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민주화운동이야기 (85)
함께쓰는 민주주의
어디에나 일 잘하는 막내들이 있다. 글 이경은 / kayklee@empas.com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구가협(구속자가족협의회)의 탄생 1974년 4월의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인혁당재건위(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 사건만으로 1,034명이 검거되어 183명이 비상군법회의에서 인혁당계 23명 중 8명이 사형을, 민청학련 주모자급은 무기징역을, 그리고 나머지 피고인들은 최고 징역 20년에서 집행유예까지를 각각 선고받았다. 이 사건에서 변호사 강신옥은 "피고인석에서 그들과 같이 재판을 받고 싶은 심정"이라는 요지로 변론을 하다가 세계 사법사상 처음으로 변론 중인 변호사가 법정에서 구속되는 사례를 남겼다. 1974년 4월 3일 민청학련사건이 발표되고, 밤 10시를 기해 공포한 긴급조치 4호는..
구로공단 역사박물관의 '중심'잡기 글 장남수/ jnsoo711@hanmail.net 그 방은 ‘쪽방’, 또는 ‘벌통집’이라 불렸다. 구로공단에서 민주노조를 결성한 죄로 1980년, 계엄사에서 고초를 겪고 해고당한 배옥병 전 (주)서통 노조위원장은 그 ‘쪽방’의 기억이 생생하다. 1970년대 구로2공단의 (주)서통 노동자였던 배옥병이 살았던 방도 마치 벌집이나 마늘쪽처럼 한 대문 안에 열세개의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화장실은 딱 한 개, 아침마다 치열한 확보전이 벌어지는 공간이었다. 대문이랄 것도 없는 입구로 들어가면 방 하나, 연탄아궁이 하나, 다락 하나 딸린 작은 방들이 나란히 있고 숨 쉬는 것까지 옆방에 다 들리는 생활공간이었다. 그래도 그 작은 방은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노동자들에게는 부럽고 아..
전태일의 흔적 따라, 길을 걷다. 글 장남수/ jnsoo711@hanmail.net 밤새 내린 비로 고속도로는 젖어있었다. 전태일! 그가 살았던 흔적을 따라 나선 오월, 비에 젖은 신록은 연둣빛으로 고왔다. 전태일기념재단의 12인승 승합차에 가득 끼어 앉은 전태일의 후예들은, 노동자의 자긍으로 부활한 선배가 나고 자란 땅을 밟는다는 사실에 살짝 흥분되어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박계현 사무총장도 호흡을 조절하며 비오는 고속도로를 달렸을 것이다. 서울을 벗어나면서부터는 다행히 비는 잦아들기 시작했고, 대구에 도착했을 때는 걷기 좋은 날씨였다. 전태일이 태어난 동산동 311번지 일대는 은행나무가 들어 찬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공원입구에는 ‘바르게 살자’ 라는 표지석이 버티고 있었다. ‘바르게’ 사는 ..
놓지 않는 ‘생각’, 노동이 빛나는 꿈 - 원풍노조 손선례 씨 - 글 장남수/ jnsoo711@hanmail.net “나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 집의 일꾼이었어요. 열여덟 살까지 내 등에는 동생들이 번갈아 업혀있었고 빨래, 청소, 아버지 리어카 잡아주고 밭일에 나뭇단 정리……” 손선례(1959년생)의 일은 끝이 없었다. 오재미니, 고무줄놀이니, 그런 건 하나도 못했다. 늘 등에 애가 업혀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놀고 싶어 잠시 아기를 내려놓고 뛰었더니 그새 애가 흙이랑 뭘 집어 먹고 캑캑 거려 들쳐 업고 뛰어야 했다. 아버지의 아들 욕심에 딸이 여섯, 막내로 아들 하나가 나올 때 까지 줄줄이 여섯 동생이 그녀의 등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매일 욕하고 소리 지르는 사람이었다. 공책이 다 떨어져 가면 심장이 벌렁..
[내가 만난 80년대]급진, 분열, 고립, 5․3인천 글 송동현/easthill@gmail.com 1985년 2월 12일 총선에서 급조된 야당인 신민당은 돌풍을 일으키며 국민들의 민주화의 열망을 모아 승리하였다. 김대중, 김영삼 양김씨가 주도하는 신민당은 총선 승리 1주년이 되는 1986년 2월 12일 전격적으로 1,000만 개헌서명운동에 돌입하면서 다가오는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해 3월 11일부터 시작된 지역별 지부 결성대회와 개헌 현판식은 3월 30일 30만 명이 모인 광주 집회와 4월 19일 10만 명이 모인 대전 집회 등의 군중시위와 개신교, 천주교, 대학교수 등의 시국선언으로 이어지면서 어떠한 사태로 이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특히 5월 3일 ..
