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문화 속 시대 읽기/시대와 시 (19)
함께쓰는 민주주의
곽재구 시집, "沙平驛에서" 글 서효인 (시인, humanlover@naver.com) 청년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청년은 시대에 물드는 리트머스다. 청년은 어리둥절한 표정이며, 대합실 구석에 서 있는 객(客)이다. 그곳은 아마도 사평역. 곽재구 시인에 의해 세상에 나온 사평역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곽재구 시인의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사평역은 같은 이유로 세상 모든 청년이 발붙이고 있어야 할 쓸쓸하고 눈 시린 공간이 되었다. 사평역은 어디에도 없다. 아니다. 사평역은 어디에든 있다. 곽재구 시인은 1981년 「沙平驛에서」로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보통 신춘문예 마감일을 따져보면, 시인이 시 원고를 우편함에 넣은 시기는 대략 전해 11월 정도일 것이다. 1980년 겨..
신경림 시집, '농무' 글/서효인 (시인, humanlover@naver.com) 한때 이 땅의 모든 사람이 흙으로부터 비롯되던 날이 있었다. 불과 50년이 지나지 않은 날이다. 그때 우리 대부분은 해보다 먼저 일어나 새벽이슬과 함께 논과 밭으로 나갔다. 그리고 땅을 일구며 땅에 기댄 채 땅에 의해서 살아갔다. 하지만 그들은 가난했고, 가난을 탈출하기 위하여 부드러운 땅이 아닌, 단단한 아스팔트 위로 올라야 했다. 맨손과 맨몸뿐인 천둥벌거숭이가 되어 그들은 도시로, 서울로, 서울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곳으로 모이고 모였다. 불과 50년이 되지 않은 이야기다. 신경림의 농무는 농촌의 이야기다. 가난의 서사이고, 떠남의 서정이다. 농촌은 우리 대부분의 고향이지만 그들 대부분은 이제 농촌에 살지 않는다. 농..
단단하게, 더 단단하게 "김정환 시집 1980~1999", 이론과실천, 1999 서효인_ 시인/humanlover@naver.com 시집의 고집 이 시집은 괴물 같은 시집이다. 이런 시집은 본 적이 없다. 블록버스터 영화 광고카피에나 어울릴 법한 수식어를 붙인다. "김정환 시집 19980~1999"(이하 시집)에 관한 이야기다. 시인 김정환은 다작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폭포처럼 쏟아진다는 비유로 표현되고는 한다. 하지만 비유는 비유일 뿐, 시원한 물처럼 장대하게 떨어지는 시의 폭포를 기대하면 오산이다. 오히려 그의 언어는 서서히 깎이거나 자라서 거대한 풍경이 되는 모래를 닮았다. 씹어 읽을수록 입안이 서걱서걱해진다. 언젠가 바다였다는 사막이나, 언젠가는 늪지였을 산맥처럼 시인과 시는 퇴첩(堆疊)되어 ..
버스 정비공의 시를 희망으로 더듬는다 박노해, 『노동의 새벽』 글· 서효인 시인/humanlover@naver.com 어느덧 서점에서 박노해의 첫 시집을 구하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스마트폰으로 알아본 정보로는 영등포에 있는 거대 쇼핑몰 안, 대형서점에 단 한 권이 구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위치의 『노동의 새벽』이었다. 한국현대사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쳤으며, 시집 자체가 ‘몸의 전위’였던 책을 구하기 위해, 휘황찬란한 쇼핑몰까지 찾아가야 하는 이유는 의외로 명료하다. 동네서점이 몽땅 망했기 때문이다. 영등포의 쇼핑몰은 거대한 괴물의 입 같았다. 원을 중심으로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내리는 인파는 혼곤했다. 백화점과 쇼핑몰 근처에서는 사창가의 여성들이 매달아 놓은 현수막이 반쯤 찢어진 채 비를 맞고 있었다..
