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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죄절된 레포르마시와 공고한 반 민주주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12. 26. 16:31


1998년 9월 2일 저녁, 말레이시아 정가는 의심할 여지없이 다음날 말레이시아의 모든 신문 1면을 장식하게 될 큰 사건으로 인해 온통 벌집을 쑤셔놓은 듯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신문을 펴든 말레이시아 국민들은 이 충격적인 소식으로 인해 한동안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9월 2일 저녁 말레이시아 총리 마하티르 모하마드(Mahathir Mohamad)는 후계자로 지목했던 부총리이자 재무장관인 안와르 이브라힘(Anwar Ibrahim)을 전격 해임했다.
경제위기 이후 정책노선을 놓고 이 둘 사이에 마찰이 있기는 했지만 그 누구도 안와르가 이렇게 해임 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해임이 말레이시아에 있었던 그 어떤 민주화운동보다 크고 강력한 민주화 운동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1998~99년의 말레이시아 : 레포르마시의 부침
안와르는 해임 후 곧 성명을 발표하여 자신의 해임이 정치적 음모의 결과라고 주장하며 해임의 부당성을 밝혀내겠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응하여 마하티르와 정부 그리고 말레이시아의 집권당이자 마하티르와 안와르가 속한 통일말레이국민조직(United Malays National Organization)은 안와르의 권력남용 그리고 동성애 혐의를 주장하며 그의 도덕적 흠결 때문에 취해진 정당한 조치라고 해임을 합리화 했다. 안와르는 신속하게 대중 집회를 조직하여 자신의 해임 부당성을 알리며 점차 정치개혁, 민주화, 정부의 투명성과 책임성 요구, 경제개혁으로 자신의 주장을 확대해 나갔다.
정부가 9월 20일 국내보안법(Internal Security Act)으로 안와르를 체포하여 구금하기까지 전국에서 안와르를 지지하는 수천에서 수만 명이 운집한 정치집회와 시위들이 순식간에 말레이시아를 정치위기로 몰아넣었다. 여기에 참석한 사람들은 안와르처럼 정치개혁, 민주화, 경제개혁을 주장하며 1981년부터 당시까지 거의 20년을 집권해 온 마하티르의 사임을 요구했고, 레포르마시(Reformasi : Reform)라 불린 이 시위의 불길은 안와르가 체포된 9월 20일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레포르마시가 확산되면서 야당인 범말레이시아 이슬람당(Pan-Malaysian Islamic Party), 민주행동당(Democratic Action Party), 말레이시아민중당(Malaysian People’s Party) 등의 정당들 그리고 말레이시아 이슬람청년단(ABIM : Angkatan Belia Islam Malaysia), 알리란(Aliran) 등의 NGO들이 여기에 가담했고, 1999년 4월에는 안와르의 지지자들이 국민정의당(National Justice Party)을 창당했다.
마하티르가 이끄는 말레이시아 정부 그리고 그의
통일말레이국민조직과 통일말레이국민조직이 중심이 된 집권연합인 국민전선(National Front)은 이런 개혁과 민주화의 요구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억압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레포르마시 세력을 분열시키는 수사들을 동원하여 탄압했다.
독립이후 가장 큰 규모의 자발적 시위에 놀란 정부는 무장경찰로 시위를 진압하면서 수백, 수천 명의 레포르마시 지지자들과 집회 참여자들을 체포하는 한편, 레포르마시를 지지하는 공무원들을 색출, 해임하고 시위에 참여한 대학생들을 징계하는 등 억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레포르마시의 목을 조였다. 또한 레포르마시 운동 세력 내부의 분열을 조장하는 선전을 통해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정부는 레포르마시의 지도부가 서방국가와 조지 소로스(George Soros) 등 서구 거대자본들로부터 지원을 받고 그 대신에 표면상 서구식 민주주의와 인권을 주장하며 말레이시아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꾀하고 있다고 비방했다. 다른 한편으로 역사상 처음으로 말레이인과 비말레이인이 함께 동참한 이 자발적인 운동을 분열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화교와 말레이인 사이의 갈등을 조장했다. 특히, 정부여당은 이슬람국가를 목표로 하고 있는 범말레이시아 이슬람당과 힘을 합친 민주행동당을 향해서 권력을 잡기 위해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과 협력한다고 비난하는 한편, 범말레이시아 이슬람당에 대해서는 역시 권력을 잡기 위해 말레이인의 이익을 저버리고 화교 국수주의자인 민주행동당과 협력한다는 비난을 했다.
 

이런 정부의 탄압에도 레포르마시 운동은 그 추진력을 계속 유지했고, 1999년 중반에는 국민정의당, 범말레이시아 이슬람당, 민주행동당, 그리고 말레이시아 민중당이 야당연합인 ‘대안전선(Alternative Front)’을 출범시켰다. 이 야당연합은 1999년 말로 예정된 선거에서 통일말레이국민조직을 중심으로 40년 넘게 집권해 온 현 집권연합을 대체하여 수권이 가능한 대안을 창출하려 노력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집권하면 안와르를 총리로 내세우고 광범위한 사회, 정치, 경제적 개혁과 민주주의의 실행을 약속했다.
레포르마시 운동의 힘을 입어 고무된 야당연합과 1981년 총리가 된 후 가장 큰 정치적 위기를 맞은 마하티르가 이끄는 여당연합의 한판 선거대결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선거 직전 야당연합은 여당연합의 3분의 2 의석 확보를 저지하는 것을 최소 목표로 정하고 내심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여 집권까지 내다보고 있었다. 이를 뒷받침이나 하듯 외신을 비롯한 언론들은 말레이시아 역사상 최초로 정권교체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쏟아냈다.


