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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현대 노동자 87년 7.8월 대투쟁의 현장을 찾아서 본문
울산 현대 노동자 87년 7.8월 대투쟁의 현장을 찾아서
김순천
남목 삼거리에 도착했을 때 아직 겨울의 찬기가 가시지 않은 약간 쌀쌀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희미한 오후의 햇살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남목은 남쪽의 말목장이란 뜻이다. 예전에 이곳에 말목장이 있었는데 그것은 중심과 변두리를 가르는 상징적인 고개였다. 1987년 7.8월 현대 노동자들 수만 명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함께 이 남목 고개를 넘었다. 이 고개를 넘어 시내로 향하면 자신들의 여러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면서.
일요일 오후여서인지 현대중공업은 조용했다. 평일에는 2만 5천 여 명이나 되는 노동자들이 조선, 해양, 프랜트, 엔진기계, 전기․전자 시스템, 건설장비로 나뉘어 일을 하고 있다. 남목 고개를 넘으면 현대 자동차가 나온다. 그곳에서도 3만 여명의 노동자가 일을 하고 있다.
남목의 상점들은 대부분 문이 닫혀 있었다. 겨우 찾아들어간 조그만 식당에서 87년 그 당시 투쟁에 참여했던 몇 명의 노동자들을 만났다. 벌써 20여년이 흘렀다. 20대의 힘이 넘치던 그들도 이제 40대 중반이 되었다.
“파업이란 것을 처음 해 본 거예요. 어, 이게 뭐지? 했어요. 그때는 끝이 곧 날거라 생각했어요. 근데 아직도 끝이 안 났어요. 아직도 가고 있어요.” 현대 중공업 노동자이고 ‘울산 노동뉴스’를 만들고 있는 김형균(46세)씨가 말했다. 그 말 속에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노동자들의 지난한 삶과 그 삶에서 터득한 사물을 멀리 바라보는 깊은 시선이 있었다.
가슴 설레이는 첫 파업
현대 중공업 정문은 조용했다. 경비 외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1987년 7월 28일 현대중공업 노동자 대표였던 11인 대책 위원들도 이 정문을 통과 하고 있었다. 현수막을 몰래 몸에 감고서. 지금은 없어진 시계탑 사거리에서 출근하는 노동자들이 볼 수 있게 현수막을 펴서 양쪽 끝을 잡고 서 있었다. 그 현수막에는 ‘어용노조 물러가고 민주노조 쟁취하자’고 쓰여 있었다. 7월 5일 현대엔진이 현대 그룹에서 최초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그 전에 노조를 만들려는 모든 시도는 창업주 정주영 씨의 ‘노조 절대 불가’라는 근대적인 노조관에 의해 무산되었다. 엔진 노조설립에 자극을 받은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조합건설에 나섰다. 그런데 회사에서 먼저 선수를 쳤다. 7월 21일 회사에서 자가용을 받고 상가 운영권 특혜를 받았던 기존의 노사협의회 사람들을 중심으로 로얄 맨션에서 어용노조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어용노조를 인정할 수 없었던 11인 대책위는 곧바로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11인 위원회가 현수막을 들고 공장을 한바퀴 도는데 한두 명씩 따르던 노동자들이 금세 만 명으로 불어났다. 현대 중공업 안에 있는 운동장까지 왔을 때는 1만 7천여 명이 되었다.
그 다음날인 29일은 노동자들이 작업장으로 가지 않고 운동장으로 직접 모였다. 어용노조 퇴진과 상여금 차별지급 폐지, 임금25% 인상을 요구했다. 노동자들의 열기에 당황한 회사에서는 즉각 대답이 왔다. 어용노조 퇴진과 상여금 차별지급 폐지에는 합의하고 임금인상은 차기 노조집행부를 만들어 하기로 했다. 그런데 회사 측은 그 약속을 계속 미뤘다.
