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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쓰는 민주주의
죽산 조봉암의 발자취를 찾다.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작년 대선에서 인혁당 사건이 화제에 오르면서 ‘사법살인’이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했다. 지면상 ‘사법살인’을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불행하게도 인혁당 사건에서 희생된 8명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 전에는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이 있었고, ‘원조’는 바로 1959년 7월 31일, 첫 번째 사법살인의 희생자가 된 죽산 조봉암 선생이었다. 조봉암 선생은 1898년 9월 25일 강화도에서 태어났다. 한반도는 외세의 침략이 잦았지만 그 중에서도 강화도는 상징적 장소였다. 몽골의 침략, 만주족의 침략은 물론 근대에 와서 병인, 신미년에 프랑스와 미국의 침략을 겪고, 결국 강화도 조약으로 일본에 문을 연 장소가 되고 말았다. 또한 강화도는 집..
꽃이 되어 바람이 되어, 인혁당사건 추모전시회 (2012년 4월 8일~5월 13일, 서울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내 12옥사) 박수진_독립큐레이터 1975년 봄, 그해에도 봄꽃은 바람에 꽃 내음과 함께 날아갔을 것이다. 다만 그해 꽃바람엔 비릿한 피 냄새와 함께 8명의 귀한 목숨들도, 민주주의도 바람이 되어 날아갔다. 그렇다. 재판 선고 후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된 ‘인민혁명당(약칭 인혁당)’ 사건 이후 벌써 37번째의 봄이 또 왔다. 인혁당 사건을 짧게나마 정리하면 이렇다. 인혁당 사건은 1964년과 1974년 두 차례 있었다. 1964년의 1차 인혁당 사건은 북한의 지령을 받아 지하당을 조직한 사건으로 조작된 사건이었다. 10년 후, 1974년 4월 유신헌법 반대시위가 일자 중앙정보부는 민주인사들을..
30주기에 다시 바라보는 인혁당의 진실 인혁당 사건은 우리의 굴곡 많은 현대사, 특히 독재권력 시기의 대표적인 비극적 사건 중 하나이다. 1975년 4월 9일, 소위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이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은 지 불과 20여 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하늘도 놀라고 땅도 흐느낄, 당사자에게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희생자들의 가족들에게는 치유될 수 없는 처절한 한과 치 떨리는 분노를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라는 무거운 짐을 새겨 놓은 이 처참한 사건이 발생한 지도 올해로 벌써 만 30년이 되는 셈이다. 그렇지만 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사형수 8명을 포함한 관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