선거결과는 표면적으로 보자면 야당의 패배였다. 야당연합은 193석의 연방의회 의석 중 45석을 얻는데 그쳐 국민전선의 3분의 2 의석 확보를 저지하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야당의 하나인 범말레이시아 이슬람당이 레포르마시의 기운에 힘입어 의석을 27석까지 늘리고 두 개의 주 의회선거에서 승리했다. 다른 야당들도
의석수는 많지 않았지만 많은 선거구에서 이전에 여당 후보가 누렸던 엄청난 표차를 상당히 따라잡았다. 선거구 획정과 선거제도(소선거구제)의 불리함이 없었다면 거의 과반수에 육박하는 의석을 장악할 수도 있었던 선거였다.
그러나 1999년 선거에서 최고조에 달했던 야당연합의 공조와 이를 뒷받침하는 레포르마시 운동의 응집력은 선거 후 정부의 탄이라는 외적요인과 야당연합과 레포르마시 운동의 내적인 요인에 의해서 급격히 약화됐다. 레포르마시의 상징인 안와르는 1999년 4월 부패혐의에 대해서 6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고 있는 중 점점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져갔다. 야당연합은 레포르마시의 기운을 계속 이어나가지 못했다.

선거 이후 시위와 집회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산발적인 시위와 집회를 조직적인 운동으로 엮어 나가야 할 야당들은 마하티르의 분열 전략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어렵사리 조직한 집회들은 경찰의 강경한 대응으로 무산되기 일쑤였고, 국민정의당의 핵심 간부들은 국내보안법에 의해서 검거되었다. 특히 9·11 테러 이후 범말레이시아 이슬람당은 정부로부터 급진 이슬람단체라는 낙인이 찍혔고, 이 와중에 민주행동당은 화교 지지층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야당연합에서 탈퇴했다. 경제위기의 여파가 어느 정도 가시고 국내경기가 활성화되기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이 레포르마시 보다는 경기 회복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 2003년 말 마하티르가 은퇴하고 그의 후계자인 압둘라 아흐마드 바다위(Abdullah Ahmad Badawi)가 새로 총리에 취임하면서 정부여당은 분위기를 일신하는 효과도 누렸다.
압둘라 바다위가 총리로 취임한 뒤 처음으로 실시된 선거에서 국민전선은 역사상 최고의 지지를 받으며 다시 집권에 성공했다.
물론 1998~99년 동안 몰아쳤던 레포르마시라는 민주화 운동의 실패를 설명하는데 야당의 취약성, 여당연합의 효과적인 분열전략, 뜻하지 않은 국제정치적 요소, 그리고 경제위기의 극복과 새로운 총리 취임 등의 다양한 원인들이 동원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요소들 보다 그렇게 강력하게 몰아쳤던 열풍이 2~3년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라진 데는 무엇인가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는 듯하다.
필자는 이것을 집권세력이 조작하여 말레이시아인들에게 주입해 온 공포심 내지는 두려움이라고 본다. 이 공포 정치, 두려움의 정치가 말레이시아 정치의 현 주소, 즉 낮은 억압 수준에도 전반적으로 권위주의 정치인 현 상황으로부터 민주주의로의 이행 요구가 강력하게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사실과 같은 집권세력이 지난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선거에서 지지를 받으며 계속 집권하고 있는 ‘반 민주주의(semi-democracy)’, ‘민주주의도 권위주의도 아닌 정치’ 또는 ‘유사민주주의(pseudo-democracy)’ 상황을 설명할 수 있다.

 

말레이시아의 반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공포 정치
말레이시아의 반 민주주의 집권세력이 공포 정치에 이용하는 첫 번째 도구는 말레이시아의 종족문제이다. 말레이시아는 인구의 약 60%인 말레이(Malay), 약 25%인 화교, 10% 미만인 인도인 그리고 기타 소수종족으로 이루어진 국가다. 다수 종족으로 이루어진 많은 나라들이 그러하듯 종족간의 경쟁 또는 갈등은 말레이시아 정치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변수다. 이미 1969년에 있었던 종족폭동과 같은 경험도 있거니와 항상 말레이와 비말레이 사이에는 한정된 자원의 배분을 둘러싼 갈등이 존재하며, 통일말레이국민조직의 엘리트를 비롯한 정치엘리트들은 이 종족 간 갈등 내지는 경쟁을 조작하여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고 정치적 지지를 동원한다. 정치적으로는 두말할 나위 없이 지배적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말레이인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강력하지만, 그에 걸맞는 정치권력을 향유하지 못하고 국가에 의해 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비말레이인의 갈등은 정치엘리트들에 의해서 종종 과장된다. 타종족이 경제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완전한 지배를 하게 되면 자신들은 말레이시아에서 2등 국민으로 전락하거나 말레이시아에 설 자리가 없다는 음울한 전망을 그대로 믿게 하는 것이다.

