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쓰는 민주주의
인도네시아의 민주화, 머나먼 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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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 개발 등을 내건 수하르또
단지 학생들만이 간헐적으로 개혁을 압박하였다.
수하르또 독재체제의 붕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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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아쩨의 비극 독립 직후 ‘하나의 국가’를 추구하고 있던 인도네시아 중앙정부는 수마트라섬 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아쩨에 ‘특별자치권’을 약속하고 그들을 통합해냈다. 그러나 자카르타 중앙정부는 약속을 저버렸다. 1967년 수하르또 신질서체제가 시작되면서 다수종족인 자바족을 제외한 나머지 240여 종족의 정체성을 무시하는 중앙정부의 ‘자바화’ 정책은 인구 4백만 명에 석유, 가스 등 풍부한 천연자원을 갖고 있는 아쩨지역을 빈곤의 땅으로 전락시켰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배경 하에서 1976년 아쩨해방운동(GAM)이 인도네시아 공화국으로부터의 분리와 독립국가 건설을 목표로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인도네시아 군부는 게릴라운동 가담자와 그들의 가족 그리고 지지자들에 대한 체포에 나섰다. 1989년 수하르또 군사정부는 아쩨지역을 군사작전지역(DOM)으로 선포하였다. |
아쩨인들의 반란은 아쩨지역의 자율성과 개발을 무시하고 단일한 국가성만을 강조해온 중앙집권주의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리고 수하르또 체제는 석유, 가스, 목재, 여러 광물질 등 인도네시아 국가수입의 11%에 이를 정도였던 아쩨지역의 풍부한 천연자원을 철저히 착취하였다. 천연가스만 보더라도 매년 26억 달러가 재정수입으로 들어갔다. 인도네시아 군의 보호 아래 가스 생산을 하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 액슨모빌도 아쩨인들에게는 제국주의를 상징할 뿐이었다.
개발이 있었지만 영세농민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 없이 이루어졌고 환경파괴를 수반했다. 그리고 통합정책의 일환으로 자바인을 아쩨지역에 무리하게 이주시켰다. 아쩨지역에 새로이 임명되거나 부임하는 관료들은 아쩨인들의 정서를 반영하기보다는 자카르타 중앙정부의 눈치를 보았고 ‘특별자치지역’은 말뿐이었다. 결국 소외와 착취에 대한 아쩨인들의 불만을 등에 업고 시작된 아쩨해방운동(GAM)의 무장투쟁 이후 10만여 명의 아쩨인들이 살해되었다.
수하르또 체제 이후 대중의 정치적 참여가 절정에 이르던 와히드 정부시기에 아쩨인들 역시 희망에 부풀었다. 수하르또 체제 붕괴의 여파로 아쩨인들도 1989년 이래 지속되어 온 군사작전지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98년 8월 7일 주도(州都) 반다아쩨를 방문한 당시 대통령 하비비는 아쩨에서 행해진 지나친 군사작전에 대해 공개 사과하였다. 그는 비정규군을 철수시키고 인권유린 연루자들을 처벌하겠다고 약속하였다. 1998년 9~12월 사이 인도네시아 군이 철수하기 시작하면서 아쩨 민주화를 요구하는 다양한 목소리가 분출하였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동티모르에서와 같은 주민투표 실시를 요구하였다. 아쩨지역 학생들은 아쩨주민투표정보센터를 결성하고 폭력적 상황이 가속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주민들이 독립, 자치, 연방 중 어느 것을 원하는지를 묻는 주민투표안을 제시하였다.
1999년 11월 8일, 반다아쩨에는 주민투표 실시를 요구하는 군중이 2백만 명 이상 모였다.
수하르또 이후의 정치체제 하비비의 뒤를 이어 명실상부하게 출범한 와히드 정부시기의 이른바 ‘민족화해정부’ 노선은 기존의 자바 중심적 국가주의를 혁신한 것이었다. 와히드는 ‘사회적 대화’라고 표현될 수 있는 공개토론회에도 직접 참여하였다. 적극적 노동정책도 시행하였다. 민-군 관계의 재정립을 위해 동티모르 학살의 책임자로 지목되던 군 장성 출신 위란또에 대한 책임 추궁도 시도하였다. 군과 경찰을 분리시키고 경찰을 대통령의 직접적인 관할 하에 두었다. 그러나 와히드의 정치적 화해노선, 민족화해 노선은 일차적으로 군부의 반발에 직면하였다. 기묘하게도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가 시도되면서 폭발물 테러 사건이 유난히 증가하였다. 관공서, 쇼핑센터, 성전, 기타 공공장소에서 폭발물 테러가 발생하면서 와히드 정권의 신뢰도가 추락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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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동티모르가 독립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한 이후 와히드 정부는 분리주의운동, 특히 아쩨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두고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었다. 온건파는 극도로 중앙집권적인 현재의 인도네시아를 연방제로 전환할 것을 제안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은 수까르노 시기의 단일 국가주의자들을 연상케 하는 메가와띠 부통령과 우익 성향의 군부로부터 견제를 받았다. 결국 와히드는 의회에서 최다 의석을 보유하고 있던 민주투쟁당의 메가와띠와 여전히 통제력을 행사하는 군부에 굴복하고 연방제안을 포기하였다.
그의 연방제안 철회는 인도네시아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인종, 언어집단, 역사적 배경, 종교,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법 앞에서 동등한 시민권을 행사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종족사회 공동체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었다.
2001년 7월 와히드의 뒤를 이어 메가와띠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녀는 수하르또와 마찬가지로 ‘인도네시아 단일국가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 흥미롭게도 주요 도시에서 빈발하였던 폭발물 테러가 현저히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반면 메기와띠 정부는 아쩨인들을 지원하는 인권단체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다.
![]() ![]() | 아쩨에 경찰의 활동이 강화되면서 인권침해와 테러가 급증하였다. 군 병력이 다시 배치되기 시작하였다. 2002년에는 3만 2천 명의 병력이 배치되었다. 군 지역사령부가 반다아쩨에 설치되었다. 아쩨에 엄청난 병력이 주둔하게 되면서 자연히 무고하게 희생되는 주민들의 수가 늘어만 갔다. 비사법적 처형 사례도 증가하였다. 인권유린은 대부분 아쩨해방운동(GAM)을 제거하려는 인도네시아 군의 작전 수행과정에서 저질러졌다. 마침내 2003년 5월 19일 메가와띠는 아쩨 분리주의운동과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동티모르 침공 이래 최대 규모의 군사작전에 들어갔다. |
인권단체들은 2004년 4월 총선에 즈음하여 아쩨인들의 인권보장과 자유로운 선거를 위해 계엄령을 철회해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메가와띠 정부는 이를 무시하였다.
군부에 포획된 민주주의
이렇듯 인도네시아에서는 민주화 이행이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과거 권위주의세력과 이 세력들에게 포획된 문민정부가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억압하였다. 지난해에 치러진 인도네시아의 첫 직선제 대통령선거에서 군 장성 출신의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전 안보장관이 메가와띠를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로써 수하르또 시기와 달리 군의 정치·사회적 기능이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인도네시아 민주주의의 앞날은 불안하다. 지진·해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아쩨지역에 대한 외부인의 출입이 자유로워지면서 중앙정부와 아쩨해방운동(GAM) 사이에 평화회담이 재개되었지만 자카르타 중앙정부는 여전히 고압적이다. 때문에 아쩨의 미래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단지 확실한 것은 아쩨에서의 인권지수가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 수준을 가늠하는 대표적인 척도라는 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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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홍> 성공회대 아시아NGO정보센터 부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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