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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이야기/내가 만난 70년대

죽은 언론의 사회 -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1. 4. 15. 15:53
죽은 언론의 사회

                                                               -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글·송기역 songazzinaver.com


2008년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 정동익은 오래 전 자신이 몸 담았던 동아일보사 앞에 서 있었다. 촛불을 든 시민들은“동아일보는 쓰레기다!”라며 야유를 보냈다. 한때 국민들이 가장 사랑했던 신문 동아일보는 젊은 시절 그와 동료 기자들이 목숨을 걸고 외쳤던‘자유 언론’이 아니었다. 그는 차마 더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36년 전의 일이다. 1975년 3월 17일.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기까지 그는 입사7년차의 동아일보 기자였다. 새벽 세 시가 넘은 시각, 동아일보사 안에는 시노트 신부와 87명의 사원들이 2층(공무국), 3층(편집국), 4층(방송국)에서 5일째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이중 2층에 있는 23명의 기자들은 단식중이었다. 새벽 3시 15분. 함성소리와 함께 해머로 문과 벽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철문을 부순 폭도들은 서치라이트를 비추고 각목을 휘두르며 진압을 시작했다. 30분 후 공무국이 함락되었고 기자들은 짚차에 실려 혜화동 우석병원에 끌려갔다. 폭도들은 이번엔 3층 편집국으로 향했다. 기자들은‘자유언론실천선언’을 낭독하고 사회부 기둥에 걸려 있던 이계익 기자가 쓴 두루마리 족자 ‘自由言論實踐宣言(자유언론실천선언)’을 내렸다. 5층 방송국 역시 6시가 넘어서면서 완전 진압되었다. 일터에서 쫓겨난 사원들은 권근술 기자가 작성한 공동성명서‘폭력에 밀려 동아일보를 떠나며’를 낭독했다. 성명서엔“이제 동아는 어제의 동아가 아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정동익에게‘그날’의 동아는‘현재’의 동아로 머물러 있다. 그는 현재도 동아가 민중의 소리를 대변해주는 진정한 자유언론으로 거듭나길 바라고 있다. 정동익이 해직되기 두 해 전, 전북일보 편집국장이자 주필로 활동하시던 아버지 정희남도 유신과 함께 불어닥친 언론통폐합에 맞서다 해직됐다. 대쪽 같은 성격의 아버지도 언론계로 돌아가지 못했지만 현재까지 지역 언론의 사표로 존경받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길은 해직 이후에도 다르지 않았다. 정동익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언론계에 발을 내디뎠다. “사회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언론인이 돼서 사회 정의를 펴는데 일조하고 싶었지. 문리대 출신은 언론사 외 몇 군데밖에 취직할 데가 없기도 했어. 시험 보던 날, 운동장에 응시자들이 빽빽하던 게 기억나.” 당시 언론사 시험에 합격하면‘백대일’의 관문을 뚫었다고 말할 만큼 경쟁률이 높았다. 1967년 그는 동아일보 기자가 되었다. 하지만 기자라는 자부심이 오래 가진 못했다. 신문사 안엔 기관원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문화공보부, 중앙정보부, 서울시경, 종로서 등에서 온 각종 기관원들이 지면에 간섭했다.“이 기사 넣어라, 저 기사 빼라면서 일일이 개입해. 제대로 된 언론인 노릇하려고 왔는데 제 역할을 못하니까 자괴감이 들지. 언론인의 자존심이 말이 아니었어.”

 

