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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을 빼닮은 큰 어른, 홍남순 변호사 1 본문

인물/열사 이야기

무등산을 빼닮은 큰 어른, 홍남순 변호사 1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12. 29. 11:17

5·18민중항쟁 26주년을 맞이하는 광주시내에 선거구호가 요란하다. 충장로 우체국 앞에서는 야당대표가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광주시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광주전남지역 대학생들은 ‘광주학살의 후예는 광주를 모욕 말라’라는 펼침막을 들고 그에 맞선다. 여당대표는 금남로에서 목청을 높인다. 지방선거 유세가 불붙은, 정치 1번지로 둔갑한 광주에 ‘5·18은 민중혁명이다! 5월 19일 3백여 명의 택시 기사들이 무등 경기장에 모여 시위에 가담했는데, 그게 결정적이었어. 넝마주이들이 총을 들고 싸웠고. 황금동, 대인동에 있는 술집 아가씨들이 시민군들에게 밥과 술을 줬어. 참, 민중의 힘이 대단했어.’ 라고 외치는 늙은 목소리가 있다. 항쟁기간 시민군들이 죽어나갔던, 총탄자국이 선명했던 옛 YWCA건물이 사라졌듯 이즈음 그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69세 노인, 광주항쟁 수괴로 몰리다

보안대 수사관은 “간첩도 내 손에서 5일이면 끝났는데, 네놈은 70일이 걸렸다. 오늘 내 손에 죽어봐라.” 라며 각목을 홍남순의 다리 사이에 끼우고 무릎을 꿇린 채 자근자근 짓밟았다. “영감, 민주주의 좋아하네. 이 각목 하나로 민주인사들 다 굴복시켰어. 당신들이 좋아하는 민주주의는 없어!” “할 말 다 했으니 마음대로 해!”
홍남순은 비명을 질렀고 반백이던 머리칼이 어느새 백발로 변했다. 수사관들은 김대중내란음모사건과 홍남순을 엮으려고 미쳐 날뛰었다.


 ‘학생소요를 일으키는 대가로 배후세력인 김대중에게 얼마의 자금을 받았나? 그 돈을 누구에게 전했나? 전남대 학생회장에게 주었나?’ 5명이 돌아가면서 잠을 안 재우고 끊임없이 질문을 되풀이했다.
“6·25때 적 치하에서도 동조하지 않는다고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긴 사람이다. 그런 나를 공산당으로 몰려하다니 처음부터 각본을 다시 짜라. 군법무관으로 수사를 담당했던 나다.” 홍남순은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이라는 각본을 짜놓고 거기에 끼워 맞추려는 검찰관에게 수사를 제대로 하라고 호통을 쳤다. 69세 홍남순은 팬티만 입고 고문을 받았다. 시멘트 바닥인 지하실에서 모포 한 장 없이 떨면서 잠을 청했다. 밤마다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헌병대 영창 마당에서는 전봇대처럼 큰 통나무를 젊은이들과 함께 들고 ‘우로 어깨, 좌로 어깨’라는 구령에 따라 봉체조를 감당하기까지 했다. 그에게 들씌운 죄목인 ‘무기회수 방해죄’ ‘학생교사죄’ ‘정부전복기도’를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어린 너희들에게 맞아죽느니 할 말이나 당당히 하고 가자’라는 오기가 생겼다.

“이 나이에 고문을 받고 어찌 살겠나.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 차라리 나를 충장로 네거리에 이대로 끌고 가서 총으로 쏴 죽여라. 그러면 광주시민들이 불쌍하다고 동정이나마 해줄 거다. 아무도 없는 지하실에서 맞아죽기는 싫다. 제발 내가 원하는 대로 죽여 달라.”
가족들은 홍남순이 감옥에서 생을 마치지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그는 그 안에서도 자신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고통을 피눈물로 지켜본 셋째 아들 기섭(52)은 말한다.

“5·18로 잡혀간 사람들 대부분은 고문을 받고 강압에 굴복해서 수사관들이 작성한 조서에 그대로 지장을 찍었지만, 아버지는 버텼다. 모진 협박과 고문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지장을 안 찍었다. 수사관들은 홍남순을 5·18의 수괴로 몰려고 했건만 끝내 실패했다. 이 사람, 저 사람과 맞추려고 몇 달을 시간을 끌었어도 홍남순을 수괴로 만들지 못했다.”

