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민주화운동이야기 (85)
함께쓰는 민주주의
죽은 언론의 사회 -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글·송기역 songazzinaver.com 2008년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 정동익은 오래 전 자신이 몸 담았던 동아일보사 앞에 서 있었다. 촛불을 든 시민들은“동아일보는 쓰레기다!”라며 야유를 보냈다. 한때 국민들이 가장 사랑했던 신문 동아일보는 젊은 시절 그와 동료 기자들이 목숨을 걸고 외쳤던‘자유 언론’이 아니었다. 그는 차마 더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36년 전의 일이다. 1975년 3월 17일.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기까지 그는 입사7년차의 동아일보 기자였다. 새벽 세 시가 넘은 시각, 동아일보사 안에는 시노트 신부와 87명의 사원들이 2층(공무국), 3층(편집국), 4층(방송국)에서 5일째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이중 2층에 있는 23명의 기..
아름다운투정 - 가톨릭노동청년회 글·송기역 songazzinaver.com 『요셉 조성만 평전』을 탈고할 무렵, 박순희(아녜스)를 만났다. 사람들은 그 이를‘선한 싸움꾼’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만난 곳은 향린교회 목회실이었 다. 향린교회에서 판넬골목을 지나 백여 미터 오르면 그이가 숱하게 드나들 었던 명동성당이 있다. 박순희는 매일 명동성당에 들른다. 성당에 가면 추위 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각을 하는 문정현 신부가 있다. 그이는 문정현 신부와 함께 침묵과 기도로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에서 죽어가는 생명들과 함께 하고 있다. 우리의 만남은 70년대에 인권변호사로 거듭난 이돈명 변호사의 선종으로 하 루 연기되었다. 만나자마자 박순희는‘커다란 동지를 또 한 명 잃었다’고 애석 해했다. 우리의 대화는 이..
모든 것은 한 편의 글에서 시작되었다 -고려대학교 서클 한맥 글·송기역 songazzi@naver.com문제가 된 글은 한맥 6호에 실린, 광주대단지 실태를 고발한 르포르타주 「광주는 죽지 않았다」이다. 80년 5월의 광주가 아니다. 김영곤과 함상근 등 고려대 서클 한맥 회원들은 경기도 광주에 찾아가 한 편의 글을 쓴다. 광주에서 그들이 들은 것은 한 여성의 죽음이었다. 쫓겨난 철거민들의 땅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글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임산부가 분만한 아기를 삶아 가족의 아사를 면할 수밖에 없었다는 놀라운 참상이 바로 다른 곳이 아닌 광주단지에서 일어났다. 뉴스메이커 556호에서 한맥 회원 조상호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청계천 주변의 인쇄공이었던 한 가장이 아내가 허기에 지쳐 ..
[역사와 트라우마] 빨간 딱지, 결코 떨어지지 않는 -대전 산내유족회 부회장 이계성 글·최현정 chhjung@paran.com 1950년 여름. 대전형무소의 재소자들과 국민보도연맹원이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희생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에 동조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떠한 적법한 절차도 무시한 채 당대 정권이 저지른 일이었다. 이계성 선생님. 그도 그날 그 구덩이에서 아버지를 잃었다. 아버지는 해방 이후 남원건국군을 이끌던 고 이현열 님. 오랜 세월 빨갱이의 자식으로 드러내는 것조차 용납되지 못했던 상처를 품고 살아갔다. 상처를 품은 눈은 예리하고 날카로우면서도 동시에 따뜻하고 슬프다. 세 시간 정도의 만남 동안 그 두 눈에 눈물은 차오르려 하다가 이내 장난 섞인 호탕한 웃음소리에 덮여 사그라들..
12월 10일 (금) 오후 4~8시 서울 명동 YWCA 강당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매향리 평화마을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전만규글·최현정 chhjungparan.com전만규. 올해로 56세이다. 그의 고향은 매향리다. 11대 째 매향리에 살고 있는 전씨 사람이다. 88년도부터 매향리 미군폭격장 폐쇄에 앞장섰던 주민대책위원장으로 유명한 그다. 불타오르는 매서운 기질에 섬세하고 다정한 성품을 지녔다. 이름 난 평화 운동가이지만 약자라면 불의 앞에서 낫과 곡괭이를 들고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1951년 8월, 미군은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어촌 마을 매향리에 폭격 연습장을 만들었다. 그날부터 매향리의 하늘과 땅은 미군의 폭격연습으로 인한 전쟁 지옥 그 자체였다. 1967년 아기를 가진 33살 여성이 미군의 오폭으로 죽임을 당하자, 미군은 적반하장 주민들을 통제하기 시..
1992년 9월 2일 MBC노조는 공정 방송 쟁취를 위한 전면 파업에 돌입했다. 파업의 핵심 쟁점은 보도관련 3개 국장 인선에 평사원들이 추천권을 행사하는 추천제의 존폐 문제였다. 연말 대통령 선거와 선거 방송의 공정성 문제가 쟁점이 되고 있는 시점에서 노사 양측은 이 문제를 놓고 양보 없는 대립을 계속했다. 사측은 인사권은 사용주의 고유권한이란 원칙을 앞세워 폐지를 주장하고 있었고, 노조는 불공정 보도를 일삼아 온 사측의 횡포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 유지돼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파업이 장기화되고 KBS, CBS 노조의 동조 파업이 확산되자 파업 50일째를 맞는 10월 21일 공정방송조항을 비롯한 쟁점 사항에 대해 노사 양측이 합의함으로써 극적으로 타결됐다.(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5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