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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국가 시민으로 정치 참여하는 것뿐, 나의 본업은 배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0. 4. 14. 16:15

민주주의국가 시민으로 정치 참여하는 것뿐, 나의 본업은 배우

문성근

글 김미영 kimmyhani.co.kr

 


문제적 캐릭터 전문 연기자. 배우 문성근를 수식하는 말 가운데 하나다. 고 문익환 목사의 아들, <그것이 알고 싶다> 진행자, 지식인 배우, 노사모 회원, 사회 참여 연예인 등 그를 따라다니는 꼬리표는 무궁무진하다. 사실 모두 맞는 말이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 <실종> 등 논란이 될 만한 영화에서 그는 독특한 캐릭터를 주로 연기해 왔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팬클럽 회원이자 시민의 자격으로 현실 정치 참여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는 “대의민주주의 국가에서 시민의 정치 참여는 의무”라며 “더 많은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할 때 우리 사회가 좀 더 나은 공동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치 참여…얻은 것도, 잃은 것도 있지만 후회 없다
하지만 그는 노사모 활동 이후 뜻하지 않게 오랜 공백 기간을 가져야만 했다. 참여정부 때는 괜한 오해를 받을까 의도적으로 대중 앞에 서지 않았다. “연기자로서 본의 아니게 한동안 활발하게 활동하지 못했습니다. 대중들이 저를 친숙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저를 찾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려고 합니다.”
지난해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 “샤프한 이미지를 위해 삼겹살을 먹지 않는다”는 고민을 털어놓은 것이나, 드라마 <신의 저울> <자명고>, 영화 <실종>에 이어 최근에는 연극 <비언소>(5월2일까지, 대학로 아트원 차이무 극장)에 출연한 것은 바로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그는 “정치에 참여하면서 본업인 연기 활동에 있어 손해를 본 면도 부정할 수 없지만, 최선을 다했고 떳떳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며 “대신 지금을 더 알차게 채우고 싶다”고 한다.

8년차 대기업 사원에서 <칠수와 만수>의 배우가 되기까지
그는 32살에 데뷔한 늦깎이 배우다. 그가 데뷔할 때 ‘가정이 있는 대기업 과장 출신’이라는 이력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대학시절 연극반 활동을 하긴 했지만, 그 역시 그가 배우가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배우를 동경했던 것도 아니었다. “회사생활 5년쯤 지났을 때 ‘더 이상 못 다니겠다’ 싶더군요. 일개 부속품으로 마모되어 가기 전에 내 삶을 스스로 개척해보고 싶었죠. 그런데 할 수 있는 게 배우밖에 없었어요. 늘 연기로 밥 먹고 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음에도 말이죠. 지금 생각해보면 무책임한 결정이었죠.”
1985년 연우무대에 들어갔다. 그의 첫 작품은 <한씨 연대기>. 이 연극으로 그는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받았다. 이듬해에 출연한 연극 <칠수와 만수>는 배우 문성근을 대중들에게 각인시켜준 작품이다.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수입도 대기업 사원일 때보다 더 많았다. 방송과 영화 쪽에서 러브콜이 이어졌다. 자연스럽게 연극에서 영화로 활동무대가 넓어졌다.

“운이 좋았다고 밖에 할 수 없어요. 사실 연극에 입문하기 전 생계를 위해 대학로 인근에 카페를 차리려고 했었거든요. 결국 성사시키지는 못했지만. 87년 6월 항쟁 이후 검열이 완화되면서 <그들도 우리처럼> 같은 70~80년대 못 만들었던 영화들이 기획·제작되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저한테 기회가 많이 왔던 것 같아요. 억압의 세월을 겪은 이가 바로 저였고, 이에 적응하는 인물로 제가 적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