 
특히 말레이들은 말레이가 주도하는 통일말레이국민조직이 정권을 잡지 못하면 경제력도 없는 상황에서 정치권력마저 내주게 된다고 끊임없이 정치지도자들로부터 경고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는 정당한 정치적 비판, 정치적 대안의 모색 등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해버리고 선거에서 통일말레이국민조직이 주도하는 정부여당에 대한 무조건적인 강력한 지지를 낳아왔다.
또 다른 하나의 도구는 반 서구주의, 반 식민주의다. 특히 제4대 총리인 마하티르는 이 전략을 매우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반 서구주의나 반 식민주의 그 자체로는 물론 정치적 비판이나 순응을 모두 가져올 수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이 반 서구주의, 반 식민주의 논리는 잠재적인 외부의 강력한 적에 대한 두려움과 적개심을 적절히 조장하여 내적으로 국민들을 결속시키고, 그 결속을 그대로 정치적 지지로 이끌어내는 기능을 한다.

특히 1997~98년 아시아를 휩쓴 경제위기 당시 마하티르는 이런 반 서구 독설로 인해서 세계 언론의 조명을 받았었다. 그의 논리는 간단했다. 그는 기독교도가 중심이 된 서구는 말레이시아처럼 무슬림이 중심이 된 새로 발전하는 국가들이 자신들과 경쟁하는 것을 싫어하며, 특히 한때 말레이시아를 지배했던 식민지배 국가들은 자신들의 식민지가 경제적으로 성장하여 자신들과 경쟁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1998년 경제위기의 뒤에는 아시아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서구국가들이 경제적 재식민지화를 꾀하려는 조직적인 음모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유사한 논리로 말레이시아의 인권, 민주주의 문제에 관한 비판 역시 서구국가들이 정당하게 선거를 통해 선출된 말레이시아 정부를 흔들고 종국에는 친서구적인 정권을 세우기 위한 공격이라고 선전했다. 언뜻 보기에 전혀 근거없는 음모론처럼 들리는 이런 논리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대결이라는 종교적인 색채에 경제위기로 인한 충격이 가미되어 정부의 경제정책 실수, 정책의 불투명성, 정책결정의 비민주성을 가리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또 인권문제를 염려하고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정부에 비판적인 세력들은 서구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세력으로 매도되었고 그 반대급부로 정부에 대한 지지가 일시적으로 상승하기도 했다.

 

포스트-마하티르 시대와 말레이시아의 민주주의
다시 말레이시아의 현 정치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2003년 11월, 22년 동안 총리를 했던 마하티르가 퇴임을 하고 그가 지명한 후계자인 압둘라 아흐마드 바다위가 그 뒤를 이어 제5대 총리에 취임했다. 이 포스트 마하티르(post-Mahathir) 시대에 말레이시아의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질문은 레포르마시의 광범위한 정치·경제 개혁과 민주화 주장을 22년만의 새 총리인 압둘라 바다위가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것이다.



압둘라 바다위가 총리에 취임한 이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몇 건의 고위층이 관련된 부정부패 사건들이다. 그가 집권한 지난 2년 동안 연방정부의 장관, 주지사, 통일말레이국민조직 고위인사들이 연루된 부정부패 내지는 돈정치 사건이 폭로되었고, 이들이 해임되고 사법처리 되고 있는 중이다. 분명 이런 것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다. 이런 변화들은 권력 내지는 정부의 책임성(accountability) 또는 투명성(transparency) 이라는 측면에서는 분명 일보 진전한 면이 있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현 집권세력의 정치적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한 전술적인 측면에서 나온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정부의 책임성과 투명성을 제고하여 지지를 얻겠다는 의도를 넘어서 말레이시아 국민들의 정신을 옭아매고 있는 공포 정치를 조장하는 담론이나 시민의 정치적 자유를 저해하는 국내보안법을 비롯한 억압적 장치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1999년의 레포르마시에도 불구하고 말레이시아 정치는 여전히 민주화로 가는 길에 있지 않고 오히려 현 반 민주주의적 집권세력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작은 부분의 개혁만 필요에 따라서 이루어지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레이시아의 반 민주주의적 집권세력은 여전히 건재하며 작은 요구를 수용하여 더 큰 불만을 해결 하는 유연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에 비해서 1998~ 99년을 뜨겁게 달구었던 레포르마시의 열기는 지금 거의 사라지고 없으며, 야당 세력들은 다시 이전처럼 분열되어 있고, NGO들은 아직 활성화 되지 않았고, 시민사회는 여전히 두려움의 정치에 지배당하고 있다. 낮은 억압으로도 비 민주적인 정치를 계속 유지해 온 현 집권연합의 지배는 가까운 장래에 큰 변화를 겪을 것 같지는 않다.


<이재현>
한국동남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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