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문화 속 시대 읽기/노래는 멀리멀리 (20)
함께쓰는 민주주의
[노래는 멀리 멀리] 글 | 이은진/ 신나는 문화학교 대표 87년 6월민주항쟁은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들끓기 시작한 각계각층의 함성이, 경찰의 살인적인 폭력에 쓰러져간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폭발하면서 엄청난 힘을 표출해 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 열사의 죽음이 기폭제가 되긴 했어도 70년대부터 꾸준히 성장하고 준비되었던 민중운동과 폭압적인 탄압에 억눌려 왔던 민중들의 분노가 이를 계기로 터져 나온 것일 겁니다. 87년 6월 시민항쟁과 7,8,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5공화국은 종말을 맞이하고, 87, 88년부터 시작하여 90, 91년에 마무리되는 이 시기에 민중가요는 두 개의 대중화를 실현합니다. 그 하나는 대학생, 지식인을 중심으로 하던 민중가요가 노동자 대중을..
노동자 노래의 시작을 알린 글 이은진/ 신나는 문화학교 대표 지금은 써먹을 기회가 그리 많지 않지만, 한때 ‘걸어 다니는 노래책’이라는 별명을 달고 살았던 저는, 얼마 전에도 한 수련회에서 밤새 노래가사를 불러줘야 했습니다. 술이 얼큰하게 취한 40대들은 7080의 노래들과 민중가요를 부르고 싶어 했고, 현실을 살아낸 시간만큼 기억이 흐릿해져버려 가사가 생각나지 않아 답답해하는 이들에게 노래방 기계대신 노래가사를 불러주는 일은 투덜거리면서도 즐거운 일입니다. 누구나 그런 시간이 되면 다시 불러보고 싶은 노래가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격동적인 한국현대사의 한복판을 살아낸 이들에게 노래는 무슨 역할을 했고, 개인의 삶에 어떻게 스며들어있을까요? 그 시절을 생각하면 가사를 다 읊조리진 못하더라도 노래..
노동자들의 연이은 분신을 바라보는 마음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다. 사회적 약자가 단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던져야만 겨우 사회에서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는 세상이라는 점을 너무도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1970,80년대에는 폭압적 정치체제가 그 목소리를 막고 있어서 그랬다고 치자. 지금은 뭔가. 그들의 절규를 외면하도록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인가. 죽음이란 사회나 역사 같은 사회과학적 용어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느낌을 담은 단어이다. 내 존재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을 볼 수도 만질 수도 기억할 수도 없고, 세상 사람들과 말하고 웃지 못한다. 내가 사라진 후의 세상에서 사건이 일어나고 역사가 진전한들 그게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아니, 내 존재가..
전태일의 분신은 1970년대가 어떤 시대일 것인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드라이브에 휘말려 무작정 상경했던 이농민들은 대도시의 노동자가 되었고, 1970년대는 이제 우리나라도 본격적으로 노동문제가 커다란 사회문제가 될 것이라는 점을 알려주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있기 이전 민중가요의 태반은 대학생층의 것이었다. 노동자들이 노래문화를 가꿀 문화적 역량이 없어서가 아니라, 민주적인 노동조합이 자리 잡지 못한 상태에서 이런 노래를 만들고 부를 만한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대학은 어떤 노래를 불러도 크게 위험하지 않은 일종의 해방구였다. 노동현장의 민중가요는, 민주노조의 역량이 갖추어지고 집단력과 투쟁의지가 높은 곳에서부터 만들어..
박정희의 노래들, 과 10월 유신이 벌써 31년 전의 일이지만 내 세대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일 것이다. 1973년에 중학교에 들어가서 1979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6년 동안 오직 유신헌법만 배웠고, 체력장의 던지기 종목을 공이 아니라 모조리 수류탄으로 사용했으며, 여학생에게도 사격을 권장한다는 정책에 따라 칼빈 소총으로 사격을 배웠던 세대였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노래는 , , , 같은 것들이다. 그 중 앞의 두 곡은 박정희가 직접 작사․작곡한 노래로 거의 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았다.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하면 먼저 가 나오고, 과 가 뒤이어 나오고 나서야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노래의 중요성을 잘 알았던 박정희 박정희야말로 우리나라 대통령 중 노래의 중요성을 매우 잘 알고 있으며, 그것을 ..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란, 어느 시대 어느 노래에서나 단골 메뉴이다. 민중가요도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노래는 추석이나 설날 같은 명절 때 더욱 사무친다. 가난 때문에 고향을 등져 도시로 올라온 노동자들이, 명절 전날 선물 보따리를 들고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하는 모습, 그나마 고향에 가지 못하고 잔업을 하는 그 모습, 이것이 우리 노동자들의 명절 풍경이다. 1980년대 초반 돌 작사․작곡의 는 추석 휴가 직전의 들뜬 느낌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내일이면 집으로 간다 오늘만 넘기면 집으로 간다’로 시작하는 첫 구절은, 단지 고향에 대한 그리움만 드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왜 하필 제목이 ‘오늘만 넘기면’이겠는가. 고향집은, 서울에서의 힘든 노동이 존재하지 않는 곳, 그 고통스러운 삶으로 빠져들기 이..
