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민주화운동기념관 (41)
함께쓰는 민주주의
영광과 상처가 공존하는 곳, 앵발리드와 군사박물관 박신의 경희대 경영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질문 프랑스 파리에 소재한 군사박물관(Musee de l'Armee)은 일반적으로 앵발리드(Invalide)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앵발리드 내에 군사박물관이 있는 셈이다. 군사박물관은 군대와 전쟁에 관련한 컬렉션과 자료들을 모아 근대에 들어서 기반시설로 만들어낸 것이고, 앵발리드는 루이 14세 이래 군사기관의 형태로 이어져 온 장소인 것이다. 따라서 박물관 자리는 바로 군사문화와 역사가 남아있는 장소로 지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기념관이 위치하는 데는 역사적 장소(site)를 입지조건으로 한다는 원칙이 여기서 다시 한번 확인된다. 게다가 나폴레옹이 나왔다는 군사학..
슬픈 현대사를 담고 있는 타이페이 2·28기념관 박강배 (사)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연구실장 타이완 현대사의 슬픔은 1895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시작된다. 청나라가 일본에 넘어간 뒤 타이완은 청의 식민지가 되었고 1945년 해방 후에도 독립은 이뤄지지 않았다. 또 이후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패배하여 타이완으로 옮겨온 국민당 정부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일제 50년 식민통치 동안 타이완은 작은 일본으로 살았고, 해방 직후부터 국민당 통치기간 50년은 북벌통일론에 숨죽이고 살아야 했다. ‘타이완의 독립이냐 통일이냐’,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은 대륙의 중국 정부와 타이완 정부, 그리고 타이완 사람들 사이에서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래서 얻어진 ‘차이나 타이페이’라는 국제적 부호에는 타이완의 슬픈 역사가 담겨있..
되돌아 반성케 하고 힘을 주는 남경대학살기념관 박강배 (재)5·18기념재단 사업부장 1946년 5월, 도교, 극동국제군사법정, 제2차 세계대전 전범재판소에 증인으로 출석한 미국인 존 그레스피 머기 목사가 일본군들이 중국 평민들을 대상으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증언하고 있다. 이 재판은 적어도 20만 명 이상의 무고한 사람들이 살해되었음을 밝히었고 남경학살 직접 책임자 마츠이 세네키등 전범들을 교수형에 처했다. 남경대학살 사건은 1937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6주 동안 일본군들이 남경에서 중국인을 비열하고 잔인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으나 학살당한 숫자는 약 3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집단총살, 일본도(刀)로 목베기, 총검으로 찔러 죽이기, 불태워 죽이기, 집단 생매장,..
군의 논리와 민의 논리 일본의 전쟁기념관과 평화기념관 조성윤 제주대 사회학 교수 한국과는 달리 일본에는 엄청나게 많은 기념관이 있다. 따라서 그 기념관들을 모두 둘러보는 것은 불가능하며, 여러 곳을 자세히 살펴본 사람도 많지 않다. 필자도 단지 몇 군데 밖에 보지 못했다. 따라서 이 소개는 매우 제한적인 부분에 머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기념관들이 과연 어떤 목적에서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으며, 일반 대중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동시에 무엇을 기념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 초점은 각 나라의 역사적 경험에 따라 다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회 내의 어떤 세력이 어떤 방향으로 역사적 기억의 방향을 이끌고 가고 하는가에 따라서도 크게 달라진다. 일본의 기념관 중에서 우..
민주화운동기념관과 ‘희망세상’ 국내의 기념관 연재를 정리하며 정호기 한국현대사회연구소 연구원 한국에서 근대적 ‘기념관’이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다. 일제하에서는 ‘식민지 내외에 식민통치가 낳은 발전상을 기념하고 증명해 보이기 위해’ 공진회와 박람회가 개최되었고,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역사적 인물들 혹은 사건들을 기념하기 위한 건물들이 간혹 만들어졌으나, 본 연재에서 고찰했던 정도의 규모를 갖춘 기념관은 아니었다. 국가적 차원에서 역사적 사건의 기념관을 대규모로 건립하려는 계획이 수립된 것은 독립기념관과 전쟁기념관 등에서 살펴보았듯이 1960년대부터였다. 그러나 이 계획들은 1980년대에 현실화되었다. 한국의 현대사에 핵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해방’과 ‘전쟁’을 주제로 하고..