한국사회의 ‘꼽추’들, 종탑위에 오르다. - 재능교육 노동자, 오수영, 여민희씨 - 글 장남수/ jnsoo711@hanmail.net “미워 미워 미워……” 카카오톡 화면에는 열다섯 번의 ‘미워’와 화난표정 이모티콘이 떴다. 엄마에게 그렇게 카톡을 날린 후 아홉 살 아들은 엉엉 울었다고 했다. 오수영 씨는 설 명절을 며칠 앞둔 지난 2월6일 아침, 편지 한 통을 적어두고 집을 나섰다. 회사와의 싸움을 시작한 지 1875일째 되는 날이었다. 철벽같이 버티고 서서 꿈쩍을 하지 않는 싸움에 돌파구를 찾아야했다. 재능교육본사와 정면으로 마주 서 있는 혜화동성당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온 몸의 기를 끌어 모아 다짐했다. 이겨야 해.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어. 가족들의 양해를 구하고 종탑으로 오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시 외쳐야 할 ‘돌멩이’ 『어느 돌멩이의 외침』저자, 유동우 씨 이야기 글 장남수/ jnsoo711@hanmail.net 유동우, 그는 어릴 때 동화 같은 꿈을 꾸었다.고즈넉한 낙도에서 어민들을 치료해주는 의사가 되거나 천진하고 투박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는 꿈이었다. 그러나 중학교에도 진학할 수 없는 가난은 현실을 깨닫게 했고 일찌감치 그 꿈은 접어야했다. 열일곱 살 부터는 도시의 공장을 전전하며 ‘모가지가 열 두 개라도 모자랄’ 요꼬쟁이(봉제공정의 높은 노동 강도를 노동자들이 한탄하여 스스로를 부르던 말)가 되었고 꿈은 성직자로 바뀌었다. 정규교육을 이수하지 못하더라도 믿음만 있으면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꼬쟁이의 삶은 고달팠고 영양실조와 폐결핵, 지독한 가난, 전망..
인권을 살리는 치유, 국가폭력 피해자 치유프로그램 글_장남수 jnsoo711@hanmail.net “여기, 사람이 있다!” 불길이 치솟아 오르는 망루에서 외치던 사람은 그러나 끝내,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다. 검은 연기와 함께 시커멓게 무너져 내리는 건물 잔해처럼 철거민들의 삶은 무너졌다. 죽고 끌려가고 울부짖는 현장에서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체 따라 울다 천막귀퉁이에서 웅크리고 잠들었다. 용산참사 피해자 지원활동을 하던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빈민사목 팀의 눈에 이 아이들이 박혔다. 천막에서 자고, 밥 먹고, 등교하고, 천막으로 돌아와 이해할 수없는 험한 상황을 매일 목격하는 이 아이들의 마음상태가 걱정되었던 것이다. 인권의학연구소(이사장 함세웅 신부)의 국가폭력피해자 치유프로그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삶의 지침이 된 ‘나 이제 주인 되어’ 글_장남수/ jnsoo711@hanmail.net “엄마의 삶은 불꽃같았다. 엄마의 흔적을 되짚어 가다보면 열기가 느껴진다.” 고 이옥순 씨 (원풍노조 총무, 서울노동운동연합 부위원장 등)의 딸 권다정(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2)은 그 온기로 엄마 없는 어린 날을 견뎠고 건강한 대학생이 되어있다. 통일혁명당 사건 장기수 출신(권낙기 씨)인 아버지와 노동운동가였던 엄마의 삶은 딸 다정에게 어떤 줄기를 형성했을까. 엄마가 남긴 것은? 내가 막 열 살이 되던 2001년 2월에 엄마는 돌아가셨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그 후 성당에서 기도하는 시간 외에도 해를 보고도 달을 보고도 늘 기도했고, 마지막에는 꼭 ‘엄마’를 부르면서 마무리했다. 엄마는 나에게 수호신 같은 존재였다...
광장무대에 선 70년대 민주노조 -박정희 시대 경제성장 신화의 허구- 글_ 장남수/ jinsoo711@hanmail.net 나는 전라북도 남원에서 7남매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가지고 있던 땅을 모두 친일파에게 빼앗겼고 이후 자식들에게 한평생 미안해하셨다. 나는 돈이 필요했다. 주인집 언니를 따라 평화시장으로 갔다. 7번 미싱사는 나에게 “시다 해봤니” 물었고 나는 “네, 해봤어요.” 라고 거짓말을 하고 취직이 되었다. 내 나이 13살에 나는 ‘공순이’가 되었다. (청계피복 노조 신순애, 57세) 열세 살 ‘공순이’는 이제 쉰일곱 살 황혼기가 되어 40년도 넘은 그날을 되짚고 있다. 연기자들이 마임으로 그의 삶을 재현하는 무대 위로 신순애 씨의 자분자분한 음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