8월 6일 정주영 회장이 울산에 내려왔다. 그 소식을 들은 노동자들이 정주영이 있는 곳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경비와 관리자들은 그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노동자들을 막았다. 하지만 그들은 노동자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몸싸움 끝에 노동자들이 운동장으로 가는 길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막았다. 정주영은 하는 수 없이 운동장으로 와서 수만 명의 노동자들 앞에 섰다. 거기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도 수고가 많다. 나도 노조를 만들려면 세계최고의 노조를 만들고 싶다. 대우 잘해 주는’ 굉장히 당황해서 그는 마음에 없던 말을 했던 것이다. 그 후 자신의 앞을 막아서던 노동자들을 고발했고 그들은 다 잡혀가서 구속되었다. 또 그는 오후 4시를 기해 즉각적으로 전면 휴업조치를 단행하였다. 8월 7일에는 기자회견도 가졌다. 그는 지금의 파업은 회사 내부의 문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불순한 의도를 가진 ‘외부세력 선동에 의해’ 노동자들이 넘어간 결과라며 전날 운동장에서와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8월 14일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총선을 실시했다. 99%의 찬성으로 어용노조를 퇴진시키고 노조위원장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었다. 최초로 민주노조위원장이 탄생한 것이다.
8월 17일 총파업- 남목 삼거리
8월 8일 정문 앞 현대 쇼핑센타 3층 예식장에서는 50여명이 모여 ‘현대그룹 노동조합 협의회’가 만들어졌다. 11일, 14일, 17일 3차에 걸쳐 회사가 교섭에 응하지 않으면 17일 12시를 기해 연대 총파업하기로 결의 했다. 회사는 14일 2차 교섭에도 응하지 않았고 정부에서는 도리어 만여 명의 공권력을 상주시켰다. 회사는 그룹 핵심 6개사를 직장 폐쇄시키고 전면적인 휴업조치에 들어간다. 회사가 자연스럽게 파업을 도와준 셈이 된 것이다. 8월 17일 오전 8시 30분. 장대비가 엄청 쏟아지고 있었다. 노동자들이 정문에 도착해 보니 회사에서 밤새 정문을 철구조물로 막아놓았다. 정문에 모였던 노동자들은 망연자실 했다. 그 때 당시 현대 엔진 노조간부였던 오종쇄 씨가 철문으로 올라가 “우리를 현장으로 못 들어가게 하는 거대한 벽을 부수자” 하고 외치자 노동자들이 경비대 창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고 손으로 철구조물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회사에서는 밤새 걸린 작업을 노동자들은 일상적으로 현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이다 보니 요령을 알아서 한 시간도 안 걸릴 정도로 빠르게 떼어버렸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오전 10시, 현장은 지도부가 이끌 상황이 아니었다. 노조협의회는 만든 지 얼마 안 되어 영향력이 미흡했다. 노동자들은 전체 현대 그룹 노동자들이 함께 하는데서 오는 자신감과 자신들의 요구를 해결해 주지 않고 폭력으로 나오는 회사에 대한 저항으로 스스로 움직였던 것이다. 정문, 후문이 있는 거리에서 전경들이 최루탄을 발사했다. 노동자들은 처음으로 최루탄을 마셔보았다. 피를 흘리는 사람이 많았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11시 남
“내가 늘 현장에서 머리 검사나 당하고 뭐 그냥 용접쟁이로 알았다가 아, 뭔가 정부 관료가 오고 우리가 움직이니까 뉴스에도 나오고, 카메라 기자들이 그렇게 많이 온 것은 처음 봤어요. 야, 이거 우리가 힘이 있는 사람들이구나, 우리가 이거를 알았죠.” 김형균씨는 그 당시의 느낌을 이렇게 이야기 했다.