갓 쓰고 도포 입은 선비, 군부독재에 저항하다

어느 날 편지봉투에서 떼어낸 우표를 홍남순은 물에 씻어서 말렸다. 무엇하냐는 아들 기섭의 물음에 그는 다시 쓰려고 그런다고 답했다. 그때까지 홍남순은 헌 우표를 다시 쓸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살았다.
“아버지는 돈을 모르는 분이었습니다. 돈을 축적하는 것을 부정한 것으로 알았죠. 집에 죽이 끓는지 쌀이 있는지도 모르셨고 도무지 경제 감각이 없었습니다. 명색이 판사 부인이라는 어머니가 바느질하고 돼지 키워서 자식들을 키웠습니다. 반독재 투쟁에 앞장서니까, 사건이 들어올 리 없죠. 안기부, 경찰이 집에서 진을 치니 누가 사건을 맡기겠습니까? 전기세, 식량까지 걱정하며 살았습니다.”


아들 기섭의 말대로 홍남순이 쓰러지고 나서 확인한 통장에는 잔고가 100만 원이 안 되었다. 홍남순은 사무실에 걸어놓은 시궁절내현(時窮節乃見, 궁할 때 그 사람의 절제된 삶을 알 수 있다.) 이라는 송나라 말 재상이자 문장가인 문천상이 좌우명으로 삼은 글귀를 평생 마음속에 두고 살았다. “조선 500년을 통치하고 유지하며 견인차 역할을 하고 그 밑바닥이 되어 소금노릇을 한 것이 이른 바 ‘선비정신’이다. 선비는 낮이면 밭에서 일하고 밤이 되거나 비가 오면 글을 읽고 쓰며 도학을 연구하고, 아무리 배가 고프고 주려도 도덕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또한 선비는 자기 자식뿐만이 아니라 후학, 후생들을 자기 자식처럼 돌봄으로써 사회를 교화시키고 이끌어 나간다.”


 

광주민주화유공자 보상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그의 선비 정신은 한결같았다. 홍남순은 자신이 말한 대로 ‘시민의 도리를 다했을 뿐이지, 보상을 받으려고 한 행동이 아니다’라고 거절했다.

5·18 때 수사관들이 궁동 집에서 수첩을 찾아냈다. 변호사 사무실의 수입과 지출을 적은 장부였다. 수사관들은 탈세나 비리 사실을 캐내려고 샅샅이 조사했으나 아무런 꼬투리를 잡지 못했다. 그러자 사무장인 정광진(65)을 두들겨 팼다. “변호사님 댁을 여러 차례 수색한 것으로 안다. 그 낡은 집에 텔레비전 한 대가 있던가? 양심수 변론하는 분이 무슨 비리가 있겠나?” 사무장 정광진은 엉덩이 살이 뭉개지도록 68일이나 고문을 받으면서도 홍남순이 비리가 없음을 주장했다. 결국 270건을 뒤지고도 비리를 못 찾아낸 수사관들은 홍남순의 깨끗함에 탄복하고 말았다.

젊은 날에는 광주 시내 사진관에 홍남순의 잘 생긴 얼굴사진이 안 걸린 데가 없었다.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과 목숨을 걸고 싸운 그이지만 선비답게 풍류를 즐길 줄 알았다. 젊은이들과 술도 마시고 시조도 부르고 서화와 고서를 사랑했다. 5·18 때 수감되자 가장 걱정 된 것이 자식들의 학비였다. 헌데도 홍남순은 그림을 파는 대신 집을 처분해서 학비를 마련하라고 하였다.

홍남순은 태권도 유단자이기도 하다. 막내아들 영욱(46)은 어린 날을 떠올린다.
“3선개헌 반대로 나라가 떠들썩할 무렵인데, 아버지가 경찰 곤봉에 맞으면서도 데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연세 많으신 아버지는 ‘경찰이 곤봉으로 배때기를 쑤시면 창자가 끊어질 듯하다’고 그 아픔을 표현했죠. 회갑 때부터 아버지는 경찰에 맞서기 위해 태권도를 배우셨습니다.”

내란죄로 몰려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군대 영창에서도 홍남순은 선비의 여유를 잃지 않았다. 수사관들이 작성한 조서에 지장을 찍어주고 불안에 떠는 송기숙을 부른 그는 느닷없이 주간지 『선데이서울』을 펼쳐 보였다. 여자들 사진을 가리키며 그 가운데 예쁜 여자를 한 명 고르라고 했다. 송기숙은 속으로 홍남순이 실성했나 의심을 했다.