기념공간의 전형 ‘독립기념관’ 현재의 ‘독립’에 응답하고 있는가· 정호기 한국현대사회연구소 연구원 필자가 다녔던 초등학교 교정에는 탑신까지 포함하여 1.5m 남짓한 ‘해방탑’이 있다. 이 탑은 50년 이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 한 눈에 세월의 풍상을 느끼게 해준다. 초등할교 때는 물론이요. 대학 재학 중에도 인지하지 못했던 이 탑이 눈에 띈 것은 불과 몇 년 전이었다. 이 탑이 세워진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일제하 교육이 이루어지던 장면을 담은 사진들을 본 적이 있어서 그런지, 이 곳에 탑을 세웠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비록 이 탑은 조그맣지만,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만끽하던 어느 농촌에서의 기념 행위와 방식을 보여주며 당시의 기억을 회상하는데 필수적인 해개체이다. 지금도 매년 8월 15일이면, 이 초등학..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을 품은 보수산 - 부산민주공원과 민주항쟁기념관 - 정호기 한국현대사회연구소 연구원 부마민주항쟁은 한국의 민주화운동사에서 박정희 정권 집권기의 마지막 민중항쟁이라고 할 수 있다. 1979년 10월 16~17일 부산에서, 그리고 18~19일 마산에서 전개되었던 이 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몰락에 직접적 인과성을 갖지는 않지만 당시 시민들이 가장 많이 외쳤던 ‘유신 철폐’, ‘독재 타도’라는 구호에서 알 수 있듯이 유신정권의 폭압을 규탄하는 항거였고, 10·26사건이 발발하게 된 하나의 계기였다. 이러한 역사적 의의완 국가에 의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부마민주항쟁’ 또는 ‘부마 항쟁’ 보다 ‘부마사태’라는 명칭이 여전히 더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국가나 지배집단이..
분단 반세기! 한국전쟁의 기념관 -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전시관과 용산의 전쟁기념관 - 정호기 한구현대사회연구소 연구원 프랑스를 대표하는 그림책 작가인 페프가 제1차 세계대전을 주제로 다룬「어느 날 밤, 전쟁기념탑에서......」라는 책의 일부가 2002년에 번역 후 출판되었다. 이 책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전쟁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어른들을 준엄하게 꾸짖고 있다. 이책의 주인공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조국을 위해 조국 땡 곳곳에서 목숨을 바친” 병사들이다. 이들은 전쟁기념탑에서 빠져나와 ‘그들이 치렀던 전쟁이 과연 가치 있는 일이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아마도 이러한 의문은 전쟁이 계속되는 한, 그리고 전쟁에서 희생자가 발생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현재도 이라크를 비롯하..
한국 사회운동의 전환점 ‘5·18’과 기념관 없는 ‘5·18’ 기념사업 -국립 5·18묘지,5·18기념공원,5·18자유공원, 그리고 전남도청 일대의 기념사업- 정호기(한국현대사회연구소 연구원) 광주민중항쟁(이하 ‘5·18’)은 1980년대 한국 사회운동의 출발점이며, 변혁을 지향하는 사회운동의 인식의 전환점이었다. 그리고 ‘5·18’은 지방도시인 광주에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대표하는 도시라는 상징성을 부여했다. 이는 1980년 5월의 비극적사건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꾸준히 기억투쟁을 전개한 결과이기도 하다. 즉 ‘5·18’에는 다른 민주화운동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치열한 기억투쟁인 ‘5월투쟁’ 혹은 ‘5월운동’이 있었다. 5월운동은 국가를 상대로 하는 비체계적인 인정투쟁으로 시작해서, 점차 ‘5..
한국전쟁 이후 사회운동의 서막을 연 4월혁명과 기념공간 - 국립4·19묘지, 4·19혁명 기념관 그리고 기념도서관 - 정 호 기(한국현대사회연구소 연구원) 2003년은 4·19혁명이 일어난 지 43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에 의해 ‘의거’로 격하되었던 ‘4·19’가 ‘혁명’이라는 명칭을 갖게 된지 정확히 10년이 되는 해이다. 이러한 명칭의 변화가 우리에게 어떤 실천적 의미를 갖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말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혁명’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부터 국가적 차원의 대우가 달라졌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흐를수록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4·19혁명에 대한 기억이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다. 1960년 사건이 발발한 이후, 4월혁명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