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사료이야기/사료(구술) 이야기 (55)
함께쓰는 민주주의
1964년 겨울 한일기본조약 반대와 한미행정협정 개정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던 학생들은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전면전에 나선 군사정부에 의해 패퇴했다. 그때 터진 사자후(獅子吼) 있어 소개하면 이렇다. “툭하면 한일회담을 조속히 해야 한다고 서두는 너, 제2의 이완용을 자처하면서 하겠다는 너, 말마다 방정맞게 ‘국운을 걸고라도 하겠다’는 너는 정말 이 나라의 정부(政府)냐? 왜(倭)의 정부(情婦)냐.”라는 말을 했던 이는 함석헌이었다. (1964년 4월호『사상계』 중 특집 ‘한일회담의 제 문제’에서 인용) 4·19가 열어젖힌 해방과 자유의 공간을 군홧발로 짓밟은 박정희 소장. 그를 상대로 한 싸움을 별러왔던 학생들의 반격이 6·3사태 또는 6·3항쟁으로 불리는 1964년 여름의 일이었다. 그것..
뒤를 돌아보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절 탓인지, 아니면 나이가 든 탓인지, 조석으로 스치는 쌀쌀한 바람에도 마음이 핍진하고 서늘하다. 상강(霜降)도 지난 지 오래되었으니 낙과와 추수가 끝난 들판엔 지금쯤 첫서리가 내렸을 터이다. 11월은 동토를 향한 죽음에로 다가서는 계절이다. 그래서 지내온 한 해를 겸허하게 되돌아보는 때이기도 하다. 얼마 전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을 만났다. 오랜만의 해후였다. 그가 영국에서 유학하던 지난 1980년대 후반 필자는 전태일기념사업회 유럽지부 일을 잠시 맡은 적이 있어서 이런저런 인연으로 가끔씩 만났다. 우리는 마침 30대 동갑내기였으며 당시 주변의 어른들과는 달리 말도 잘 통해서 서로를 친근하게 여겼을 것이다. 막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동숭동의 학림다방에서 지난날들..
‘목사가‘먹사’가 되고 기독교가‘개독교’로 경멸의 대상이 되는, 찌질하고 볼썽사나운 야만의 시대다. 나 자신 예수를‘구원자’로 고백하고 살아가는 입장에서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나마 지리산 기슭에서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찾아 오체투지의 고행에 나선 분들이 있기에 종교에 대한 믿음을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요즘처럼 한국의 개신교가 제 이름값을 못할 때 더욱 그리운 사람이 있다. 문익환 목사님. 그의 이름 석자 뒤엔‘목사’가 붙지만 그는 시인이었고 신학자였으며 빼어난 운동가이기도 했다. 그가 우리 역사에 돌이킬 수 없는 발자취를 남기며 이루었던 운동가로서의 정점은아무래도 북한 김일성 주석과의 만남과 관련된 사건이 었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다. 하지만 그가 내게로 다가..
한동안 기억의 창고 속에 방치되었다가 다시 되살아 나는 말들이 요즘 들어서 어디 한 둘이랴마는, 그중 국방부가 되살려준 것이‘불온서적’의 기억이다. 불온서적이라니, 참 오랜만에 다시 들어보는 단어다. 수많은 불온서적과 판금도서를 양산해 낸 독재정권 시절을 풍미한 책 가운데 하나가『해방전후사의 인식』(이하 )이었다. 이 책은 비단 역사의식에 눈뜨고 정의감이 정금처럼 빛나던 청년학도들만의 필독서가 아니라 가히‘국민도서’로 볼 수 있을 만큼 폭넓은 독자층을 가졌다. 글쓴이들이 뛰어난 역사학자들은 아니었을지언정 그동안 기성의 학자들이 손대지 못했거나 안했던, 하지만 많은 이들이 궁금했던 사안들 특히 해방공간에 대한 본격적 논의였다. 글쓴이들의 치열한 역사인식이 돋보였는데, 송건호 유인호 임종국 진덕규 염무웅 백..
베를린에서 제법 오래 살았으니 이른바 에 대해 남다른 기억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니냐고 묻는다면 대답은‘노’다. 이 일어났던 지난 1967년부터 20년 동안 그곳에 거주해서인지, 정작 베를린에서 그 사건의 흔적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필자가 다른 도시에서 서베를린으로 옮길 당시만 해도서베를린은‘동독이란 바다 가운데 떠있는 외딴 섬’과도 같은 곳이었다. 서독의 어느 지역에서 서베를린을 방문하려면 동독의 고속도로를 경유하거나 비행기를 타야만 했는데, 동독 경찰이 여권을 샅샅이 조사하고 별도의 허가증에 도장을 찍어줘야 통과가 가능했었다. 냉전의 상징으로 동·서 베를린을 갈라놓았던 삼엄했던 장벽도 통일독일이 되면서 사라졌다. 그 베를린에 윤이상 선생이 있었다. 숲으로 둘러싸인 호젓한 호숫가에 위치한 선생..
