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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시] 우리는 깃발을 믿지는 않지만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7. 16. 17:07

우리는 깃발을 믿지는 않지만
-오은 『호텔 타셀의 돼지들』(민음사, 2009)

글 서효인 humanlover@naver.com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사내가 구속되었다. 그는 대통령의 친형이며, 여권의 실세였고, 국회의원을 지낸 자다. 정권 말기, 대통령의 친인척이 거의 그래왔듯이 그도 검은 돈에 손을 뻗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그에게 돈을 준 자들은 지방 저축은행의 경영진이다. 그들은 서민이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투기를 하고 서민의 희망을 무참히 모두 없던 일로 만들어버렸다. 권력을 가진 자가, 서민을 돌보기는커녕 서민을 착복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이다. 그가 검찰에 출두했을 때, 한 시민이 그에게 계란을 던지자, 사내는 검찰청 관계자에게 말했다고 한다. “저런 사람 하나도 통제하지 못하나”

그가 말하는 ‘저런’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하면 헛웃음만 나온다. 그것이 지금 정권이 시민을 바라본 시선일 테니, 우리는 그저 ‘저런’ 사람이 되었다. 1억을, 5,000만원을, 혹은 다음 달 생활비를 모으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우리가 ‘저런’ 사람이다. 하지만 이 정권을 스스로 선출한 것도 바로 저런 우리다. 투표를 한 내 손목을 자르고 싶다는 농담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 요즘이다. 대통령은 친형이 구속 수사되는 작금의 상황에서 과연 사과를 할 것인가. 하지만 그에게 사과다운 사과를 듣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그의 얼렁뚱땅하는 유감의 표시를 정권 초에 들은 적이 있다. 광화문을 가득 채운 광장의 힘에 의해서였다. 여기, 광화문을 새롭게 다룬 시를 소개한다. 1982년에 태어난, 젊은 시인 오은의 시다.


동물원에서

레드를 봤어요
피벽돌양탄자가 아닌
통째로 온전한 레드를요
망고말보로바이올린과는 격이 달랐죠
레드는 뭐랄까, 사람 같았다니까요
살아 있는 레드, 호흡하는 레드
탱탱한 덩어리의 레드
찰흙처럼 퍼덕거리다가
콜타르처럼 흐르다가
멸치처럼 바짝 말라붙었다가
아직 죽기는 싫은지
왼쪽 심장이었다가, 당신의 온기를 동맥으로 밀어냈다가
온몸이 달아올라 헐떡거리다가
블루와의 원 나이트 스탠드였다가
10월에 퍼플 레인으로 쏟아지다가
질량 보존을 위해
수백만 개의 젖꼭지가 되었다가
애를 밴 섬바디였다가
태교에 좋은
달팽이관의 펑크록 사운드였다가
밸뱃 골드 마인이었다가
카메라가 다가가면 용케 멈춰 버리는
대가리를 열고 가시를 겨누기 시작하는
애니바디, 에브리바디 어쩌면 노바디 레드는
때때로 식물원에 팔려간 친구
튤립선인장아스파라거스를 생각하며 쓸쓸해질 줄 아는

레드는 뭐랄까,
광화문에 뿌려진 하인즈 토마토케첩이지요



2008년 우리는 광화문 광장에 모였다. 2002년만큼 많은 숫자였다. 2002년에는 모두 빨간 옷을 입고 환호를 했지만 2008년에는 촛불을 들고 모여 앉아 노래를 불렀다. 물대포를 맞았고, 경찰 버스를 쓰러뜨리기도 했다. 87년 6월 항쟁 이후로 가장 많은 인파가 광장에 모여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인 것이다. 우리는 그날의 함성을 ‘촛불시위’라고 부른다.

촛불시위는 흔히 운동이라 불리는 대학가, 넥타이부대라 불리는 직장인 계층, 노동자, 농민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특정 지을 수 없는 일군의 무리에 의해서 촛불은 발발했다. 그들은 빠르게 정보를 수집했고, 편집한 정보를 퍼다 날랐다. 허위와 과장은 어느 정도 내부적으로 걸러졌고, 일부분은 그대로 통과되었다. 플래시 몹, SNS, 인터넷 논객 등의 용어가 시위에 주요하게 사용되었고, 다중지성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떠올랐다.

촛불시위는 끝내 촛불운동이 되지 못했다. 미국 소고기 개방으로부터 시작된 시위는 하나의 아젠다를 더욱 심화 확대시키지 못했고, 그 힘을 조직적으로 이끌 힘을 만들지 못했다. 아니, 만들지 않았다. 깃발 아래서의 일사분란은 새로운 세대의 방식이 아니었다. 2000년을 전후로 성인이 된 시민이 촛불을 가장 많이 들었으며(예비군 훈련이 끝나고 시위에 나온 남자들이나,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엄마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화염병을 던지며 최루탄에 맞서던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방식은 무엇인가.

