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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인도 민주주의의 허와 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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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인도 민주주의의 허와 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12. 26. 16:28
인도의 정치제도는 영국식 의회민주주의를 따른다. 인도의 국회는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는 다수당에서 총리를 선출하고 집권하게 되어 있다. 만일 야당이 여당에 과반수 의석의 검증을 요구할 때는 언제라도 투표로서 여당이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음을 증명해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수상의 임기에 상관없이 대통령은 정부를 다시 구성하도록 요구한다. 따라서 총선을 치르고 난 후 절대 다수당이 나오지 않을 경우에는 수시로 집권당이 바뀌고 그에 따라 정부가 바뀐다.
인도는 영국제국주의로부터 독립한 1947년 이래로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 나타났던 군사 쿠데타가 단 한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 상당히 오랫동안 회의당이 집권을 하였고 그 정부의 수상 직에 네루, 그의 딸 인디라 간디, 인디라 간디의 큰 아들 라지브 간디가 오른 일이 있어 ‘네루 왕조’라는 비판과 비아냥거림을 받은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비민주적 방법을 통해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국민들의 민도가 떨어져서 그랬는지의 여부는 평가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헌정 중단을 통한다거나 강압적인 세습의 절차를 거쳐 만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디라 간디가 집권하던 1975~77년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철권통치를 하였다고는 하나, 아시아의 다른 나라에서 나타나듯 그로 인한 대규모의 충돌이나 인명 살상 등은 전혀 없었다.

네루 왕조
인도는 분명히 국민들의 투표를 통해 정권 교체를 수차례나 한 나라이다. 1947년 독립 이후 회의당은 종교, 언어, 종족, 카스트 등 인도를 구성하는 다양하면서 분열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여러 요소들을 묶어 국민통합을 기치로 내세우며 세속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3대 틀로 삼아 국가를 운영하였다. 1967년의 선거부터 점차 일당 우위 체계의 틀이 약화되면서 1977년과 1989년에는 비(非) 회의당 정권이 들어섰고, 1996년 이래로는 여러 정당이 각축을 벌이면서 연립정권시대가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정권의 교체가 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선거를 통해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래서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민주주의를 행하고 있는 나라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1997년 한국에서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인도는 아시아에서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를 가장 모범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나라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일본은 정치적인 면에서 특히 정권 교체의 면에서는 모범을 보이지 못하고 있고, 중국은 공산주의 체제를 가지고 있으며, 인도의 이웃인 파키스탄이나 서아시아의 여러 나라는 군사 쿠데타를 경험하거나 왕정을 하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도는 겉으로 들어나는 것만큼 훌륭한 민주주의를 운영하고 있는 것인가? 답부터 이야기 하자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우선적으로 문제 삼아야 할 부분은 주요 정당의 집단주의에 입각한 정치 행태를 들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인도 국민들의 정치의식 수준이 낮고 민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상당한 정치의식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경우에도 아직 지역주의와 반공주의가 선거철만 되면 어김없이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을 보면 인도 국민의 수준을 그리 크게 탓할 바가 못 되긴 하지만 말이다.

집단주의에 입각한 정치 행태
집단주의에 의존하는 정당의 첫째로는 독립 이후 60여 년 동안 40년 넘게 집권당으로 군림해 온 회의당을 들 수 있다. 회의당은 인도의 독립과 건국의 과정에서 마하트마 간디와 함께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네루의 당이다. 네루는 인도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고 따르는 정치인 가운데 으뜸으로 그의 회의당은 독립 후 1980년대 이전까지는 실로 일당독재라 할 정도의 위치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당파 싸움과 부정부패로 인해 당이 쪼개지면서 그 영향력이 현저히 약화되고 이에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들이 선택한 카드가 혈통주의였다. 그들의 주장은 국가 운영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국가 운영은 네루와 인디라 간디의 혈통을 받은 라지브 간디가 반드시 맡아야 하고 그러려면 그 당에게 몰표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디라 간디가 시크교도 경비에 의해 암살당한 후 델리에서는 힌두들이 시크교도 학살을 자행했다. 그 보름 동안 정부는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그 결과 공식적으로 2,733명이 살해되었다. 명백한 국가 폭력이었다. 학살의 분위기는 인디라 간디 추모로 이어지고, 곧 그의 아들인 라지브 간디와 회의당에게 압도적인 몰표로 나타났다. 결국 정치란 단 한 시간도 해 본적이 없는 애송이 라지브 간디는 네루의 외손자이자 인디라 간디의 아들이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수상의 자리에 올랐다.
그 후 라지브 간디는 자폭 테러를 당해 목숨을 잃고, 현재는 그의 부인인 소니아 간디가 집권 여당의 당수다. 그리고 그의 아들과 딸 또한 유력한 대권 후계자 반열에 이미 올랐다. 가히 대중이 세운 네루 왕조라 할 수 있겠다.

