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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이야기/내가 만난 80년대

[내가 만난 80년대] 급진, 분열, 고립, 5․3인천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4. 24. 23:58
[내가 만난 80년대]

급진, 분열, 고립, 5․3인천

글 송동현/easthill@gmail.com



1985년 2월 12일 총선에서 급조된 야당인 신민당은 돌풍을 일으키며 국민들의 민주화의 열망을 모아 승리하였다. 김대중, 김영삼 양김씨가 주도하는 신민당은 총선 승리 1주년이 되는 1986년 2월 12일 전격적으로 1,000만 개헌서명운동에 돌입하면서 다가오는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해 3월 11일부터 시작된 지역별 지부 결성대회와 개헌 현판식은 3월 30일 30만 명이 모인 광주 집회와 4월 19일 10만 명이 모인 대전 집회 등의 군중시위와 개신교, 천주교, 대학교수 등의 시국선언으로 이어지면서 어떠한 사태로 이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특히 5월 3일 오후 2시 주안역 인근 인천시민회관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신민당의 개헌추진위원회 경기지부 결성대회는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지방에서의 고양된 열기, 수도권에 밀집된 대학가, 대회장 주위의 공장 지역, 4월 28일 서울대생 김세진, 이재호의 분신으로 인한 격앙된 분위기 등으로 5․3인천대회는 1980년 광주의 아픔을 되갚을 수 있는 대결전이 예고되었다.



5.3 인천 항쟁 현장에서 불에 타고 있는 차량과 공공기물을 방패삼아 시위하는 시위자들


당시 민주화운동의 주요 세력인 학생운동 세력은 1985년 겨울을 지나면서 한국이 미국의 피식민지이며, 당면한 투쟁은 미 제국주의와의 직접투쟁을 주장하는 서울대와 고려대 일부를 중심으로 하는 반미자주화와반독재민주화투쟁위원회(자민투)와 한국은 제국주의, 독점자본, 매판 군부의 예속체이며 당면한 투쟁은 개헌국면을 활용하여 헌법제정민중회의 소집을 주장하는 대다수 대학의 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민민투)로 나누어지고 있었다. 민민투 계열의 대학간 연합조직인 전국반제반파쇼민족민주학생연맹(약칭 민민학련)의 전술팀에서는 당시 상황을 “혁명을 예고하는 시기”에서 “혁명의 시기”로 인식하면서 5․3인천대회를 준비하였다. 광주 등과 같이 개헌현판식 집회에서 수십만 군중과 함께한다면 인천 주요 도심을 최소한 2,3일은 장악할 수 있을 것이고, 인근 경기도경 등에서 무기를 확보한다면 혁명으로 넘어 갈 수 있고, 여러 계획이 여의치 않더라도 주안에서 깨지면 제물포로, 제물포에서 깨지면 동인천 등지에서 질서 있는 항쟁을 전개하면 군부독재의 폭압통치에 커다란 구멍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각종 플래카드를 들고 신민당 개헌추진대회 저지시위를 벌이고 있는 5.3 인천 항쟁 현장


1986년 5월 3일 오후의 인천 시민회관 사거리는 엉망진창이었다. 어차피 정세 인식과 목표에 대한 합의는 힘들더라도 시위 전술은 같이 하자는 수차례 사전 만남에서도 의견 접근을 이루지 못한 채로 개헌 현판식을 맞이하였기에 분열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고 예상했지만, 시위대 내부의 경쟁과 분열은 심각했다.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이끄는 수백 명의 세력은 나름대로 집회의 주도권을 잡기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었다. 민민학련 시위대는 길게 펼쳐진 전선에서 전투부대 역할 밖에는 못하고 있었고 시위지도부는 시위대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 정오경 계획대로 전체 싸움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하여 민정당 경기․인천지부 사무실을 타격하면서 수십만 군중과 함께하는 인천봉기 계획을 실행에 옮겼지만, 결정적으로 시민들은 우리와 함께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우리의 시위를 포함한 전체 시위를 멀리서나마 군중들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오후 3,4시를 경과하면서 시위 현장은 최루탄과 불타는 차량의 연기만 가득할 뿐, 구경하던 군중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1986년 2월 4일 서울대에서 열린 연합집회에서 일망타진을 노리는 경찰의 포위를 뚫고 추격을 피해 수천 명이 관악산을 넘으면서 퇴로를 열었던 기억이 났다. 언뜻 보니 지금 시위 참가자는 만 명도 채 안 되고, 길게 펼쳐졌던 전선은 오그라들고 있었다. 만 명도 안 되는 군중들을 이끌고 할 수 있는 민중봉기는 계획에 없었다.

“지금 여기서 싸움을 정리한다. 경기도경 등 관공서 점거와 제물포, 동인천에서의 2,3차 전선을 형성하는 계획까지 포기한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에서 질서정연하게 퇴각할 수 있도록 이끌어 달라.” 1986년 5월 3일을 기해 “혁명이 예고되는 시기”에서 “혁명의 시기”로의 전환을 계획했던 민민학련 전술 팀의 한명으로서 각 전투조 책임자들에게 위와 같이 말했다. 그리고 시위 공개 지도부에게 같은 내용을 전달했다.

그날 그 순간 가장 두려워한 것은 고립이었다.


5.3관련 대검 수사 발표 관련 언론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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