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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쓰는 민주주의
최병수 1987 이한열은 1987년 당시,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이었다. 6월 9일, 다음날 열릴 예정인 를 앞두고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후의 시위 도중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한 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7월 5일 스물 두 살의 나이에 사망했다. 6월의 그 뜨거웠던 거리는 그렇게 아름다웠던 두 청년의 죽음으로 달구어졌다. 만화사랑에서 만났던 이한열과 최민화 최민화는 1987년 3월 연세대 동아리 ‘만화사랑’의 연락을 받고 지도강사로 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와 같은 극화만화로 민중만화운동가로 잘 알려졌던 그는 라는 특강부터 시작하여 만화와 판화 실기에 이르기까지 그 해 봄 연세대를 드나들며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만화사랑’은 대학가에서 처음 만들어졌던 만화동아리로 ..
1997년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17세의 소녀가수 양파. 으로 혜성처럼 데뷔한 그녀는 또래답지 않은 가창력으로 주목받았고, 짧은 시간에 가요 시장을 석권했다. 비슷한 시기에 데뷔했던 고교생 가수 이지훈, 진주, 이동건보다 더 많은 인기를 누렸다. 음악프로그램에서 H.O.T나 S.E.S보다 더 많은 곡을 1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1990년대 후반 전형적인 아이돌 스타였던 셈이다. 모든 곡이 다 타이틀곡, 자작곡도 2곡 양파가 6년 동안의 공백을 깨고 지난달 5집 을 내고 팬들 곁으로 돌아왔다. ‘깔수록 새로운 것을 보여주겠다.’는 예명처럼 성숙한 여인의 모습으로. 다시 만난 양파의 모습에서 데뷔 초 앳된 소녀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동글동글했던 볼은 갸름해졌고, 덧니는 사라졌다. 천상 20대 요조..
목판화, 1984년 1989년 7월 평양에서 제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열렸다.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소속의 여대생 임수경의 방북으로 떠들썩했던 당시에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의 슬라이드가 북한으로 들어 간 것이다. 지금이야 그림 내용에 문제될 것이 없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사건의 중심에는 홍성담이 있었다. 광주 5·18 당시 시민군의 일원으로 금남로를 뛰어다녔고, 광주시내버스에 페인트로 일련번호를 매기며 5·18에 미술로 '복무'했던 화가이다. 공안당국의 요주의 인물이었던 그는 이제 반국가단체인 북한에 '이적표현물'을 제작 배포한 불순분자가 된 것이다. 5월의 아들, 홍성담 홍성담은 대학을 졸업하던 해(1977년) 결핵으로 무안 요양소에 들어갔다. 각..
언제부턴가 장진 감독은 ‘화해’를 말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의 옴니버스 프로젝트 중 장진 감독이 연출한 을 보자. 주인공은 고문하는 수사관과 고문당하는 학생. 그런데 이 수사관이 주말에도 일하면서 고용보장조차 안되는 비정규직이었다. 두 사람 사이엔 묘한 연대가 형성되고, 학생이 수사관에게 말한다. “곧 좋은 세상이 올 거예요.” 이번엔 아버지와 아들의 화해다. 신작 에서 강도살해죄로 무기 복역 중인 사내(차승원)는 단 하루의 휴가를 받아 아들(류덕환)과 만난다. 그 무엇도 기다릴 수 없는 처지인 무기수가 15년 만에 만난 아들과 함께 밤을 보내며 기다리기 싫은 아침을 기다리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 속엔 어느 전작들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가족, 친구, 동료들로 가득하다. 허위로 둘러싸인 세상..
만화로 운동의 길을 연 김봉준, 깡순이 이은홍의 국가보안법 구속 이은홍 중에서, 1986년 필자가 김혜린의 『북해의 별』에 빠져있었던 게 1983년의 일이다. 19세기 스칸디나비아의 가상 국가 ‘보드니아’에서 일어난 혁명과 그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그린 만화였다. 만화가 지닌 대중성과 선동성을 실제로 유감없이 보여준 사례다. 당시에 운동권 대학생들의 필수 독서목록에도 오른 유일한 대중 만화책이었다. 하지만 『북해의 별』은 여전히 만화였다.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팔등신 혁명가들은 여전히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귀족들이었고 사랑을 꿈꾸는 청춘들에게는 비극일 뿐이었다. 물론 당시 정황에 그 정도의 은유를 용납할 수 없다면 지나친 일이다. 『북해의 별』 정도에서도 새내기 대학생들은 충분히 시대의 냄새를 맡을 수 있..
