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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쓰는 민주주의
전태일의 흔적 따라, 길을 걷다. 글 장남수/ jnsoo711@hanmail.net 밤새 내린 비로 고속도로는 젖어있었다. 전태일! 그가 살았던 흔적을 따라 나선 오월, 비에 젖은 신록은 연둣빛으로 고왔다. 전태일기념재단의 12인승 승합차에 가득 끼어 앉은 전태일의 후예들은, 노동자의 자긍으로 부활한 선배가 나고 자란 땅을 밟는다는 사실에 살짝 흥분되어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박계현 사무총장도 호흡을 조절하며 비오는 고속도로를 달렸을 것이다. 서울을 벗어나면서부터는 다행히 비는 잦아들기 시작했고, 대구에 도착했을 때는 걷기 좋은 날씨였다. 전태일이 태어난 동산동 311번지 일대는 은행나무가 들어 찬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공원입구에는 ‘바르게 살자’ 라는 표지석이 버티고 있었다. ‘바르게’ 사는 ..
전태일 이소선 김근태 그리고 마석 모란공원 글/ 한종수 wiking@hanmail.net 이 정권 들어 참 많은 어른들이 돌아가셨다. 김수환 추기경, 두 대통령, 리영희 교수, 박용길 장로, 그리고 이소선 어머니와 김근태 의장. 그 중 뒤의 세 분은 마석 모란공원에 묻혀있다. 9월 3일이 이소선 어머니의 기일이라 겸사겸사해서 아침 일찍 마석으로 출발했다. 그러고 보니 벌써 1년! 새삼스럽게 세월은 정말 빠르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행사는 11시부터였지만 김근태 의장을 비롯한 여러 열사들의 묘를 참배하기 위해 조금 일찍 나섰다. 물론 모란공원 가라고 만든 것만은 아니지만 경춘선 열차는 무척 편안했다. 공원입구에 들어서면 민족민주열사 희생자 묘역도가 참배객들을 맞이한다. 작년 이소선 어머니 장례식..
이소선어머니, 1주기 추도식 글 장남수_원풍노조, 등 지난해는 특히 민주화운동의 전선에서 큰 역할을 하셨던 귀한 어른들 중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나셨다.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모든 이들이 이견 없이 호칭했던 ‘어머니’도 떠나셨다. 그리고 벌써 1년이 되었다. 1년 동안도 많은 노동자들이 죽고, 터지고, 깨지고 상처받았다. 어머니의 부재로 상처는 더 쓰리고 쓸쓸했다. 9월 3일 오전 11시, 마석 모란공원에는 400여 명의 추모객이 모였다.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준비한 대형버스를 타고 온 민주인사들, 전태일의 친구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관계자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 그리고 얼마 전 회사가 고용한 용역에 의해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한 안산의 SJM노동자들도 많이 참석했다. 그들의 티셔츠 ..
한국의 ‘마더 존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연방군을 동원해 노동자들의 인권을 무지막지하게 짓밟았던 미국에는 검은 드레스 차림으로 파업현장을 누비며 특유의 독설로 자본가들의 비도덕성을 맹비난하고 투쟁심을 일깨웠던 마더 존스가 있었다.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예였던 그이는 1867년 남편과 자녀를 황열병으로 잃은 뒤 노동자와 미국의 현실에 눈을 떴다. 마더 존스는 ‘내 주소는 내 신발과 같아요. 어디든지 억압에 반대하는 투쟁이 전개되는 곳에 있으니까요.’라는 자신의 말대로 살았다. 그리고 한국에는 어머니 이소선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피 흘리고 끌려가고 죽임 당했던 7, 80년대 한국의 고난과 투쟁의 현장에는 반드시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 수수하게 틀어 올린 머리에 화장기 없는 민낯의 이 열혈 여..
며칠째, 전태일의 영정을 안고 몸부림치는 그이의 사진을 보고 있다. 이제 막 사십대가 된 젊은 이소선. 그는 슬퍼한다기보다는 아파하고 있다. 물리적인 통증을 거의 온몸으로 호소하고 있다. 혹시 그는 스물두 살의 전태일을 낳고 있었던 게 아닐까. ‘담대해지세요, 어머니…….’ 자기 몸에 불을 낸 아들은 그렇게 말했다. ‘오! 어머니/ 당신 속엔 우리의 적이 있습니다.’ 시인 박노해는 또 그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낳고, 아들은 어머니를 낳고 영별의 순간, 이소선의 내부에서는 자식과의 영별을 담대하고 의연하게 맞이하는 어머니와 자애로운 미소 속에 ‘적’을 감춘 어머니가 한판의 독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아들을 낳고 아들이 어머니를 낳(김남주, 『고난의 길』)’는 그 싸움은 가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