 

 

혈통주의
회의당의 아성을 도저히 깰 수 없음을 깨달은 야당은 혈통주의를 깰 수 있는 무기로 반(反) 무슬림주의를 고안해냈다. 반 무슬림주의라는 종교 근본주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집권당의 반열에까지 오르게 된 인도국민당은 총선에 처음 참여한 1984년만 해도 전체 545석 가운데 단 2석밖에 얻지 못한 군소 정당이었다.
그러나 회의당 일당 체제가 흔들리면서 인도국민당은 힌두 근본주의를 지속적으로 제기하여 1989년 총선에서는 전체 의석 545석 중 91석을, 1991년에는 119석을 차지하는 비약적 성장을 거뒀다. 그리고 인도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종교공동체 분쟁인 1992년의 아요디야 사태 이후 1996년의 총선에서는 161석을 차지하여 제1 당의 위치에 올랐다. 13일 후 과반 연립정부를 구성하는데 실패해 집권당의 위치를 내주지만 그래도 13일 동안이라도 집권당이 되어보는 경험을 하였다.
그러다가 1998년에는 182석을 차지하면서 제1당으로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명실상부한 집권당이 되었다. 비록 1999년 선거에서는 성장세가 한풀 꺾여 180석을 얻으면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제1당으로 연립을 통해 집권하였다. 그러나 2004년 총선에서는 힌두 근본주의 바람이 더 이상 불지 않아 결국 회의당에게 정권을 내주고 제2당으로 내려앉았다.
인도국민당은 자신들과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 국가자원봉사단, 세계힌두회의, 행동전위대 등과 함께 1992년 12월 힌두교 성지 아요디야에서 참혹한 종교 공동체 분쟁을 야기하고 인민 학살을 자행했다. 힌두 극우세력들은 지금 이 나라의 무슬림들은 외부에서 이 나라를 침략한 자의 후손이고, 그 침략자들이 자신들의 신화 《라마야나》에 나오는 라마 사원을 파괴하고 그 위에 모스크(이슬람교 예배당)를 세웠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현재의 이슬람 모스크인 바브리 마스지드(Babri Masjid)를 파괴하고 그 위에 힌두 사원을 복원해야 한다며 폭력을 동원해 모스크를 처참히 파괴해 버렸다.


그 과정에서 232명이 살해되었고 그 후로도 유혈사태가 계속되어 500명 이상이 사망했다. 그때 집을 잃은 사람이 수십만 명이고 재산 손실도 천문학적으로 커졌다. 그 폭력사태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러한 힌두 파시스트들의 광기는 계속되어 2002년에는 더욱 큰 사건으로 연결되었다. 2002년 2월 27일 고드라 역에서 출발한 기차 안에서 무슬림들에 대한 성희롱이 빌미가 되어 무슬림과 힌두 사이의 폭력 사태가 터졌고 그 결과 아요디야에서 반 무슬림 집회를 하고 돌아가는 중이던 힌두세계회의 행동 대원들과 부녀자, 아이들이 58명이나 죽는 비극이 발생하였다. 왜 그리고 누가 어떻게 그런 처참한 일을 저질렀는지는 아직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비극이 일어난 직후부터 언론은 이 학살이 파키스탄의 사주를 받은 무슬림 테러리스트들이 힌두 사회를 전복시키기 위해 저지른 것이라고 연일 자극하였다.
그 이후 고드라와 그 인근에 사는 수많은 무슬림들이 폭력에 쓰려졌으니 죽은 사람이 5,000명이 넘었고 집과 재산의 피해는 추산조차 되지 않았다. 그리고서는 곧 바로 예정대로 선거가 치러졌고 힌두 근본주의에 기반을 둔 정당의 후보가 압승을 거두었다.
집단주의에 의한 폭탄 테러는 그 이후로도 계속되고 있고 지금도 잠복 중이다. 2003년 8월 25일 인도 최대의 도시인 뭄바이에서 대규모의 테러가 발생하였다. 닷새 동안 뭄바이 도시 전역을 휩쓸고 간 테러는 이듬해 다시 발생해 다시 2주에 걸쳐 연쇄 폭발 테러가 발생하였고, 도합 1,788명이 살해되었다. 무슬림에 의해 자행된 힌두주의자들에 대한 보복 테러인 것으로 드러났다.
인도의 민주주의를 좀먹고 있는 것으로 회의당의 혈통주의 그리고 그에 맞선 인도국민당 주축의 극우 파시스트 힌두 근본주의에 이은 또 다른 집단주의는 카스트주의이다.

