail.com 


 

택시에 올라 목적지를 말하기 무섭게 기사 아저씨는 울분을 토하기 시작했다. 앞서 택시에 탔던 어느 모녀의 이야기였다. 말인즉슨, 엄마는 내내 어린 딸을 꾸중했는데 그 까닭이라는 것이 버스에서 누군가에게 자리를 양보했기 때문이란다. “제 밥그릇도 제대로 찾지 못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겠느냐”는 엄마의 걱정. 기사 아저씨는 “그렇게 배운 아이들이 자라서 어떤 어른이 될지 무섭다”고 했다.

 

간간히 소식을 주고받는 중학생 조카는 얼마 전, 현장학습으로 어느 대기업의 사옥을 방문해 ‘멘토링 스쿨’에 참가했다 한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직원들이 열네살의 중학생들에게 자신의 연봉과 학력을 과시하며 스스로 ‘멘토’라 칭한 그 강연회의 주제는 ‘꿈’이었다고. “어떤 어른이 될지 아직 생각해본 적 없다”던 조카는 “남보다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냐고 물었지만, 딱히 무어라 대답해주지 못했다.

 

 

# 다시 마을 - 인간적 삶의 복원

마포구에 위치한 성미산 마을은 ‘대안적 도시공동체’다. 초보 엄마, 아빠들은 “우리는 잊고 살았지만 아이들만은 부모세대와 달리 인간으로서 지키고 살아야 할 가치를 배우고 자랐으면”하는 마음으로 성미산 자락에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한해 두해가 지나는 동안 어느덧 마을에는 마을 밥집과, 카페, 학교까지 생겨났고 지난 지자체 선거에서는 최초로 주민공천 후보까지 내는 등 성공한 도시공동체, 풀뿌리 민주주의 실험의 대표적 사례로 지목되고 있다. 그러나 도시공동체니 공동육아니 민주주의니 하는 다소 거창한 말보다 성미산은 그저 ‘동네’, ‘마을’이라는 소박한 말이 더 어울리겠다. 불과 2~30년 전만해도 당연했던 그 ‘동네’.

 

 

감독은 영화의 초입에 카메라를 들고 동네를 누비며 동네 풍경을 자랑한다.(그렇다, 그건 분명 자랑이다.) 사람들은 장바구니를 들고 집에 가는 길에, 학교를 다녀오다가, 골목어름에서 햇볕을 쬐다가 감독과 인사를 나눈다. 이웃사촌은커녕 옆집, 앞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오늘날의 도시생활에서 인사하고 화답하고 미소 짓고 음식을 나눠먹는 마을의 풍경은 그리움과 어색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소통과 관계 맺기.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여기에 꼭 들어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인간이 인사와 화답으로 표현되는 관계 맺기 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말이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거든 대답하지 말고 얼른 집으로 돌아오라”고 가르쳐야 하는(그럴 수밖에 없는 세상이라는 점을 또한 인정한다) 세상은 분명 병들어 가고 있다.

 

어느덧 부모세대가 된 이들, 그러니까 속칭 386세대라 불리는 이들은 비록 가난하지만 사랑이 풍부한 어른들에 의해 키워졌다. 그들에게는 할머니도 있고 할아버지도 있었다. 이모와 삼촌은 물론 동네 아주머니들과 형, 누나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 사랑 많은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는 법, 사랑을 주는 법, 받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그 힘이 아마 암울했던 시대, 그들이 목 놓아 세상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원동력이었을 것.

 

그러나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는 무한경쟁의 세상을 견뎌내야 하는 아이들, 옆에 앉은 친구는 곧 너의 경쟁자임을 잊지 말라고 강요하는 유명학원의 광고 문구를 보며 자라야 하는 아이들은 어디서 사랑을 나누고 관계를 맺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까. 

 

그래서 서로 인사를 건네고 대화를 나누는 일이 이뤄지는 곳, 마을은 그대로 인간적 삶의 복원을 향한 첫걸음이다. 시간과 관계의 축적. 단골손님과 동네 형들과 옆집 아줌마와의 인사, 다툼, 화해가 켜켜이 쌓여 만들어지는 마을 공동체. 그 관계의 중첩과 마을이 서로를 돌보고 안아주는 공동체를 만들 것이라는 희망.   

 

 

# 나무를 심는 사람 - “생명에는 주인이 없어요”

감독은 어느 날 성미산 마을의 열세 살 승현이가 파헤쳐진 나무의 뿌리에 흙을 덮어주는 장면을 포착한다. 나무가 안쓰럽다는 듯 승현이는 오랫동안 쪼그리고 앉아 고사리 손으로 흙과 나무뿌리를 어루만지고 있다.

어느 사학재단의 개발이익을 위해 성미산은 파헤쳐지고 있다. 아이들이 직접 심은 어린나무들도 수십 년간 마을을 지켜봤을 아름드리도 포클레인과 전기톱 앞에서 허물어진다. 거세게 저항하는 주민들과 아이들에게 관청 공무원들과 시공사 직원들은 ‘사유지’임을 강조한다.