행간을 읽는 시대

한 번은 어느 기자가 청량리에서 발생한 방화 사건을보도한 기사가 문제시되었다. 한 군인이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 변심한 애인의 집에 불을 지른 사건이었다. 정부에서 이 사건을 취재한 기자를 끌고 가‘공산당의 사주를 받고 군과 민간을 이간질시키려는 목적이 아니냐?’며 취조했다. 이 같은 환경에서 기자들은 자기 검열에 익숙해 질 수밖에 없었다. 시위와 관련한 기사는 1단 이상의 크기로 보도할 수 없었다. 기사에 사용하는 용어도 지시에 따라야 했다. 예를 들어‘학생 시위’는‘학원 사태’,‘ 연탄값 인상’은‘연탄값 현실화’,‘ 중앙정보부’는‘모기관’,‘ 부정부패’는‘사회부조리’로 표현해야 했다. 정동익은 편집부에서 일했기 때문에 기관원들의 역할과 보도 왜곡의 실상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매일 데스크에서 뺄 기사와 걸러야 할 기사에 대한 지시를 받았다. 시위를 보도하는 기사는 1단 이상 실을 수 없었다. 이를‘1단 벽’이라 불렀다.‘ 1단 벽’을 극복하기 위해 기자들은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다. 그중 하나가 고바우 화백의 만화 옆에 시위 기사를 내보내는 것이었다. “당시 동아일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지면이 고바우 만화야. 그옆에 시위 기사를 배치하면 1단이라도 1면 톱 기사나 다름없어. 시위 기사를 어떻게든 한 줄이라도 내보내려고 우리 나름대로 노력한 거지.” 그 시절‘행간을 읽는다’는 말이 유행어였다. 당국의 눈을 피하면서 기사와 지면 배치를 통해 독자들에게 어떤 암시를 주는 것을 이르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한계가 분명했다. 사회 현장에 가서 취재하고 기사를 써도 실리지 않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현장에 가면 수모를 당하기 일쑤였다. 시민들은“나가지도 않을 기사를 뭐하러 취재하느냐”며 항의했고 취재 차량 에 돌을 던지기도 했다.1971년 3월 26일. 서울대 학생 50여 명이 동아일보사 앞에서 언론 화형식을 가졌다. 학생들은 이날 낭독한「언론 인에게 보내는 경고장」에서 언론사와 기자들을‘7적’으로 지목하며 편집권 독립투쟁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이날 의 언론 화형식은 정동익에게 큰 충격으로 남게 되었다. 이런 일들에 자극받은 동아일보 기자들은 1971년 4월 15일「언론자유수호선언」을 발표했다. 이날부터 시작된 언론자유수호운동은 조선, 중앙, 경향 등으로 번졌지만 ‘선언’을 넘어‘실천’을 통한 변화로 이어지진 못했다. 1972년 10월 유신을 거치며 정권에 대한 대학가의 저항이 거세었지만 언론은 위축되었다. 언론사는 오히려 유신을 지지하는 성명을 신문 1면에 게재했다. 다음 해 동아일보 기자들은「언론 자유 수호 제2선언문」과「언론 자유 수호 제3선언문」을 발표했다. 재야의 저항에 부딪힌 유신정권은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 2호를 발동하며 언론 활동을 원천적으로 봉쇄시켰다. 언론은 암흑기에 들어섰지만 기자들은 언론 자유를 향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1단 벽’을 깨다

1974년 10월 21일. 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는 분회장으로 장윤환 기자를 선출한다. 장윤환은 그동안 몇 차례 발표한‘선언’을 넘어 당시 생소한 용어인‘자유 언론 (Free Press)’을 가져와 실천 과제로 강조했다. ‘유엔데이’인 10월 24일 오전 9시. 철야농성을 하고 있던 기자들이 편집국 사회부 주변에 모였다. 그 자리에서 ‘자유언론실천선언’이 낭독되었다. 선언문은 다음과 같 은 문장으로 시작한다.“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선언문 전문은 다음 날 동아일보 1면에 보도되었다. 다음 날 동아일보사 현관 앞엔‘기관원 출입금지’라는 경고 문이 나붙었다. 자유 언론‘실천’의 신호탄이었다. 기자들은 <자유언론실천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구체적인 자유언론 실천의 방안을 모색했다. 위원회는 매일 지면을 검토하는 모임을 갖고 기사를 분석했다.“저녁이면 조용한 조사부 방에서 기자들이 모여서 지면 토론하고 나서 다음 날 아침 데스크에 항의했어. 그 과정에서 점차 지면이 활기를 찾아갔지.”먼저‘1단 벽’이 깨졌다.

“전국에 걸쳐‘인권 회복을 위한 기도회’가 열렸어. 이건 당연히 톱기사 감이야. 톱으로 보도해줄 것을 요구했는데 권력에 주눅
이 든 데스크에선 안 된다는 거야.”

