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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쓰는 민주주의
청춘을 타전함 -안현미 시집 『곰곰』 글 | 서효인 humanlover@naver.com 청춘의 시기에 우리는 민주주의를 논하고, 인권과 평등을 생각해야 한다. 젊은이라면 무릇 더 나은 사회를 바라고, 더 좋은 공동체를 꿈꾸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외면하고 싶은 일이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우리’ 혹은 ‘타자’와의 만남에 고개를 돌리고 있다. 강이 파헤쳐지는 모습이나 제주 해안의 수만 년 된 바위가 파괴되는 일은 결코 ‘나의 일’이 아니다. 용산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어도, 쌍용차 해고 노동자가 22명 죽었어도, 우리들 청춘은 ‘나만 아니면’ 된다. 무섭지 않은가. 나는 무섭다. 우리는 사회 시스템에 의해 심하게 휘둘렸다. 1970~80년대에 태어나서 IMF를 축으로 성인이 된 자들..
비극적 서정의 전위로, 그리고 강정으로 -황지우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글 서효인 시인 humanlover@naver.com 역사는 발전하는가. 시는 질문에 답하는 장르가 아니다. 질문을 던지는 장르이다. 1983년 신군부가 열어놓은 컬러의 시대에 황지우 시인은 말했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시인은 세상을 뜨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이기 이전에 우리 모두는 사람이고, 세상을 뜨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다. 우리 발붙일 곳은 결국 암석과 바다이다. 그들은 몇 만 년의 격동을 끈질기게 버티고 살아온 지구의 진정한 주인일지 모른다. 오늘 우리는 그들을 밟고 서 있을 면목이 없다. 우리는 살아 있어서, 우리가 살아 있기에, 우리는 그것들을 파괴한다. 우리가 세상을 가볍게 뜰 수 있는 새였다면,..
당신과 나는 모두 사람이었다. -이시영 시집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글 서효인 humanlover@naver.com 40년을 넘게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차마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다. 이시영 시인은 1969년 등단했고,『만월』을 비롯하여 끊임없이 시를 쓰고, 시와 함께 살고, 웃고 울었다. 그리고 2012년 새 시집을 내었다. 시집의 제목은『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이다. 다소 비(非)서정적이고, 단도직입적이며, 느와르적이기도 한 제목의 시집을 꺼내본다. 1989년 겨울 벨기에제 수갑 차고 두 팔이 오라에 묶인 채 검찰청 조사 받으러 다닐 때 그 여자 다니던 무역회사 사무실이 바로 옆에 있었네. 호송버스가 검찰청사 어둑한 구치감으로 미끄러져들어가기 전에,..
아프고 슬픈 그래서 아름다운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글 /서효인(시인, humanlover@naver.com) 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 2000년대로 접어들고 다시 10년이 훌쩍 넘어서야 1987년의 뒤풀이가 끝나가고 있다고 말한다면, 과장일까. 아님 엄살일지도 모르겠다. 여기 시대의 폭력을 글의 엄살로 풀어낸 시인이 있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그의 엄살을 그로테스크 시학이라 이름 붙였다. 모든 아픔은 그로테스크하고, 그런 엽기성은 이제야 제 모습을 완연히 드러내고 있다. 어쩌면 시인은 지나가고 또한 흘러올 시대에 대한 응답으로 시를 택했을지 모르겠다. 그만큼 그의 시는 아프다. 어둡다. 슬프다. 그리고 아름답다. 시인이 시대에 부딪히는 방식에는 딱히 정답이 없다. 강고하고 악독한 시대에도 사람..
이 무거운 물음에 답할 수 있겠는가 글 /서효인(시인, humanlover@naver.com) -송경동 시집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참으로 안타깝지 아니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지금 한창 작품 활동을 하고 있으며, 게다가 젊은 시인을 에 소개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은 처참하고 비루하다. 쓰디쓴 통탄으로 감히 시인에 대해서 말한다. 시인은 지금 수감 중이고, 얼마 전 그에 대한 구속적부심은 기각되었다. 그는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고, 도주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사법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 된다. 그는 희망버스를 기획했고, 희망버스에 같이 탔다. 시민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시를 썼고, 올해 ‘신동엽창작상’을 수상했다. 그의 이름은 송경동이다. 그의 별명은 울보다. 그는 아마도 말도 ..