정신이 나가기는커녕 홍남순은 자기는 한 명 골라놨다고 어린 애처럼 좋아했다. 송기숙은 기가 막혔지만 어른이 시키는 대로 아무 여자나 짚었다. 그러자 홍남순은 기겁하며 그건 자기 것이라고 송기숙의 손을 내쳤다. 그 와중에도 송기숙은 한 여자를 두고 홍남순과 실갱이를 벌이며 군대 영창에서의 지옥 같은 나날을 견뎌낼 수 있었다. 지금도 박석무(64)는 용기를 잃지 말고 힘을 북돋워주던 그를 잊지 못한다.


“5·18 이후, 어느 초봄이었다. 행사를 하려고 궁동 집에 찾아갔다가 나오는 길이었다. 대문까지 나와서 작별인사를 하던 어른께서 손바닥만한 화단에 앉았다. 거기에는 얼음이 얼었는데도 작약 싹이 나와 있었다. ‘야, 이것 보라. 추위가 덜 가셨는데도 싹이 나와부렀네. 아무리 겨울이 길어도 봄은 와부러. 민주주의는 온다 이거여. 긍께, 우리 걱정 말로 열심히 하세.’ 그 목소리가 청년 저리가라였다.”

 

민주주의 사랑방, 궁동 15번지

광주시 궁동 15번지 은행나무집, 민주주의의 대법정
굳게 잠궈진 철문이 싫어서
항상 대문을 열어놓은

여기는, 광주시 궁동 십오번지
한국의 민주주의가 숨쉬는 곳이다
근대화된 집들이 좌우로 키가 커가도
납작하게 엎드린 한옥 한 채……
<문병란의 시, 취영송(翠英頌)중에서>



 홍남순의 집은 5·18민주화운동의 산실이었다. 구속자가족협의회 회장을 지낸 안성례(66) 씨는 “우리가 다른 곳에서 만나면 정보과 형사들이나 안기부원들이 구속자가족들의 동태를 살핀다. 하지만 홍 변호사님의 사무실이자 집인 궁동 15번지에 모이면 감히 우리를 건드리지 못했다. 덕분에 우리는 가족들 석방 문제, 유가족 문제, 부상자 문제를 마음 놓고 의논할 수 있었다.”고 신세를 졌음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그 낡은 한옥은 광주시민들에게는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사랑방이었다.




1981년 9월 전두환이 광주를 방문했을 때 시위를 했던 구속자 가족을 폭행했던 형사는 날마다 궁동 집에 와서 빌어야했다. 사무장 정광진이 고소장을 쓰자 형사는 소를 취하해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홍남순이 홍성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집주인이 집을 비웠음에도 광주시민들은 궁동 15번지를 안방처럼 드나들었다. 50년도 더 된 궁동 집이 팔릴 뻔 했던 적이 있었다. 병원을 짓겠다는 건설회사가 비싼 값에 사들이겠다는 거였다. 아내 윤이정과 자식들은 팔아버리고 편안한 집에서 살자고 했지만 홍남순은 여기서 살다가 죽겠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런 궁동 15번지의 주인을 광주시민들은 사랑했다.

홍남순이 복권되기 전이었다. 화순에서 온 친지 한 사람이 쌀 한 가마니를 짊어지고 택시를 탔다. 궁동 15번지 은행나무집으로 가자고 하자 어떻게 그걸 혼자 들고 가냐고 택시 기사가 물었다. 그가 ‘홍남순 변호사한테 가져간다. 변호사 일도 못해 밥벌이를 못하고 있으니 두고 볼 수 없지 않나’라고 하자 택시기사가 쌀을 내려주고 차비를 안 받고 그냥 떠났다.

비록 어렵게 살았어도 홍남순의 궁동 집은 평생 사람과 인정만큼은 넘쳐났다. 그리고 셋째아들 기섭은 궁동 15번지가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보존되기를 바란다. 전남도청이나 남동성당처럼 말이다.

 


* 글 윤동수
1960년생
1990년 사상문예운동 겨울호에 「새벽길」 발표
2003년 평전 『윤상원』 발간
2005년 작품집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강 출판사) 발간

* 사진 제공 홍남순 변호사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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