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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외쳐야 할 ‘돌멩이’ 『어느 돌멩이의 외침』저자, 유동우 씨 이야기 본문

민주화운동이야기

다시 외쳐야 할 ‘돌멩이’ 『어느 돌멩이의 외침』저자, 유동우 씨 이야기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2. 27. 17:13

다시 외쳐야 할  ‘돌멩이’ 

『어느 돌멩이의 외침』저자, 유동우 씨 이야기


    글 장남수/ jnsoo711@hanmail.net



유동우, 그는 어릴 때 동화 같은 꿈을 꾸었다.

고즈넉한 낙도에서 어민들을 치료해주는 의사가 되거나 천진하고 투박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는 꿈이었다. 그러나 중학교에도 진학할 수 없는 가난은 현실을 깨닫게 했고 일찌감치 그 꿈은 접어야했다. 




열일곱 살 부터는 도시의 공장을 전전하며 ‘모가지가 열 두 개라도 모자랄’ 요꼬쟁이(봉제공정의 높은 노동 강도를 노동자들이 한탄하여 스스로를 부르던 말)가 되었고 꿈은 성직자로 바뀌었다. 정규교육을 이수하지 못하더라도 믿음만 있으면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꼬쟁이의 삶은 고달팠고 영양실조와 폐결핵, 지독한 가난, 전망이 보이지 않는 미래는 암울했다.


급기야 꿈은 ‘죽음’으로 치닫는 극단의 색깔로 바뀌기도 했다. 약국을 전전하며 끌어 모은 수면제를 털어 넣었던 날, 그를 살린 건 어머니의 기도와 눈물이었다. 그리고 다시 살기위해 시작한 금은방의 세공일은 굶주림과 열악한 노동으로부터는 일정하게 출구를 만들어주었지만 불편한 갈등을 가져왔다. 금은방은 계급 간 격차를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공간이었다. 가진 자들에게는 값진 보석으로 거침없이 몸을 치장하는 사치의 공간인 반면, 가난한 이들은 자식의 혼인에 금반지 하나라도 해주려고 가락지를 긁어모아 들고 오는 곳이었다.


때로는 ‘장물’비슷한 것들도 비공식으로 거래해야했다. ‘먹고 살기 위해’ 계속 할 가치를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말했다. 

“생겨 먹은 게 자본주의적 인간이 아닌 게야.”


그리고 다시 간곳이 그의 인생을 갈래 지은 곳, ‘삼원섬유’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인천산업선교회의 조화순 목사, 유흥식 선생, 황영한 선생, 최영희선생 등이었다. 그들을 먼저 찾은 것은 유동우였다. ‘성직자’를 꿈꾸며 동료들에게 전도를 하던 그가 한계에 부딪친 것이었다. ‘술도 담배도 입에 대서는 안 되는’ 청교도적 기독교관에 투철했던 그에게 노동현실은 신앙생활을 하기에 불가능한 곳이었다. 그렇다면 ‘신을 접할 시간도, 기회도 없는 가난한 이들은 모두 지옥으로 가야하는가’ 그가 전도하려고 했던 노동자들은 그에게 되물었다. “당신은 일요일에 교회 갈수 있느냐고? 우리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불가능하지 않느냐고?”


그 해답과 선교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 소문으로 들은 ‘산업선교회’ 관계자들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는 조화순 목사가 ‘학을 뗄’ 정도로 신앙관의 차이를 느꼈고 언쟁을 벌였다. 그러다 차츰차츰 자신의 논리적 오류를 인정했고 기존의 신앙관이 무너지는 고통을 겪었다. ‘죽어서 천당 가는 게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그럼 이제 뭘 할 것이냐’ 그는 고민했고 깨달았다. 전도의 ‘대상’이었던 착박한 이 땅의 노동자, 그게 바로 자신이었던 것이다. 인천산업선교회관계자들의 헌신적인 실천과 교육프로그램은 큰 배움과 감동을 주었다. 그는 바로 통신신학교를 때려치우고 동인천의 <대한서림>에서 노동관계법 책을 구입했다. 한자투성이의 노동법 책을 다행히 한문을 좀 읽을 수는 있었던 터에 번역(?)해가며 공부했고 노동자소그룹을 만들어 나갔다. 노동자가 읽기 어려운 노동법 책을 보며 “내게 대학생 친구 하나만 있었으면”이라고 통탄했던 전태일이 노동법 책과 함께 산화해간지 몇 년의 세월이 흐른 후였다. 노동운동은 그에게 새로운 삶을 열었다.