이후 그는 <경마장 가는 길> <베를린 리포트> <101번째 프로포즈> 등에 출연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것이 알고 싶다> 사회자로 최고의 전성기 구가
영화 활동과 별개로 그는 1992년부터 시사프로그램인 <그것이 알고 싶다> 진행자로도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송지나 작가가 그가 출연하는 연극 <4월9일>을 보고 나서 그를 적극적으로 천거한 덕분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그것이 알고 싶다> 진행자로 기억한다. 그만큼 그에게 <그것이 알고 싶다>는 소중한 프로그램이다. 많은 사랑을 받았고, 그가 ‘지적인 배우’로 인식되는데 도움을 줬다. “당시 평균 점유율이 40%를 넘었고, 최고 76%까지 나왔어요. 이 프로그램 때문에 다른 방송국의 야심작인 <제5공화국>이라는 드라마가 안 뜬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그는 2년도 채우지 못하고 1993년 12월 ‘잘 나가던’ 그 자리에서 물러난다. 배우로서 어느 한 이미지로 굳어지는 것을 스스로 경계했던 탓이다. “손숙 선배가 한 스포츠지에 기고한 영화 <101번째 프로포즈> 감상평에서 ‘영화에 빠져드는데 30분이 걸렸다’고 썼어요. 똑똑하게 보이던 사람이 어리숙한 역할을 하니까 몰입이 안 되었다는 뜻이었죠. 동업자도 이렇게 느끼는데 일반 관객은 어떻겠나 싶어서 물러난 것이죠.”

문제적 캐릭터만 의도적으로 한 건 이미지 변신 때문
대신 그는 이를 만회하려는 듯, 영화배우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친다. <세상 밖으로> <너에게 나를 보낸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꽃잎> <초록물고기> 등 그의 대표작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만한 작품들에 연이어 출연했다. 연기상도 여러 차례 수상했다.
“이때는 의도적으로 격한 역할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연기자로서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었거든요. 광고모델로서 부드러운 이미지를 위해 악역을 안 하겠다고 하면 배우가 아닌 것이죠. 작품이 괜찮다면 자극적이더라도 해야 하는 게 배우의 의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럼에도 그는 97년 다시 <그것이 알고 싶다> 진행자로 돌아왔다. 그 이유는 뭘까. 그는 “배우로서 제 이미지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굳어진 제 이미지인데, 저항하거나 교정 해보려고 하는 게 무의미하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이 프로그램에 대한 애착도 남달랐기 때문이다.
“요즘 부드러운 이미지로 굳어진 이선균이 저 같은 고민을 많이 할 것 같아요. 배우는 늘 변화의 갈망이 있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미지 변신에 크게 서두르지 말고, 그 이미지를 맘껏 즐기라고. 가다보면 자연스럽게 다른 역할을 맡게 될 때가 오니까. 근데 저는 93년 즈음에 너무 이미지 변신에 급급했던 것 같아요.”

평소 내성적인 성격,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는 원래 내성적인 사람이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남 앞에 서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노사모’로 활동하면서 대중 연설을 하고 강연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심적·육체적으로 힘들었다. 정치 참여가 배우 문성근에게 가져다 줄 시련과 고통을 알면서도 굳이 ‘그 길’을 선택한 데는 다른 이유가 숨어 있다.
“노사모 활동을 한 건 민주정부가 재창출 됐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아버지(고 문익환 목사)에 대한 생각 때문이고요. 아버지 삶을 돌이켜보면, 정말 시비꺼리 하나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를 굳이 꼽으라면 양김 분열로 정권 교체가 안 된 것이었죠. 노무현 후보는 민주정부를 대변하는 동시에 정치 생명을 걸고서라도 지역대결 구도를 완화하려고 하는 인물이었어요. 노무현 후보를 도운 것은 감히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아버지를 대신해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민께 사과를 드리는 한 방법이었어요. 대선에 참여해 민주정부를 세우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처음에는 딱 2년 동안만 노무현 후보를 위해 자원봉사를 하자 했어요. 노 후보가 당선되어도 어떤 덕도 보지 않겠다고 한 것도 그런 맥락이고요. 후보를 도운 것으로 덕을 본다면, 제 활동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럴수록 그는 점점 더 대중 앞에서 멀어졌다. “선거 참여를 기회 삼아 정치가나 행정가가 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다시 본업으로 돌아오자 했었죠. 아무도 안 믿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고요. 어차피 제 말은 5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에야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정작 문제는 참여정부의 5년 임기가 끝난 뒤부터 왔다. 연기자는 생각하지 않고, 먼저 느껴야 하는데 5년 넘게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 ‘느끼는’ 배우의 기능이 싹 달아나버린 것이다. 그는 “정치를 욕하지만 남에게 찍어달라고 얘기하기 위해서는 굉장히 정교하게 모든 분야를 꿰뚫고 있어야 한다”“연기자로 복귀하는데 매우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후회는 없을까.
그는 “지금껏 열심히 살아왔고, 앞으로도 열심히 살 것”이라며 “남에게 어떻게 비춰진다거나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기를 기대하지도 않으며 지금처럼 열심히 살겠다”고 말했다.

