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신동호 (4)
함께쓰는 민주주의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 신동호 이맘때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놓여있는 시점, 월드컵을 치렀고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이 있었으며 우리 곁에 파병문제며 송두율 교수 문제 등으로 들끓고 있는 이시점, 그러나 여전히 본질에는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 냉혹한 시점. 바로 이맘때쯤, 정신없이 시대의 벌판을 지내왔으므로 한번쯤 우리의내면을 돌아보아야 할 때가 아닐는지. 두 해전 나의 뒷덜미를 조르는 한 구절이 있었으니, 우리사회는 서구지식의 도매상이 아닌가? 나의 삶은 잘 포장된 서구의 지식으로 그 서구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해왔던 것은 아닌가? 그런 의문에 휩싸여 있었을 그 즈음. 기독교와 맑스주의는 식민지와 분단을 거쳐오는 동안 우리가 자생적인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타의에 의하여 지니게 딘 모더니티라고..
‘하나’라는 말은 두렵다. 그 ‘하나’에 속하지 않은 입장에서, 혹은 속할 수 없는 입장에서 그 말은 너무나 폭력적이다. 모든 것이 뭉뚱그려져서 ‘하나’가 되면 좋겠지만 세상살이가 어디 그런가. 살림이 복잡해지면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기 마련 아닌가. 그런데 더 여기저기서 자기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럴수록 세상엔 대립이 많아지고 소외되는 사람도 많아진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 ‘하나’라는 말을 아주 쉽게 사용한다. 민족은 민족대로,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대로, 집단은 집단대로, 통일에서도 남북이 ‘하나’가 되는 것을 지상의 과제로 여긴다. 결코 같아질 수 없는 것을 ‘하나’로 만들려니 폭력이 발생하고 억지가 생긴다. ‘하나’가 아니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이 법석을 떨지만 ‘하..
“어쩌다보니”라고. 시대의 가파른 벼랑에서 벗어나본 일 없는 소설가 송기원은 늘 이렇게 말한다. 그는 또 자신처럼 ‘어쩌다’ 운동하게 되었고, ‘어쩌다’ 감옥에 가게 된 그런 이들을 좋아한다. 처음엔 그 말이 그저 심각한 좌중의 분위기를 바꿔놓으려는 심사인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거창하게 말해서 “어쩌다보니”라는 말에는 피할 수 없는 시대의 요구가 있었다. 아니, 이제 그 시대를 지나왔으므로 과거를 먹고 살지 않겠다는 진중한 제스처가 있었다. 또 그 말에는 ‘누구든 그 상황에 처하게 되면…’이라는 민중성이 녹아 있었다. 세상을 읽는 눈은 꼭 과학적 분석을 통해서만 이뤄지지 않는다. 때로 그것은 순간의 깨달음이나 본성적 행동양식으로 나타나곤 한다. 시대와의 불화 또한 그랬다. 70년대의 전태일..
“오금 박힌 무릎으로 짚어간 어둠” - 시인 박정만이 부른 井邑別詞 신동호(시인) 삶과 죽음은 공존해 있다. 보통의 사람들은 삶이라는 바지 주머니에 죽음을 넣고 만지작거리며 다닌다. 아니, 죽음이라는 머나먼 길을 걷다가 두리번거리며 삶이라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흩날릴 뿐이다. 다만 이것을 달의 뒤편처럼 끝내 보지 못하는 게 인생이다. 그러나 그림자를 이끌며 살 듯 죽음을 달고 다니는 이들이 없지 않다. 일생을 두고 삶과 죽음의 화두를 쫓는 이들도 있으나 본의 아니게 찰나의 깨달음으로 다가가 고통스러운 생을 마감하는 이들 또한 늘 존재한다. 위험과 폭력이 난무하던 시대일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예측 불가능한 미래에 노출되기 마련이다. 어쩌면 미래를 보는 일은 고통의 연속일는지 모른다. 만일 과거도 미래도 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