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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과 부패를 넘어 매혹의 섬, 스리랑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12. 26. 16:28


6월 24일 스리랑카 정부와 타밀 타이거(LTTE)가 ‘쯔나미 협력체계(A Post-Tsunami Operational Mannagement Structure, 협력체계)’에 드디어 사인했다. 2002년 2월 22일, 휴전협정을 성공적으로 성사시킨 이래 평화협상 중재 역할을 계속해왔던 노르웨이 팀이 이 안을 제안한 지 거의 반년만이다. 집권연정인 ‘인민자유동맹(UPFA)’ 내에서 각각 제1, 2당인 ‘스리랑카 자유당(SLFP)’과 ‘인민해방전선(JVP)’이 협력체계에 대한 이견으로 불안한 동거의 끝을 향해 가는 동안 사인을 기다리다 못한 타밀 타이거는 “협력체계에 사인이 이루어진다 해도 제대로 수행이 되겠는가.” 하는 의구심을 드러냈었다.
협력체계를 두고 아슬아슬했던 6개월은 협정 조인이 이루어지던 날 노골적으로 투영되었다. 6월 16일, 집권연정을 떠나겠다고 공식 선언한 인민해방전선은 이미 강경파 승려들과 함께 협력체계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여왔고, 24일 아침에는 수도 콜롬보의 의사당 주변에 헬기까지 동원된 삼엄한 경계가 펼쳐졌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이날 시위대의 일부는 의사당 내로 진입하기도 했다. 의사당 안에서는 휴회가 선언되었고 이후 몇 분 동안 진행된 의원들의 찬성 서명에 이어 재건복구장관 자야싱헤(M.S. Jayasinghe)가 정부를 대신하여 협정문에 최종 사인했다.

쯔나미 협력체계
이 ‘종이’는 스리랑카 주재 노르웨이 대사인 한스 브라츠카르(Hans Bratskar)의 헬리콥터로, 헬리콥터는 다시 타밀 타이거 본부가 있는 북부 킬리노치로 향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내전 재발과 평화협상 재개라는 갈림길의 변수로 인식되던 협력체계가 이렇게 극적으로나마 조인됨으로써 스리랑카 국내외에는 일단 안도의 한숨이 돌았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도 잠시, 스리랑카는 현재 대통령 선거 시기를 둘러싼 정치권의 갈등과 국민들의 분노로 시국불안이 고조되고 있다. 게다가 타밀 타이거의 동부 정치서기 카우살렌이 살해된 2월 이래 동부지역에서는 폭력사태가 끊이질 않고 있다. 6월 26일에는 북부 킬리노치에서 동부 바띠깔로아로 이동하는 타이거들을 겨냥하여 지뢰폭발사고가 발생했고 그 두어 달 전인 4월 28일에는 저명한 타밀 저널리스트 시바람(D. Sivaram)이 납치, 다음날 살해된 채 발견되기도 했다.

급기야 타밀 타이거는 ‘타이거들의 안전이동’ 보장을 요구하며 ‘7월 14일 데드라인’을 던졌다. 그러나 7월 10일, 보란 듯이 타이거의 한 중령과 소위 그리고 두 명의 타밀 민간인이 동부 트링코 말리에서 괴한의 총격을 받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 후 타이거는 동부지역 내 타이거들의 모든 정치활동을 중단시켰다.
13일과 14일에는 트링코 말리에서 스리랑카 군대와 경찰이 수류탄 공격을 받고 부상을 당했다. 14일에 대통령은 대국민 호소문을 통해 폭력과 암살사태에 대한 깊은 유감과 자제를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숨 가쁘게 이어지는 폭력사태와 타이거의 ‘데드라인’ 설정 그리고 대통령의 호소문. 현 상황에 대해 정치평론가들은 1995년 ‘자프나’ 협상이 결렬되고 내전이 재발했던 당시와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당시에도 정부 쪽 파트너는 쿠마라퉁가의 자유당이었고 타이거는 그해 3월 폭력사태와 경제제재 해제를 요구하며 ‘데드라인’을 연장하다 마침내 총을 다시 들었다. 그 덕에 ‘휴전협상을 먼저 파기했다.’며 대대적인 몰매를 맞은 바 있다. 타이거의 정치고문인 안톤 발라싱함은 그의 저서 『전쟁과 평화』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자프나 반도와 와니 정글에서 고립된 타이거들은 바깥세상으로부터 실제로 단절되었다. 국내외 모든 미디어는 타이거 통제 지역으로의 출입이 전면 금지되었고 콜롬보 내 정부 통제언론들은 본질적으로 인종주의적이고 편파적이었다. 인도 미디어는 잔인하리만치 타이거에게 적대적이다. 이처럼 소외된 상황에서 타이거는 정부가 벌인 계획적인 오보 캠페인에 대항해 효과적인 방어막을 칠 수 없었다.

2005년 7월 중순, 실론섬에는 10년 전과 유사한 전운이 조금씩 드리우고 있다.



실론섬 휴전 ‘매우 불안’
남아시아 최남단에 위치한 매혹적인 섬, 마르코 폴로가 지상의 낙원으로 영국 식민주의자들이 ‘인도양의 진주’로 묘사했던 스리랑카는 싱할라 다수족이 인구의 약 74%, 북동부에 주로 거주하는 소수 타밀족이 약 18%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10세기 이후 아랍에서 건너온 무슬림들이 동부지역에 정착하면서 타밀 언어와 문화에 녹아들어 살고 있지만 싱할라는 물론 타밀족과의 갈등관계 속에서 ‘제3의 인종’으로 분류된다.
제3세계 여러 나라들이 그렇듯 오늘날 스리랑카 내전과 불안한 정치의 뿌리는 식민통치에 기반하고 있다. 16세기 초 이 섬을 점령했던 포르투갈과 뒤를 이은 네덜란드는 동북부의 타밀 왕국과 중남부의 싱할라 왕국을 따로 통치했다. 그러나 1796년 네덜란드로부터 통치권을 넘겨받은 영국은 수월한 식민통치를 위해 1833년 두 왕국을 강제 통합시켰고 이는 13세기 이래 별 탈 없이 동거해왔던 두 인종 간 내전의 씨앗을 뿌린 셈이었다.
강제통합에도 불구하고 영국 식민주의자들이 구사한 건 분리지배정책이었다. 그들은 고분고분하지 않던 다수 싱할라족들을 대신하여 남인도 타밀나두의 하층 카스트인 타밀인들을 차밭 노동자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 타밀 노동자들은 실론섬 중부 캔디언 왕국이 지배하는 지역으로 이주되었고 싱할라 지주들과 영국 식민주의자들로부터 이중착취를 받으며 노예 노동자의 삶을 살아왔다.
내전의 씨앗은 신분차별제도인 카스트를 이용하여 타밀족 내부를 분리지배한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인도에서 이주 당한 타밀인들과 스리랑카 타밀족의 하층 카스트들이 영국 식민 치하에서 가장 억압받는 민중들이었던 반면 상층 카스트 타밀인들은 교육과 사회진출 등 특혜를 입으며 식민정부의 관료직을 담당했다. 다수족 견제책의 의미도 담고 있던 이 통치방식은 급기야 불교도 싱할라족 내에 종교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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