남북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은, 많은 노래를 남기기도 했지만 또 많은 노래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어떤 노래는 남쪽에만 남고 또 어떤 노래는 북쪽에만 남았으며, 또 어떤 노래는 남과 북 어느 쪽에서도 불려지지 못한 채 오랫동안 파묻혀 있거나 사라졌다. 은 남과 북 어느 쪽에서도 공개적으로 불려지지 못한 노래이다. 이 난에서 여태까지 소개한 노래는 주로 197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 속에서 불려졌던 노래인데, 은 거기에서도 소외되어 있던 노래였다. 남과 북에서 공개적으로 불려지지 못해 이 노래를 기억하고 불러온 사람들은 1960,70년대 학생운동 출신자가 아닌, 전라남도 출신의 지식인들이었다. 빨치산들이 불렀던 노래였던 까닭에 학생운동권에 마음 놓고 유포할 수 없었던 노래였고, 또 선율이나 가사에서 독특한 사회..
대중가요권에서도 히트를 예측하기 쉽지 않은 것처럼, 민중가요권에서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히트곡이 나온다. 1987년 7․8․9노동자대투쟁 때 갑자기 부상한 인기곡 도 그러하다. 지난 달 6월시민항쟁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갑작스럽게 벌어진 새로운 상황은 새로운 노래를 필요로 했지만, 창작자들이 그렇게 빠르게 새로운 경향의 노래를 창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노동자대투쟁이라는 경험이 노래화되어 신작(新作)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88년 가을 와 부터였으니, 결국 1987년 여름부터 무려 1년 동안이나 노래의 수요공급이 불균형 상태를 이루었던 셈이다. 수요는 있는데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는 그 상황에서, 그 이전의 노래 몇 곡이 새롭게 조명되어 인기곡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 를 로 개사한 ..
과 이영미 벌써 6월항쟁이 16년 전 일이 되었다. 넥타이부대와 함께 한 6월항쟁의 한복판에서는 무슨 노래를 불렀을까? 잘 생각이 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런 큰 사건들은 늘 예상치 않게 터져 나오기 때문에 그 상황에 꼭 맞는 새 노래가 나올 수가 없다. 새로운 노래를 창작자들이 준비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뿐더러, 설사 새 노래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 새 노래가 갑작스레 모인 수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불려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6월항쟁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학생들은 그냥 이었고 시민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이나 정도였던 것 같다. 이나 두 곡 모두 축축 처지는 노래여서 함께 부를 만한 힘찬 행진곡 한 편이 없다는 것이 매우 아쉽게 느껴지곤 했다. 사실 그 시기에 시민과 함께 할 가능성이 ..
촛불시위, 반전평화운동 그리고 반전반핵가 이영미 지난 겨울 촛불시위부터 시작하여 이라크전쟁 반대의 반전평화운동에 이르기까지, 우리 국민들이 보여준 반미 열기는 놀라울 정도이다. 불과 20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반미’란 매우 낯설고 섬뜩한 구호로 여겨졌다. 공산군을 막아준 미국을 반대하는 것은 곧 용공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졌고, 실제로 반미적 색채의 단편 를 쓴 작가 남정현이 반공법으로 처벌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반미란 단어 자체는 우리에게 그다지 좋은 어감을 주지는 못한다. 촛불시위의 수많은 대중들은 실제로 반미를 외치고 있으면서도(그 반미의 수준이 ‘미국은 사고에 대해 공정하게 처리하라’ 정도에서부터 ‘미군 철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할지라도 어쨌든 반미는 반미였다), 언론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