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인물/칼럼/인터뷰/문화초대석 (150)
함께쓰는 민주주의
숲은 동·식물뿐만 아니라 사람까지 키워왔다. 바람이 지나갔고 햇살이 모여들고 계류가 흘렀으며 꽃들이 피어났고, 나무들은 늙어갔다. 봄이면 그곳에서 더덕을 캤고 삼지구엽초(음양곽) 꽃을 구경하였으며 수리취를 뜯었다. 언 강이 따듯하게 녹아 흐르고 낮은 자리에서 숨죽이며 제 부피를 키우고 있던 여리디여린 싹들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면 깜깜하던 산과 들은 눈 깜짝할 사이 초록의 눈부신 세상으로 돌변하였다. 길고 길었던 삭풍의 겨울은 옛말이 되었고, 큰 산에 곰처럼 쌓여 엎드려 있던 눈더미들은 아름다운 물무늬로 바뀌면서 강을 건너 바다로 흘러갔다. 숲의 기억 닫혔던 창문을 열어젖뜨리는 그날부터 누구든 발탄 강아지처럼 숲으로, 숲에서 나무와 풀과 꽃들을 만나러 나서곤 했다. 지망지망 걸으면 만나지 못할 보랏빛, ..
얼마 전 KBS 은 태국의 쿠데타를 집중취재해 방영했습니다. 방송내용도 좋았지만 누가 재수 좋게 마침 쿠데타가 일어나던 저 때 태국에 있었을까 했습니다. 방송 마지막에 제작진 자막이 오를 때 박종우라는 이름이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역시나!”했습니다. 2004년 쓰나미가 덮칠 당시에도 현장에 있었던 그는 참 사진가로서는 억세게도 재수가 좋다고 밖에 할 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해 250일이 넘게 해외에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고 있는 그에게 조금 더 많은 기회가 부여됐는지도 모릅니다. 다큐멘터리사진가 박종우는 한국의 많은 사진가들 중에 특별한 존재입니다. 잡지나 전시장에서 보다는 TV에서 더 많이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그의 어깨에는 사진용 카메라와 함께 방송용 HD카메라가 걸려있습니다. 사진..
저는 어린 시절 서울의 변두리에서 자랐습니다. 변두리라고 해야 동대문에서 10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았지만 이 곳에 미군부대가 있었습니다. 우리 집은 이 기지 앞에 있었는데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살았던 동네였죠. 당시는 미군이 주인이었고 주변에 사는 우리 동네 사람들이 손님이었습니다. 어른들은 쉬쉬했지만 우리 동네에는 미군들을 상대하는 아가씨가 많았습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 여성들과 미군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과 나는 함께 자랐죠. 남자 아이, 여자 아이, 피부가 하얀 아이, 검은 아이 등 다양했습니다. 하지만 그 미군부대는 제가 초등학교를 입학할 무렵 사라졌습니다. 미군들도 본국으로 돌아가고, 운 좋은 여자들은 혼혈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도 아니면 아이들의 손목을 잡고 어디론..
크지 않은 키에 단단한 체구, 턱수염은 덥수룩하고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는 녹녹치 않은 눈매를 지닌 사진가 류은규(45) 씨. 그가 건넨 명함에는 한자가 빽빽합니다. 남경시각예술학원 사진학과 교수. 교수님 스타일도 아니지만(!) 게다가 중국에서 사진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 하지만 저나 한국 사진계에서는 중국 동북지역의 조선족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더 알려져 있습니다. 몇 해 전 김좌진 장군의 딸 등을 찾아내 사진과 구술을 기록, 국내에 알림으로서 잃어버린 역사의 고리를 이어준 사람이기도 합니다. 제가 한국의 많지도 않은 다큐멘터리 사진가 중에서 류 씨를 주목한 것은 좀 남다른 사진가로서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류 씨는 1993년 중국에서 본격적인 작업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가 처음으로 ..
지난 15년 동안 다큐멘터리 사진을 하면서 많은 주변 사진가들에게 자극을 받았습니다. 사진을 시작하던 초기에는 선배 사진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받았고, 사진이 조금 지겨워지던 시기부터는 후배 사진가들에게 자극을 받았습니다. 그런 후배 사진가 중에 정규현 씨가 있습니다. 프랑스의 그랑제콜인 국립장식미술학교에서 포토저널리즘을 전공한 정 씨는 코소보 전쟁을 비롯해 북한의 탈북자 문제까지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다큐 사진을 제작했습니다. 그 사진들은 우리가 알만한 매체인 과 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원래는 에 실리기로 했던 기사가 정치적인 문제로 제외됐습니다. 처음에는 내 사진이 모자라 그런 것인가 낙담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편집장이 뻬르삐뇽 사진페스티벌(세계적인 포토저널리즘-다큐멘터리사진 페스티벌)에 30장을 ..