신촌의 무서운 아이들, 대학로를 강타하다 중학교 시절 남산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영화배우 남궁원의 모습을 본 기주봉은 ‘막연하지만 배우가 되기’로 결심한다. 당시 그는 “조명이라는 걸 몰랐으니까. 사람 얼굴에 저렇게 빛이 나오는구나”라고 생각했다. 1976년 신촌을 거점으로 창단한 76극단을 통해 그는 연극계에 들어선다. 1977년 친형 기국서가 76극단에 합류했고 1978년 사무엘 베케트의 으로 첫 주연을 맡는다. 기주봉은 “모노드라마였는데 도무지 감이 잡히지도 않고 작품 자체가 분석이 안 되더라. 국문과를 다녔던 형을 찾아갔다. 욕 많이 먹었지. 그때 처음 연기라는 일이 ‘잘 노는 것만으로 안되는구나’ 싶었다. 그리고는 말수가 줄어들고 모든 고민이 시작됐다. 이를테면 내가 이렇게 키가 작아서 배우를 계..
20대 청춘의 미술대학생들로 이루어진 1969년 현실동인 전시는 불발에 그쳤다. 이후 11년이 지나 동숭동에서 오윤을 제외한 작가들은 모두 바뀌어 현실과 발언이라는 동인의 이름으로 전시를 하게 된다. 하지만 1980년 10월 17일 오후, 전시장(현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은 전시작품들의 불온성을 이유로 들어 뒤늦게 ‘전시불가’ 판정을 내리고 전시 개막일에 전시장의 전기 스위치를 모두 내려버렸다. 결국 참여 작가와 초대 손님들은 손에 촛불을 들고 작품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작품들은 이내 철거되고 만다. 1969년의 전이 전시 직전에 서울미술대학 교수들의 고발로 막을 올리지 조차 못했고, 1980년의 전은 막은 올렸지만 어둠 속에 간신히 그 존재만을 알리게 된 것이다. 11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밤은 ..
쉽게 말해 이렇다. 김현성(44) 씨는 몰라도 김현성 씨의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고 김광석 씨가 ‘다시 부르기’ 해서 이제는 국민가요 반열에 오른 , 2002월드컵의 국민가수 윤도현 씨가 부른 는 대중음악의 클래식이 되었다. 그리고 김광석, 윤도현이라는 가수의 이름 뒤에는 김현성이라는 작곡가가 있다. 거리에서 노래방에서 끊임없이 ‘다시 부르기’ 되는 두 노래는 모두 김현성 씨가 작사, 작곡한 노래다. 김광석, 윤도현 그들의 시작에 어쨌든 1980~90년대의 노래운동이 있었으니, 그 시절의 민중가요는 국민가요와 국민가수로 그렇게 남았다. 와 김현성 씨는 작사, 작곡가일 뿐 아니라 가수다. 영어로 ‘싱어 송 라이터’라고 부르는 아티스트다. , 는 김현성의 목소리로도 음반에 담겼다. 자, 이쯤 되면 ..
1985년 당시 이원홍 문화공보부장관의 불순한 문화예술 경향을 경계해야 한다는 7월 20일 경주발언 직후 종로 경찰서는 아랍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전 전시장에 난입하여 36점의 작품을 강제 철거하고 이에 항의하는 작가 19명을 연행했다. 5명의 작가를 입건한 후 의외로 이 문제가 확대되어 공안당국은 여론의 비판을 받게 된다. 이 사태 이후 미술가들은 미술운동을 위한 미술가 대중조직의 필요성을 논의하면서 1985년 11월 22일 ‘민족미술협의회’(이하 민미협)를 발족시킨다. 전승보 전도 2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당시 이 전시를 주도적으로 기획했던 분들은 이제 모두 50대의 중견작가입니다. 살펴보면 전 사건을 계기로 민미협이라는 진보적 미술인 조직이 만들어졌으며, 또한 일반인들에게 민중미술의 존재를 알..
태권소년, 스턴트맨의 길에 들어서다. 자동차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오토바이. 허공으로 떠 오른 오토바이는 지하주차장 천정에 그대로 쳐 박힌다. “이젠 끝이다 쇠고랑 차겠구나” 하고 머리를 쥐어뜯는 의 제작자 차승재. 하지만 죽은 줄 알았던 오토바이를 몰던 사내는 며칠 후 다시 쌩쌩한 얼굴로 현장에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정두홍. , , , , , , , , 의 화려한 액션 시퀀스를 연출한 무술감독 정두홍이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영화에서 스턴트맨은 ‘으악새 또는 몽둥이를 든 백정’에 불과했다. “누가 스턴트맨한테 보험을 가입시켜줘?” 오랜만에 만난 국가대표 무술감독 정두홍(40)의 첫마디다. 스크린에서 불구덩이에 몸을 던지거나 툭하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스턴트맨들의 실제 삶은 영화만큼 위험하고 힘겹다. 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