김지하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 글 /서효인(시인, humanlover@naver.com) 여기 선거로 뽑은 대표자가 있다. 여기 선거로 뽑힌 자들이 나라를 대표해 모이는 건물이 있다. 지붕이 둥그런 건물에 모여 의사결정을 하는 자들이 있다. 의사봉을 두드리는 사내가 있고 그것을 막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결정에 의해서 혹은 욕망에 의해서 우리가 사는 이 땅의 시스템은 결정된다. 시스템은 우리의 삶을 결정할 것이다.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방법은 다시 돌아오는 선거에서 한 표 던지는 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두고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어떤 측에서는 자유민주주의라고도 하고, 어떤 측에서는 대의민주주의라고도 한다. 어쨌든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음에 큰 의심을 품고 있진..
곽재구 시집, "沙平驛에서" 글 서효인 (시인, humanlover@naver.com) 청년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청년은 시대에 물드는 리트머스다. 청년은 어리둥절한 표정이며, 대합실 구석에 서 있는 객(客)이다. 그곳은 아마도 사평역. 곽재구 시인에 의해 세상에 나온 사평역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곽재구 시인의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사평역은 같은 이유로 세상 모든 청년이 발붙이고 있어야 할 쓸쓸하고 눈 시린 공간이 되었다. 사평역은 어디에도 없다. 아니다. 사평역은 어디에든 있다. 곽재구 시인은 1981년 「沙平驛에서」로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보통 신춘문예 마감일을 따져보면, 시인이 시 원고를 우편함에 넣은 시기는 대략 전해 11월 정도일 것이다. 1980년 겨..
신경림 시집, '농무' 글/서효인 (시인, humanlover@naver.com) 한때 이 땅의 모든 사람이 흙으로부터 비롯되던 날이 있었다. 불과 50년이 지나지 않은 날이다. 그때 우리 대부분은 해보다 먼저 일어나 새벽이슬과 함께 논과 밭으로 나갔다. 그리고 땅을 일구며 땅에 기댄 채 땅에 의해서 살아갔다. 하지만 그들은 가난했고, 가난을 탈출하기 위하여 부드러운 땅이 아닌, 단단한 아스팔트 위로 올라야 했다. 맨손과 맨몸뿐인 천둥벌거숭이가 되어 그들은 도시로, 서울로, 서울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곳으로 모이고 모였다. 불과 50년이 되지 않은 이야기다. 신경림의 농무는 농촌의 이야기다. 가난의 서사이고, 떠남의 서정이다. 농촌은 우리 대부분의 고향이지만 그들 대부분은 이제 농촌에 살지 않는다. 농..
단단하게, 더 단단하게 "김정환 시집 1980~1999", 이론과실천, 1999 서효인_ 시인/humanlover@naver.com 시집의 고집 이 시집은 괴물 같은 시집이다. 이런 시집은 본 적이 없다. 블록버스터 영화 광고카피에나 어울릴 법한 수식어를 붙인다. "김정환 시집 19980~1999"(이하 시집)에 관한 이야기다. 시인 김정환은 다작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폭포처럼 쏟아진다는 비유로 표현되고는 한다. 하지만 비유는 비유일 뿐, 시원한 물처럼 장대하게 떨어지는 시의 폭포를 기대하면 오산이다. 오히려 그의 언어는 서서히 깎이거나 자라서 거대한 풍경이 되는 모래를 닮았다. 씹어 읽을수록 입안이 서걱서걱해진다. 언젠가 바다였다는 사막이나, 언젠가는 늪지였을 산맥처럼 시인과 시는 퇴첩(堆疊)되어 ..
버스 정비공의 시를 희망으로 더듬는다 박노해, 『노동의 새벽』 글· 서효인 시인/humanlover@naver.com 어느덧 서점에서 박노해의 첫 시집을 구하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스마트폰으로 알아본 정보로는 영등포에 있는 거대 쇼핑몰 안, 대형서점에 단 한 권이 구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위치의 『노동의 새벽』이었다. 한국현대사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쳤으며, 시집 자체가 ‘몸의 전위’였던 책을 구하기 위해, 휘황찬란한 쇼핑몰까지 찾아가야 하는 이유는 의외로 명료하다. 동네서점이 몽땅 망했기 때문이다. 영등포의 쇼핑몰은 거대한 괴물의 입 같았다. 원을 중심으로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내리는 인파는 혼곤했다. 백화점과 쇼핑몰 근처에서는 사창가의 여성들이 매달아 놓은 현수막이 반쯤 찢어진 채 비를 맞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