우리가 주변에서 가장 많은 사진을 접하는 매체는 신문이 아닐까 합니다. 매일 배달되는 신문 1부에는 수십 장의 사진이 담겨있으며 사진 한 장 한 장에는 꽤 의미있는 정보들이 들어있습니다. 이 사진을 찍고 있는 사진기자들은 전국적으로 수백 명에 달하며 매일 어디에선가 우리 사회의 기록해야할 현장을 뛰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모두 사진가라고 부르기에는 힘든 면이 있습니다. 사진계에서 ‘이 사진은 꼭 신문사진 같다’고 하면 꽤 모욕적인 평으로 받아들입니다. 신문사진의 과도한 정형성과 판에 박힌 앵글감 등은 사진이 갖는 정보성 외에 실험성과 창작성이 현격히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문사진계에는 전통처럼 예술성이 뛰어난 이들이 존재했습니다. 정범태, 강운구, 주명덕, 김녕만 같은 이들이 바로 신문 사진기..
문학판에는 ‘구라’가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입담 좋은 소설가 황석영 씨가 ‘황구라’로 통합니다. 사진판에도 구라들이 있습니다. 충무로나 인사동의 포장마차에서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소주잔을 비울라치면 이런 구라들이 빛을 발합니다. 우리나라 구석구석 가보지 않은 곳이 없다는 사람, 내 손길 닿지 않은 문화유산이 없다고 허풍 치는 사람들로 떠들썩합니다. 그 때 조용한 소리로 “그런데 말이야…….”하며 끼어들어 “그곳은 말이야,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낙동정맥을 따라서……. 백병산·백령산·주왕산·주사산·운주산·사룡산·단석산·가지산·취서산·원적산·금정산·몰운대로 이어지고 그 줄기는 낙동강 동쪽에 위치하는데, 그 산줄기의 동쪽으로 울진·영덕·포항·경주·울산·부산이 나오고, 서쪽으로는 태백·봉화·영양·청동·영천·경..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은 격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표면적인 것이 아닌 내면적인 변화를 원합니다.” 다큐멘터리 사진가 안세홍(37)의 사진에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중심에 있다. 청년기부터 꾸준히 작업해 온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작업은 어느새 10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할머니들을 처음 찍을 때 많이 망설였습니다. 찍고 나면 도무지 동네 할머니들과 구별이 안 되는 거예요.” 그는 할머니들을 찍으면서 차츰 일본·성노예·사회적인 문제 등에서 할머니들의 개인적인 내면을 바라보게 되었다. 드러나지 않는 슬픔과 개인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할머니들을 텍스트 없이도 이해시킬 수 있는 이미지 작업이 필요했다. “나와 피사체 사이에 아무 것도 없이 바로 투사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물론 그 사..
다큐멘터리 사진가 김문호(50) 씨는 독특한 느낌을 주는 사람입니다.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강렬함이나 터프함 대신에 도인(?) 또는 선비적인 풍모를 가졌기에 그렇습니다. 몇 마디만 나눠 봐도 사진 이야기보다는 세상 살아가는 올바른 길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가 정말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궁금해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본다면 『성숙에 이르는 명상』, 『바보들, 순교자들, 반역자들』, 『바드샤 칸(비폭력적인 이슬람 전사)』, 『신의 전기』, 『비노바 바베』, 『평화의 미래』, 『관』 등 인문학 책들의 전문 번역자임을 알게 됩니다. “1983년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했고, 번역 일을 하면서 사진을 취미로 시작했다. 사진을 시작한 처음부터 사람들을 찍었다. 애당초부터 풍경이라든가 꽃이나..
나이 들어 사회생활을 하다가 만난 사람을 동료 또는 선후배로 10여 년 넘게 가깝게 지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사진판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 성남훈이 그런 경우입니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에서 만난 후로 동료로서 선배 사진가로서 그는 저뿐 아니라 많은 사진가들의 귀감이 된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남훈이 프랑스에서 사진을 시작한 후 15년의 긴 장정 끝에 내놓는 이번 사진은 특별합니다. 1990년대 초반 프랑스에서 취재한 루마니아 집시들의 사진으로 서울에 있던 에서 개인전을 했을 때만 해도 그를 알지 못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세계적인 포토저널리즘 콘테스트인 수상작 작품집(1994년)을 통해 그의 이름을 접하고는 ‘아! 우리나라 작가 중에도 해외에서 다큐 작업을 하는 사람이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