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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쓰는 민주주의
1961년 5월 16일, 젊은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남한 내 진보세력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전쟁과 자유당 정권을 거치면서 교살 직전에 이른 진보적 논의들은 4·19혁명의 열린 공간 속에서 이제 막 기지개를 켜고 활로를 찾고 있던 참이었다. 사회당을 비롯한 혁신세력들은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과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 사회당 외곽조직), 민족통일학생연맹(민통련) 등의 연합조직인 민족자주통일협의회(민자통)를 구성하고 진보적 통일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특히 통민청과 민민청은‘현 단계에서 민족 문제는 전략적으로 상위에 놓인 과제’라는 데 합의하고 통합의 수순을 밟고 있었다. 양대 조직의 가장 급진적인 부분은 민민청의 서도원·도예종·하재완, 통민청의 이재문·우동읍(우홍선)·김배영 등이었다. 이들..
민족경제론 쓰러지다 뇌졸중 환자들은 별다른 계기 없이도 괜히 웃거나 우는 증세를 보인다고 한다. 감정조절 기능에 이상이 생긴 탓이다. 박현채는 우는 쪽이었다. 그가 쓰러진 1993년 여름부터 세상을 떠난 1995년까지 약 2년 동안 그가 흘린 눈물은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흘리기에도 벅찬 분량이었다. 울음은 그의 말이었고 실천이었으며, 박현채가 아직 살아 있음을 알리는 간절한 신호였다. 그는 쓰러지기 얼마 전부터, 오래전 산에서 생사를 같이 했던 ‘동지’들을 생각하며 자주 눈물을 떨궜다. 이미 언어 장애가 오고 있을 때였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알아차린 뒤에도 박현채는 종전의 생활을 바꾸지 않았다. 대학 강의도 그만두지 않았고, 친한 사이가 아니면 입 밖에도 잘 내지 않던 빨치산 시절을 회고록에 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