기자들은 편집국 총회를 열었다. 정동익은 그 자리에서“우리 요구가 반영될 때까지 농성에 들어가자”며 긴급 발언을 했다. 11월 12일자 신문이 결간을 하는 진통 끝에 ‘1단 벽’이 깨졌고 신문 기사와 제목에서‘금기 용어’도 사라졌다. 동아방송에서는 정부 선전물 뒤에 김추자의 노래‘거짓말이야’를 내보냈다. 인권, 시위 기사 등이 상세히 보도되기 시작하자 유신정권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정권은 자유 언론의 흐름을 막기 위해 광고탄압으로 응수했다. 한일약품이 광고를 끊은 데 이어 12월 24일 럭키그룹, 오리엔트시계 등 10여곳의 광고주들이 광고를 취소했다. 동아방송은 물론 월간 신동아, 여성동아도 광고탄압으로 무더기 해약 사태
가 벌어졌다. 이는‘동아 돕기 운동’으로 이어져 시민들의 성금과 격려전화가 쇄도했다. 동아 돕기 운동은 해외로도 번졌다. 이때 생긴 것이 독자의 의견을 싣는‘격려광고’다. 종교계, 사회 단체, 노동자, 농민 등의 격려광고가 밀려들었다. 어느 시내버스 안내양들은 휴일날 신문팔이로 번 돈을 모아 광고를 했고, 동아일보 배달원 15명은 고철을 팔아 모은 돈을 광고비로 내놓았다. 격려광고의 98%가 익명이 었다. 택시기사, 복덕방 주인, 막노동꾼, 대학생, 어린이 등 각계각층에서 성금과 성원이 쏟아졌다. 동아일보는 민주주의의 학습장이 되었다. 기자들은 신문보다‘격려 광고’문안을 보는 재미로 살았다고 한다. 정동익은 지금까지 기억나는 문구로“썩은 이를 뽑자.” 와 이대생들이 실은“동아, 너마저 배신하면 이민 갈거야.”를 꼽았다. 마치 2008년 촛불시민들이 손수 제작해온 피켓의 발랄한 문구를 연상시킨다. 끝내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육군 중위의 격려 광고도 인상적이었다. 이러한 시민들의 성원과 기자들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동아일보 사원들은 3월 17일 일터에서 쫓겨났다.

언론은 성직이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지만 그날 폭도들이 침탈을 시작한 시각은 오후 3시가 넘었을 때였다. 광화문 주변엔 경찰들이 깔려 있었다. 정권이 개입한 정황이 분명했다. 태권도 교관 출신의 친구가 그에게 알려준 얘기가 있다. “걔한테 제안이 왔대. 그래서‘동익이가 저 안에 있는데 내가 어떻게 그런 역할을 하냐’며 거절했다는데, 나중에 보니까 태권도 유단자들로 구성된 그 사람들이 우릴 쫓아낸 후 건물 정문 경비를 섰어.”2009년 해직 사태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 구 소송을 했지만 사법부는 공소 시효를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했다.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이었다. 현재는 고등법원에 항소한 상황이다. 2009년 7월 미디어법이 통과됐다. 정동익은 이로 인한 여론 독과점을 우려한다. 여론의 다양성과 민주주의가 실종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이 땅에 언론 자유가 있는 걸로 보는데 70년대와 마찬가지로 언론의 자유가 없는 독재체제라고 봐.‘ 언론 자유는 모든 자유를 자유롭게 하는 선결적 자유다’라는 말을 그때 많이 했는데 언론의 자유가 있어야 민주주의도 가능하고 민족 통일도 가능한 거야. 언론 자유는 민주주의의 대전제고 핵심 가치야.” 그는‘언론 바로세우기’가 민주화운동이고 통일운동 이라는 생각으로‘민주언론운동협의회’(현재 민언련)를 만들고 한겨레 창간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말》지 대표를 맡았다. 그는 언론 자유를 위해선 궁극적으로《르 몽드》처럼 편집권이 독립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주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언론인 스스로 편집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 없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정동익은 요즘 언론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사명감없이 언론사를 단순히 좋은 직장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며, 대학과 언론사의 언론 교육이 기능 교육만 남고 정신
적인 교육을 등한시하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1975년의‘언론자유실천선언’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끝으로 이야기를 마쳤다. “언론은 성직이야. 사명감을 지닌 사람이 기자가 돼야지. 같은 사건을 다루더라도 권력과 재벌의 편이 아닌 민중들의 시각에서 보도해야 돼. 우리가 실천 선언을 한 것은 부끄러움 때문이었어. 부끄러움을 느끼는 언론인이 많아졌으면 좋겠어.”

 
 
송기역_| 『허세욱 평전』과 르포집『흐르는 강물처럼』을 펴냈다. 신부의 삶을 꿈꾸다 명동성당에서 할복 투신한 순교자 요셉 조성만의 삶을 담은 평전을 집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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