그러나 유신치하에서 민주노조를 운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삼원섬유는 100% 외자유치 업체였다. 서슬이 퍼런 유신치하에서 ‘외국인투자기업에 대한 임시특례법’으로 완벽(?)하게 외국자본을 지켜주던 시절이었다. 당시 마산수출자유지역의 뉴질랜드계 공장 한곳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했지만 한 달 만에 ‘박살’난 사례도 있었다. 이 엄혹한 토양에서 그는 ‘민주노조’의 꿈을 꾸었고 다윗의 ‘돌멩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어느 돌멩이의 외침』월간<대화>1977, 1~3월 연재. 이듬해 단행본(청년사)으로 출간되어 세상에 알려졌고 1970년대 노동자들의 각성과 용기에 기여했다.


“그 책에는 당시 상황 때문에 다 쓸 수가 없었어, 울기도 많이 울었는데…”

못다 한 이야기는 켜켜이 응축되어 그의 마음속에 얹혀있고 그 눈물은 시작에 불과했다.


1980년 광주의 피바람을 목도한 민주화운동진영은 격동했다.

각성과 분노의 줄기들은 제각기 치열하게 갈래를 뻗었다. ‘학림’과 ‘무림’으로 이론논쟁이 붙었고 다양한 운동방식들이 논의되었다. 유동우도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군부가 이 세력들을 방치할 리가 없었다. 대규모 검거작업이 이루어졌고 천 명가량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1981년 ‘학림사건’으로 칭해진 이 사건 때 24명이 구속되었고 그 안에 유동우도 있었다.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나중에 알고 보니 고 김근태 씨 고문사건으로 유명(?)해진 바로 옆방이었다.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시간이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고 말이 나오지 않아 컥컥거리며 살아서 나갈 수 없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렇게 구속되어 교도소로 넘어간 후에도 1심 재판기간 동안 세 번이나 경찰병원에 실려 갔다. 당시 인천 사랑병원의 전희철 원장과 적십자병원의 의사가 교도소 안에 들어와서 진료를 하기도 했다. ‘오줌을 질질 쌌고’ 재판 받으러 나와서도 재판장이 “유동우 씨는 앉아 있어도 좋다.”고 배려할 정도였다. 그 덕(?)에 혼자 1심에서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 병원에 가서 정밀검진을 해보니 갈비뼈 3개가 부러져있었다. 항생제 처방을 받지 않았더라면 골수염으로 갈 뻔했다. 


그 와중에도 혼자 먼저 석방된 것이 미안하고 자괴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밤에 자다 환청에 시달리거나 소리를 지르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세상은 말없이 분주했고 견디는 것은 혼자의 몫이었다. 게다가 1987년 구로구청사건 때 당시 국민운동본부 상임대표 일을 맡고 있던 그는 또 한 차례 끌려가서 두 달 반 동안 징역을 살았다.


1987년 대선이 끝나고 몸은 점점 쇠약해져갔다. 사방이 막힌 공간에만 있으면 벽을 뚫고 자신을 향해 M16기관총으로 일제히 갈기는 환청에 시달렸다. 불이 꺼지면 감옥에서 고문당하는 두려움에 휩싸였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두려웠다. ‘멘붕’이 그런 거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머리가 하얘지는 상태에서 무작정 집을 나왔다. 갇힌 공간을 견딜 수 없어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길거리의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것을 찾고 아무 곳이나 머리를 기대고 잠이 들었다.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은 아내가 찾아와서 끌려가다시피 집으로 갔지만 곧 튀어나왔다. 길거리에서는 혼자 중얼거리고 다녔다. 아내가 정신과치료를 권유했지만 미친놈 취급하느냐고 불같이 화를 냈다. 딸이 강제로라도 입원시켜야한다고 절규했지만 ‘치료’는 가당치도 않은 것이었다. 


주변에서 박종렬 목사 등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분들이 간곡히 치료를 권했다. 지난 해 정신과치료를 받으면서 비로소 정신적 문제가 있음을 인정했다. 인정하고서야 치료의지가 생겼다. 그리고 인권의학연구소에서 진행한 국가폭력트라우마 치유과정에도 참여했다. 비로소 문득 고개 들어 하늘 한번 보게 되고 조금씩 마음이 열린다. 


결혼적령기가 된 딸을 두고 이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일, 자신의 사회적 입장을 고려해 누구에게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혼자 삭였던 아내에게 두고두고도 갚지 못할 미안함이 사무친다. 



그는 말했다.

지금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런 일을 겪고 있다. 영악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잘 사는데 어떤 이들은 자기잘못이라는 자괴감에 시달리며 산다. 어울리지도 못하고, 나서지도 못하고, 소리치지도 못한다.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주변사람들, 진영에서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혼자 잘 살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우리가 지향했던 가치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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