우리의 레드는 “살아 있는 레드 / 호흡하는 레드”다. ‘탱탱한 덩어리’이기도 하고, ‘찰흙처럼 퍼덕거리’기도 하다. ‘콜타르처럼 흐르’고, ‘멸치처럼 바짝 말라붙는’다. 형체를 알 수 없는 상상적 형상인 것이다. 종래의 시민운동으로는 그것을 조정할 수 없다. 어리석은 줄 알았던 대중이 지성적인 다중으로 변하는 것은 한순간이다. 천박한 것으로 여겨졌던 외래어나 대중 문화적 요소가 서정시의 맥락에 숨어들어 그것을 전복하는 것처럼, 젊은 시민의 감각은 남다르다. 발칙한 새로움이 광장을 채웠다. 엄숙함의 세계는 물대포의 거품처럼 쓸려 사라진 것이다.

오은의 시는 그 세대를 대변하는 서정이다.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른다. 어른이 보기에는 혀를 끌끌 찰만하지만, 동세대에게는 발랄함 자체다. 귀엽다고 생각하겠지만 귀여움 속에 처참함과 날카로움이 있다.


스프링

더블린은 지금
텀블링하기 좋은 날씨
방과 후의 아이들이
봄처럼 튀어 올랐다

해바라기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씨들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주근깨를 볼에 심은 아이들이
발끝을 모으고
해를 향해
자신들의 경쾌한 근원을 향해
스프링, 스프링
튀어 오를 때

스카이가 다른 이유를
불가능이란 아무것도 아님을
열심히 일한 자들이 왜 떠나는가를*
방과 후 학습에서
비로소 이해할 때

아이들은
샘물 위에 피어난
마블링처럼 웃으며
고블린보다 신나게
더블린 한복판에서
텀블링, 텀블링

이 모든 도약이 꽈배기 한 입에서 시작되었다

*미국의 수학자 존 내지(John Nash)는 소련 간첩들이 ‘이것’을 통해 내통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한국어의 음성과 의미를 적절히 활용한 말놀이. CF의 문구를 활용한 패러디. 도약의 근원을 다시 격하시키는 시상의 역전이 위 시에 있다. 촛불시위에 웹에서 보았던 농담과 분노, jpg 그림파일과 pdf 첨부문서의 내용이 이러하다.

우리는 처음에 ‘텀블링’을 하듯이 통통 튀면서, ‘스프링’처럼 발랄하게 ‘고블린’ 같은 농담으로 상대를 대했다. 근데 아무리 비꼬고 건드리고 웃겨도 상대방은 예전의 방식을 고수한다. G20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려서 구속된다. 트위터에 북한에 관한 농담을 했다고 재판을 받아야 한다. 희망버스를 탄 대가로 벌금을 받는다. 살던 마을에 해군기지를 반대했다고 잡아 가둔다. 그들에게는 농담이 없다. 웃음이 없고, 상상력이 없으며 그런 이유로 감동이 없다. 경직된 사고로 타인을 대하며 유연한 사고로 자본을 불릴 뿐이다. 도대체 ‘저런’ 사람들과 우리는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세대차이

단순히 자장면과 피자의 차이는 아니죠 자장면의 면발은 아직 짉다니까요 그것은 오히려 비틀즈와 라디오헤드 차이예요 내일을 계산하기도 바쁜데 어제를 노래하는 건 시간 낭비죠 차라리 특별해지고 싶다고 소리치는 게 훨씬 쿨해요 그러나 인정하겠어요 우리는 모두 겁쟁이예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을 때만 미칠 수 있지요 온실효과 때문인가요? 전쟁 핑계는 대지 마세요 술과 마약은 그때가 더 독했잖아요 박노해와 마이클 무어는 몸집부터 다르고 그때도 엘뤼아르는 저세상 사람이었어요 히피의 자유는 엑스세대의 그것과 뭐가 다르죠? 길 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세요 긴 머리가 사이키델릭했던 건 딱 88서울올림픽까지였어요 사실, 머리 자르는 건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니었죠 오죽하면 100년 전엔 그걸 개혁이라 불렀겠어요 박정희와 닉은은 둘 다 욕심꾸러기였고 그걸 숨긴 건 어쩜 당신이었죠 계엄령 시즌마다 알아서 앉은뱅이 되던 사람들은 부티크 세일 기간도 척척 맞추고 있어요 우리는 뉴욕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부를까 봐 벌벌 떨고요 그러고 보니 삐라와 익명게시판이 분노로 가득 차 있는 건 똑같네요 양쪽 다 출처는 불분명해요 긴급조치는 불필요하거나 불가능하죠 몽타주와 아바타는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자장면과 피자를 동시에 먹는 우릴 말예요



어쩌면 지금 정권은 ‘몽타주’거나 ‘아바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인간의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기 못하고, 자본으로 구성되는 어렴풋한 형태로 존재한다. 수익모델에 따라서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아바타로 스스로를 격하한다. 권력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들의 도덕불감증을 우리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우리가 그들을 뽑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촛불을 들었다가 다시 놓았기 때문이다.

다시 상상력의 시간이 돌아온다. 우리의 선배들은 1980년의 상상으로, 1987년 발칙함으로 세상을 조금씩 바꿔왔다. 그들이 힘겹게 돌렸던 세상의 시계는 5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나게 뒤로 돌아갔다. 이토록 반동적이고, 구리고, 후지다니. 이 정권에 세대차이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시인 오은은 시집의 표제작 「호텔 타셀의 돼지들」에서 말한다. “늙는다는 것은 이렇게나 추하고 무서운 일이랍니다” 추하고 무서운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추하고 무서운 5년을 다시 맞이해야 할까? 답은 젊은 세대의 새로운 감수성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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