 

그러게. 제 소유인 땅에서 주인이 무얼 하든 누구도 상관할 수 없다. 어른들의 세계는 그렇다. 그러나 승현이는 “생명에는 주인이 없다.”며 어른들의 어리석음을 질책한다.

“이 작은 나무에도 온갖 개미들이며 벌레들, 진딧물이 있어요.”

제 주변에 살아있는 것들을 모두 바라볼 수 있는 지혜. 아파트 평수를 넓히는 것을 생의 지상과제로 삼은 어른들에게는 없는 그 지혜가 산을 놀이터 삼아, 나무와 꽃을 친구삼아 살아온 아이들에게는 있다. 사람이 버젓이 앉아있는 땅을 중장비로 파헤치고, 높은 곳에 매달린 사람들을 밀쳐내고, 전기톱으로 사람을 위협하는 어른들에게는 없는 지혜.

 

여담이지만, 마을의 한 아이는 공사장 주변에 포도 씨를 뿌리면 공사가 멈출 것이라는 의견을 내놨다. 포도가 자라나면 인부아저씨들이 포도를 따먹느라 공사를 안 할 것이라는 이야기. 중장비로 위협하고 완력과 악다구니로 저항해야 하는 어른들을 모두 일순간에 부끄럽게 만드는 말이었다.  
  
그는 떡갈나무를 심고 있었다. 그곳이 그의 땅인지 나는 물었다. 그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그 땅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는 것일까?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저 그곳이 공유지이거나 아니면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않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겠느냐고 추측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볼 생각이 없었다. 그는 아주 정성스럽게 백 개의 도토리를 심었다 - 장 지오노, 나무를 심은 사람 中

 

성미산을 놀이터삼아 자란 아이들은 땅과 나무를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그저 존재하는 것,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어른들은 ‘자연보호’니 ‘녹색성장’같은 표어를 내걸며 땅을 파헤치고 나무를 자른다. 그건 사람도 자연도 그저 자신의 주변부, ‘환경’으로만 대하는 태도와 자신을 포함한 뭇 생명을 모두 자연의 일부,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 인식하는 태도의 차이다. 

 

# 다시, 나의 살던 고향은

 

마을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영화의 흐뭇한 시선은 울고, 다치고, 슬퍼하는 이들의 흔들리는 시선으로 서서히 옮겨간다. (영화에는 감독의 촬영카메라 외에도 주민들이 핸드폰이나 캠코더로 직접 찍은 영상들이 적지 않게 들어있다. 그 영상들은 어둡고 흔들리는 주민들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다.) 산을 온전히 지켜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안타까움, 너무나 두꺼운 현실이라는 벽에 고작 조약돌 하나 던진 것이라는 자조.

 

 

영화의 시선은 그렇게 사람들의 절망과 슬픔을 응시한다. 사람들은 있는 힘껏 저항했지만 실패했고, 지쳤고, 다쳤다. 그러나 절망에 대한 지긋한 응시에 따르는 것은 다시 모종의 희망이다. 그것은 마을사람들이 몸으로 부대끼며 포클레인을 막아 세우던 싸움에서 ‘냅둬유’라고 노래를 부르며 성미산과 그 산자락 사람들의 삶을 전달하는 방식의 저항으로 옮겨가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한 소절씩, 한 음정씩 짚어가며 인간적 삶에 대한, 뭇 생명들과 함께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그렇게 다른 세상과 더 나은 삶의 꿈을 조금씩 전염시켜 나가는 것. 그것이 영화와 성미산의 사람들이 다시 부여잡은 희망의 방식이다.

 

마을의 어른들은 성미산이 마을 아이들의 ‘고향’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누구나 마음 한켠에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그 곳, 고향.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들의 고향을 지키려 그토록 힘겹고 어려운 싸움에도 희망을 끈을 놓지 않고 싸웠다.

 

그 치열했던 싸움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고향은 허물어질지 모른다. 젖은 흙을 헤집고 나온 지렁이, 제 손으로 한 삽씩 정성스레 심은 아까시나무가 모두 콘크리트 덩어리 밑에 파묻힐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이들의 고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다. 아이들의 고향은 성미산이라는 공간 그 자체보다는 어쩌면 산의 품에서 자란 이만 가질 수 있는 너른 마음, 지고 또 져도 노래 부르고 웃으며 다시 희망을 움켜쥐는 삶에 대한 의지이며 그 마음을 지닌 이들과의 관계와 기억에 더 가까울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말미, 마을 사람들은 공사 중에 뽑혀버린 성미산 장승을 다시 세운다. 그 앞에서 너그러운 마음과 산의 품을 기원하며 춤추고 노래한다. 그렇게 다시 처음이다. 비록 산의 한 뭉텅이가 잘려나가더라도 다시 살아갈 희망을 부여잡은 그 춤과 노래. 그리하여 시간이 또 지나 언젠가는 더 이상 성미산이 꽃피는 산골이 아니게 되더라도

“나의 살던 고향은 춤추는 성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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