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쓰는 민주주의
80년대 민중가요의 아이콘 윤선애 씨를 만나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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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근황을 물었다.“ 공연은 예전부터 그랬듯 그리 많지 않 아요. 운이 좋게도 청개구리 노래 모임을 주도했고 양희은, 송창식 등 과 음악 작업을 했던 포크음악의 산증인 김의철 선생님을 만나 3년째 노래 연습, 공연, 음반작업 등을 하고 있어요. 그 결과물이 2009년 낸 <윤선애, 김의철을 만나다…아름다운 이야기>인데, 이전과는 다른 저와 김의철 선생님이 추구하는 음악의 색깔을 담은 음반인 셈이지 요. 제 목소리와 김의철 선생님의 기타 연주로만 이뤄진 소박하지만 깊은 울림이 있는 곡으로 구성된 음반입니다.” 지난 3년간은 미래를 위한 준비기였다고 감안하더라도 사실 가수 25년차 치고는 그동안 그의 공백기가 너무도 길었다. 1993년‘새벽’ 공연 <러시아에 관한 명상>을 마지막으로 그가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다. 군부독재가 종식되고 합법적인 민주정부가 들어 섰기 때문일까? “공백기가 컸던 건 대학교 1학년 때부터‘메아리’‘새벽’등에서 함께 활동했던 이들이 뿔뿔이 흩어진 상황에서 제가 설 자리를 찾지 못한 셈이지요. 무슨 노래를 해야 할지, 어떤 노래를 해야 할지, 어떤 노래를 만들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요? 또 제가 대중가수도 아닌데다 직접 음악을 만들고, 직접 기타 연주를 하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요. 그렇다고 시대가 바뀌 었는데 20여 년 전처럼 <벗이여 해방이 온다> <그날이 오면> <민주> 같은 노래를 부르기도 멋쩍잖아요.” |
대중과의 만남은 뜸했지만,‘ 노래’에 대한 그의 욕구만은 예나 지 금이나 변한 게 없다. 어릴 적부터 동네에서‘노래 잘 하는 아이’로 불렸던 그는 늘‘모범생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런 그에게 노래 부르는 일은 일종의 해방구나 마찬가지였다. 무대에 설 때마다 부담스럽고 떨리 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그때만큼 행복했고 즐거웠고 살아있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대학(서울대 지구과학교육학과)에 입학한 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노 래패‘메아리’공연을 봤어요. 시원하면 서도 친숙하게 와 닿았어요.‘ 이런 노래 를 부르고 싶다’는 생각에 주저 없이 다 음날 바로 가입을 했지요. 음악을 너무 좋아한다거나 다른 사람의 노래를 많이 들었던 것도 아니고 음감이 뛰어난 것도 아닌데 다만 많은 사람들이 제 목소리가 좋다고 칭찬했었으니까요.” 그런데 당시 환경에서 그는 노래만 부 를 수 없었다. 민주화를 외치는 시위와집회 현장에 나가야 했고 그래야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그것이 그에 게는 버거운 짐으로 다가왔다. 비합리적이고 모순된 사회가 학생운 동을 통해 시정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동안 모범생으로 살아왔고 교사가 되려고 마음먹은 그에게 집회와 시위 현장에 나가야 하는 일 들은 큰 스트레스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2학년 때 메아리를 탈퇴했 다. 그럼에도 노래를 향한 그의 열망은 꺾을 수 없었고 선배의 제안에 망설임 없이‘새벽’이라는 노래패에 합류하게 된다. “비합리적이고, 모순된 사회가 제가 하는 학생운동을 통해 시정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음정도 안 맞고 했는데 그 시대 상황에서 제 목 소리를 원했고 지금도 많은 분들이 그렇게 제 존재를 기억하시니 감 사할 따름이지요.” |
그가 원하던 대로 그는 대학 졸업 후 과학교사로 임용된다. 그러면 서도‘새벽’공연 일정이 잡힐 때마다 빠지지 않고 달려 나갔다. 부산 을 비롯해 지방 공연을 하면서 학교 수업을 병행하는 일이 쉽지 않았 다. 옳지 못한 일임을 알면서도 끝내‘임신했다’고 거짓말을 해서 1년 휴직계를 얻어 공연을 다니기에 이르렀고, 그 일 때문에 결국 사직서 를 내야 했다. “3년 반 정도 교사생활을 한 것 같아요. 수업을 하면서 노래는 절대 못하겠다 싶었어요.‘ 새벽’활동을 하면서 노래에 대한 애정이 최고 조에 이르렀을 때였거든요. 더구나 92년도에는 <윤선애씨, 어디 가세 요?> 공연을 성공적으로 끝냈을 때이기도 하구요. 잡지, 신문사에 기 사도 제법 났고, 이틀 동안 3회 공연을 했는데 매번 공연장이 가득 찰 정도로 입소문도 탔고요.” 하지만‘민중가수’라는 꼬리표를 달았던 그가‘대중가수’로 자리 매김하는 일은 의욕이나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더구나 그의 든든한 후원군이었던‘새벽’마저 해체되고, 민주화가 서서히 진행되면서 그 의 입지는 점점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 그와 함께 노래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는 서서히 지쳐갔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생계를 꾸려나갔고 간간히 그를 찾는 무대가 생길 때 노래를 하는 것 이 전부였다. 좀처럼 가수로서의 전환점은 열리지 않았다. 공백기가 길어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
그런 그의 돌파구는 공교롭게도 또 음악이었다. 전통음악의 갈래 인‘정가’. 불현듯 선배 한 분이‘정가 공부를 해보라’고 그에게 제안 했고, 국악인 강권순 씨한테 10년 동안 정가를 사사했다. 한국예술종 합학교 전문사 과정도 수료했다. “무엇보다 소리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들고 호흡을 가다듬게 해주었 어요. 물론 무대에 오르는 것이 여전히 힘들었지만 말이지요. 그러다 김의철 선생님을 만났고, 지금은 김 선생님과 함께 윤선애·김의철 음악, 한국적 포크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만들려고 하는 중이구요. 3년 동안 연습을 해도 사람들이 있으면 호흡이 자연스럽지 못한 게 과제 인데 그래도 노래를 계속 하고 싶어요. 그 이유를 모르겠네요.” 그는“더 이상 준비 안 된 노래는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제는 주위 사람의 제안에 떠밀려서, 막연히‘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불 러야 하는 노래는 하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공연 섭외가 들어와도 맞 지 않는 공연은 정중히 거절하는 까닭은 이제는 25년차‘가수 윤선 애’만의 색깔을 내야 할 때라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은 제 스스로한테 천착해 들어가는 중이에요.‘ 나는 어떤 생 각을 하는 사람이고 어떤 정서에 공감하고 뭘 좋아하는가.’이런 것 들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고 있어요. 예전만큼 사회 돌아가는 것이나 현안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나를 들여다보 면서 나를 둘러싼 이웃과 사회에 더 관심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그는 또 말을 이어갔다.“ 대중가수, 가요도 필요하지만 그렇지 않 은 음악과 가수도 한줄기 정도는 남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생각 으로 지금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답니다. 어떤 가수로 남고 싶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요. 그냥 노래하는 게 좋으니까 노래를 계속 할 수 있는 무대와 기회가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만족합니다.” 25년 전 그의 목소리에 뛰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던 이 땅의 젊은 이들, 지금껏 그를 기억하고 있는 팬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이것 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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