가장 후회하는 것은 연극인을 위한 극장 만들어주지 못한 것
다만 아쉬운 것들은 여럿 있다. 가장 먼저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그램을 본의 아니게 그만두게 된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연극 발전을 위한 토대를 미리 직접 만들어주지 못한 것이다. “90년대 초·중반 배우로서 가장 잘 나갈 때, 극단 차이무를 위한 전용극장을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때는 그 생각을 미처 못했습니다. 후배들한테 짐을 떠넘긴 것 같아 미안할 따름이죠. 정부 차원에서 공공적 성격의 극장을 많이 만들어 연극을 지원하는 게 최선일 것 같습니다. 지자체의 문화예술회관을 대학로 극단과 연계해서 쓰는 것도 한 방안이 될 수 있고요. 지금은 연극 한 편을 올려도 극장 배불려주는 일밖에 못 하고 있는 형편이니, 극단과 배우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지요.”

등산 즐기면서 내면적으로 한층 편안하고 성숙해져
요즘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그에게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부드러워지고, 한결 편안해졌다”는 것. 그 역시 만나는 사람들마다 정겹고 반갑다. 등산을 즐긴 뒤부터 생긴 변화다. “2002년 대선이 끝난 뒤 <서울의 달>을 쓴 김운경 작가와 함께 북한산에 갔어요. 2~3번 만에 등산의 매력에 푹 빠졌죠. 일주일에 서너 번 산에 오를 정도였어요. 마음을 다스리는데 등산만한 것이 없더라고요. 노짱 서거 뒤 심란해서 한동안 못 갔는데, 이제 가야죠.”
연기를 바라보는 시각과 자세도 한층 성숙해졌다. 과거 대중과의 거리를 좁히는데 소홀했다면 이젠 적극적으로 관객들을 찾아 나선다. 활동의 폭도 영화뿐 아니라 드라마, 케이블텔레비전 등 넓어졌다. “저를 불러주는 곳이면 어느 작품이든 출연할 생각”이라는 배우 문성근의 제2의 전성기가 조만간 올 것도 같다.

본업은 배우 정치인이 될 생각은 전혀 없어
“참여정부 시절에도 안했는데, 아직도 제게 ‘정치 언제 할 거냐’라고 묻는 분들이 있어요. 제 본업은 배우이고, 시민으로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일 뿐 정치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더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하기를 바랄 뿐이죠. 정치 현실에 참여하는 것은 시민의 책무입니다. 연예인도 당연히 사회 참여 해야죠. 그런데 사회 참여 연예인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은 시민들에게 사회 참여를 하지 못하게 세뇌시키는 행위입니다. 정치인 스스로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죠.”
다만 더 많은 시민과 연예인이 정치에 참여해서 자신의 의사를 피력했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행동하는 양심’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시민의 단결된 힘’을 강조하셨어요. 많은 시민들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일들을 했으면 좋겠어요. 시민사회단체, 특히 언론운동을 하는 조직체를 많이 후원했으면 좋겠어요. 깨어있는 시민으로, 조직된 힘을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글 김미영 | <한겨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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