 

극우 파시스트 힌두 근본주의
인도에서 네 카스트 가운데 가장 낮은 카스트인 슈드라가 수천 년 동안 핍박을 받으며 살아 온 것은 누구에게나 알려진 사실이다. 1977년에 독립 후 최초의 비(非) 회의당 정권이면서 사회주의적 성격이 농후했던 자나타당 정부는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고, 그들 슈드라에게 보상을 하기 위한 차별정책을 위한 보고서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후 다시 정권은 회의당에게 넘어 가고 1980~1989년까지 집권한 회의당 정부는 자신들의 주축 구성원인 슈드라 위의 상위 세 카스트 (브라만, 크샤트리야, 바이샤)의 눈치를 살피면서 그 보고서의 권고를 이행치 않았다.
그러다 1989년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다시 집권한 자나타당의 브이 피 싱 수상은 1990년에 이를 실행에 옮기겠노라고 선언하였다. 자나타당의 슈드라 세력에 대한 보상적 차별정책의 강행은 회의당의 혈통주의를 격파하기 위해 고안한 또 다른 집단주의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정치적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카스트 체제에도 속하지 못하는 불가촉천민들도 자신들을 ‘달리트’ 즉 ‘짓밟힌 자’라고 부르며 상위 카스트에 대해 투쟁할 것을 선언하면서 정치 전면에 등장하였다. 이후 슈드라와 불가촉천민들의 집단주의인 카스트주의는 인도국민당의 힌두 근본주의에 입각한 무슬림 죽이기의 광풍을 잠재울 정도로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들은 전체 인구의 75%를 차지할 정도로 막강한 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 집단적으로 통합만 하면 권력을 잡는 데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그들은 최하 단위의 지방 선거에서부터 수상을 뽑는 총선에 이르기까지의 거의 모든 선거에서 철저한 카스트 몰표를 행사한다.
그들의 보스는 그 방향을 잡아 이끌어 나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손짓에 따라 표를 던진다. 이념도 모른다. 정강도 정책도 모른다. 오로지 우리 카스트를 위해서 표를 던지는 것이다. 철저한 맹목적 집단주의이다. 그래서 그 카스트 몰표를 확보하려고 모든 정치인들이 안달이고 그들에게 애걸복걸이다. 그래서 어떤 정당은 슈드라나 불가촉천민들을 위한 특별 우대 정책의 할당을 최고 70퍼센트까지 공약하는 경우조차 생겼다.

카스트주의
그들의 무서운 카스트 몰표가 인도의 정권 교체를 가져 왔다. 정권 교체가 되니 그 뿌리 깊은 부패 구조가 많이 파헤쳐지고 있다. 정경유착 문제나 권언유착 문제 또한 점차 풀리고 있다. 그렇다면 카스트주의라는 맹목적 집단주의를 민주화의 한 과정으로 볼 수 있는 것일까? 그들의 맹목적 집단주의는 분명히 정치를 오염시키고 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이미 기득권자로 편입된 지가 오래 되었다.
그러다 보니 슈드라나 불가촉천민들을 위한 특별우대정책을 철폐하라는 상위 카스트들의 거친 항거가 잇달아 터지고 있다. 그 가운데는 인도 최고의 명문 대학인 델리대학교의 학생들이 분신자살 항거도 있다.
인도의 민주주의 뒤에는 항상 집단주의와 국가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하나의 국가라는 명제가 있다.

 


그 하나의 국가라는 틀 안에서 벗어나려는 그 어떤 시도에 대해서도 모든 집권 여당은 단호하게 대처했고, 그 가운데는 국가 폭력과 학살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정당은 종교 공동체 사이의 갈등을 조장하고 그 위에서 집단 테러가 자행되고 그 연쇄의 틀 꼭대기에 국가가 서있는 것이다.
그것은 문맹률 35%가 상징하듯이 국민들의 정치의식 수준이 낮아, 정치인들의 집단주의 조장과 국가가 자행하는 폭력의 실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11억 인구의 인도가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는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광수> 아시아평화인권연대 공동대표, 부산외국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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