4월의 시인, 혁명의시인_신동엽 글·서효인 humanlovernaver.com 세계 곳곳은 지금 혁명의 바람이 거세다. 오랜 독재를 통해 부를 축적하고, 자국민을 억압한 독재자들은 이제야 그 말로를 맞이하거나, 성난 민중에게 끝내 저항하고 있다. 하지만 시민과 독재자의 싸움은 언제고 시민의 승리로 마감되리라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 어떤 죽음과 고통도 헛되지 않음을 알고 있다. 지금 이곳과는 머나먼 곳에서 일어나는 민주화의 바람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은 헛되지 않기 위해 가야할 길을 우리가 겪어왔기 때문이다. 헛되지 않은 혁명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의 정신이다. 쇠붙이로 행해지는 권력의 폭력에 큰소리로 저항하는 것이 바로 혁명의 진짜 정신이다. 그리고 이 진짜 혁명의 정..
모든 시작은 한편의 시(詩)였다_ 양성우, 글·김장환 북세미나닷컴 이사/myth67bookseminar.com 1987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굳이 서울이 아닌 춘천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려 했던 건 장학금 때문만은 아니었다. 1985년 미국문화원 점거농성을 하고도 모자라 1986년 10월 말, 대학 입시를 한 달도 채 안 남겨둔 시점에 건 대항쟁으로 입건된 누나와 무기력하고도 무능력해 보였던 부모님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여겼던 탓이 더 컸다. 1987년의 춘천은 여느 지방 도시처럼 고즈넉했다. 새벽이면 물안개가 몰려와 도시 전체를 장악하고, 아침 8시에도 가게문을 열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누나가 그렇게 부정하려 했던 부도덕하고 폭력적인 정권이야 어찌 되었건 부모님 세대가 이루지..
시인이 남긴 아름다운 여백_고정희 시인 글·서효인 humanlovernaver.com 잘 알려져 있다시피, 지리산은 3개 도, 5개 군에 걸쳐 광대하게 자리한 산이다. 지리산은 모성의 산이다. 그 넉넉한 품은 어릴 적 고이 안겼던 어머니의 가슴팍과 같다. 또한 푸르고 당당한 산세는 늘 정직하게 살아왔던 이 땅 모든 어머니의 삶을 닮았기도 하다. 지리산은 실제 외침에 맞서고 쫓기던 수많은 의병과 민초들의 숨을 곳이 되어주었다. 지리산은 해방공간에서 달랐던 사상으로 인해 서로 총부리를 겨눠야했던 시대의 아픔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남도, 아니 한반도의 고난을 조용한 비탄으로 바라보았던 산, 지리산. 이 산의 여성성을 알아보고 어루만지고 결국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시인이 있다. 글에서, 시인의 죽음을 먼..
태안사의 아름다운 곰_국토의 시인 조태일 글·서효인 humanlovernaver.com 때 아닌 역병이 돌고 있다. 병에 시름할 시간도 없이‘우리의 땅’에 그들은 묻히고 있다. 이른바 구제역이라 불리는 가축의 전염병은 그 병의 진원지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전염이 의심되는 가축은 무자비하게 살처분되고 있다. 1월 중순인 현재 200만 마리의 돼지와 소가 매장되었고, 남도에서는 AI로 인 해 그보다 더 많은 수의 닭과 오리가 땅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고 한다. 깊게 판 땅에 한때 농민과 고락을 함께하던 가축을 한꺼번에 밀어 넣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그 위로 흙을 덮어버린다. 이 잔혹한 처분이 전염병의 확산을 막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하더라도 그 와중에 사라져가는 생명 의 존엄성에 대해서 우..
글·서효인 humanlover@naver.com김수영을 읽는다는 것 어떤 시인은 시대를 대표하기도 한다. 보들레르는 자본이 잠식하기 시작한 파리의 뒷골목을 상징하고, 파블로 네루다는 칠레 혁명과 그 속의 민중, 그 자체이다. 우리에게도 한 시대를 혁명처럼 살아간 시인이 있었다. 그는 시를 쓰고 책을 읽었으며, 번역을 하고 술을 마셨다. 포로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왔으며, 양계업으로 생계를 꾸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는 온몸으로 시를 썼다. 그에게 창작이란 자유와 다른 말이 아니었다. 김수영의 시는 당대의 상처를 찢고 핥았다. 그리고 시대의 쓰라림을 제 속에 취하도록 들이부었다. 한국현대사에서 시대와 시라는 키워드는 다음의 언명과 함께 시작해야 한다. 1960년 4월 19일 그리고 김수영. 김수영을 읽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