새 정부 들어서면서 새삼 언론 문제가 사회의 주요 의제로 이슈화되고 있다.‘ 조·중·동 OUT’이 전국언론노동조합을 비롯해 시민들과 누리꾼들에 의해 제기되는 반 면, KBS와 MBC에 대해서는‘국가의 불순한 언론장악음모’로부터 보호하겠다며 시민들이 촛불방패를 만들고 있다. 촛불정국에 나타난 이런 현상은 한편으로 제 4의 권부인 언론이 현대사회에 끼치는 막강한 영향력(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을 보여준다. 정권 쪽 입장에서는 언론이 자신들의 입장을 보다 충실히 대변해주길 바랄 터이지만, 국민들은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아픈 곳은 어루만지며 불안한 미래에 희망찬 대안을 제시해 주는, 국민 편에 선 정론직필을 원한다.권위주의 정권 이래 곡필아세 하는 무리들이 판을 쳤던 이 나라에서 언론민주화운동의 길은 지난했고, ..
희망의 여명이란 밝은 대낮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피어오르는 것처럼 민주화 또한 독재와 철권통치의 암울한 시기에 고된 투쟁을 통해 이루어 진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정점이라 할 6월항쟁이 일어난지 어언 21년. 그런데 어째 날이 마냥 밝지만은 않은지 청계천엔 촛불 꺼질 날이 없다. 갑자기 우리 삶을 전복이라도 하려는 듯 생뚱맞은 어둠이 유령처럼 도처를 배회한다. 이상한 일이다.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와 함께하는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어야 비로소 날갯짓을 한다고 일찍이 헤겔이『법철학』 에서 설파한 바 있지만,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해서는‘황혼’이 여전히 필요한 것인가. 황혼은 어둠의 전제이자 서곡이다. 그리고 어둠은 역설적으로 다시 희망을 북돋운다. 바야흐로 경제가 공공선인 시대가 도래 했..
기념사업회 사료관에 소장되어있는 70여만 점의 사료 중에 리영희 선생이 기증한 사료를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개인이 곧 역사’인 경우에 해당하는 삶을 살아온 이다. 지난해 봄 전화를 해서 기증 의사를 밝혔고 그 후의 과정은 사료수집 담당자들을 통해 추진되었는데 바쁜 일들로 모두들 잊고 있었다. 그러다 올 초에 선생께서 에 보낼 자신의 몇몇 신상자료를 사료관에 기증했으니 찾아달라는 연락을 해서 조사하는 과정에 상고이유서를 비롯하여 옥 중에서 어머니 영전에 드리는 눈물에 얼룩진 편지 등 귀한 사료들을 발견했다. 적지 않은 그의 법정자료들은 한국 민주주의의 수난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리영희 선생의 표현에 따르면‘반문화적 권력의 박해’에 대한 확실한 물증이 바로 여기 소개하는 사료들이다. 민주화운동 관련..
사업회 사료관이 를 구축하여 서비스를 선보인다. 는 사료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민주화운동을 비롯한 한국현대사 사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사료를 활용한 교육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제작된 교육용 콘텐츠이다. 현재 서비스되고 있는 과 에 이어 , , , 등 4개의 사료정보콘텐츠가 추가 개발되었고, 2월 13일 오픈하였다. 주소는 http://contents.kdemocracy.or.kr/ 이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와 사료관 아카이브시스템을 통해서도 들어갈 수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은 향후 다양한 주제의 한국현대사 및 민주화운동 사료정보콘텐츠를 구축하여 서비스 할 계획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권위주의 권력에 맞서 전개되어 온 민주화운동은 일제 식민지 하의 독립운동과 더불어 한국 현대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형성하는 고유의 역사발전 과정이었다. 이러한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생산된 사료들은 과거의 민주화운동 역사를 되돌아보고 현재 한국 민주화의 정체성을 정립하며 나아가 미래의 방향성을 설계하는데 지침을 제공하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사진의 경우 당대 민주화운동의 실제 모습에 대해 언어나 문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생동감 있는 증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이용 가치가 자못 크다고 할 수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에서 구축한 ‘민주화운동사진 디지털아카이브’(Digital Archives)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실상을 현재로 부활시키는 하나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