같은 시간에 현대자동차 노동자 8천 여 명도 장대비에도 불구하고 ‘어용노조 물러가라’ 며 사내 행진을 하고 있었다. 모든 공장의 조업이 중단되고 임시총회를 개최했다. “노동자들이 이미 누군가 노조 결성하기를 기다린 것처럼 순식간에 대거 참여해서 많이 놀랐다.”며 현대자동차 전 노조위원장 이상범 씨가 말했다.
8월 18일 파업 이틀째- 공설운동장
중공업, 정공, 중전기, 엔진 등 현대 노동자들이 전날 보다 더 많은 2만 4천여 명이 모였다. 모이자마자 즉각적인 가두시위를 시작했다. 정주영 회장 족벌체제 화형식을 하고 11시 40분 쯤 시내로 나가기 위해 남목으로 갔다. 전날처럼 전경과 대치를 했다. ‘우리는 시내로 나가야 한다. 공설운동장까지만 길을 비켜달라’ 권용목 씨가 도경국장에게 요구했다. 그는 위에서 막으라고 지시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서 어딘가로 전화를 하면서 10분만 기다려 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 날은 숨이 막힐 듯이 더운 날이었다. 바람한 점 없는 날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뜨거운 햇빛에 그대로 서 있었다. 빨리 결정해 달라는 요구에 그는 ‘야, 이 사람아, 내가 어떻게 결정하나 청와대가 결정하지’ 그러면서 또 5분만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전경들이 가로 막으면 그 저지선을 뚫고 가고, 더 물러나서 또 막으면 또 뚫고 가면서 16키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드디어 울산공설운동장에 도착했다. 정말 신나는 투쟁이었다. 그 시각이 오후 4시 25분이었다. 시위대는 6만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공설운동장에는 노동자들과 시민들의 함성과 함성으로 가득 찼다. 노동자들의 열기를 받으며 급박하게 울산시장, 경찰서장, 안기부장, 노동부 차관과 노조협의회 대표들이 만나 협상을 했다. 즉각 민주노조인정, 임금인상 등에 합의했다. 그런데 노동부 차관이 공설운동장에 모인 노동자들에게 대표로 합의안을 발표하는데 무지 떨면서도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려 해서 노동자들에게 야유를 받기도 했다.
“참 겨우 이 정도 가지고 무너진다는 게 이해가 안 되고. 야, 이거 이것이 끝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고 참 이해가 안 되었어요." 김형균 씨는 싸움이 너무 어이없이 끝난 상황이 그 당시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 후 수습대책위가 꾸려지고 임금협상과 지도부 석방을 남긴 채 그 해 여름 긴 투쟁은 끝이 났다.
그 후
비록 승리 하지 못하고 참 슬프게 끝난 싸움이긴 했지만 울산 현대노동자들에게는 많은 것을 남겼다. ‘그냥 좋았다. 목 아프게 고함을 질러도 찡그리는 사람이 없었다. 어깨를 걸며 걸어가는 생면부지의 노동자들이 십 수 년 몸 부대끼며 함께 산 가족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주는 대로, 시키는 대로 하는 무지렁뱅이 근로자가 아니라 새로 태어난 노동자였다’ 정병모씨는 인터넷에 올린 글에서 이렇게 이야기 했다.
이런 체험은 노동자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그 후 128일 투쟁과 골리앗 투쟁에서도 커다란 힘으로 작용한다. 현대노동자들의 투쟁은 부산의 효성중공업으로, 창원의 대우 중공업으로, 광주의 아세아자동차로, 인천 대우 자동차 등으로 전국으로 노동자들의 투쟁을 확산시켰다. 택시, 사무, 전문직, 병원 등 다양한 업종의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글 김순천 | 르포문학, 청계천 사람들 삶의 기록 '마지막 공간'과 세계화 시대 비정규직 사람들의 이야기 '부서진 미래'의 책임저자
사진 황석선 | stonesok1@naver.com
** 이 글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발행한 『그날 그들을 그곳에서』 단행본에 실린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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