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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 받는 자를 위한 인천도시산업선교회 본문

민주화운동이야기/내가 만난 70년대

억압 받는 자를 위한 인천도시산업선교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12. 22. 13:12


 

도시산업선교위원회(산선)은 산업사회의 민주화와 평화를 위한 화해자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활동해 왔다. 산선은 ‘공장을 중심으로 하는 전도활동’과 ‘노동하는 목회자 프로그램’을 통하여 노동자와 함께 노동함으로써 그들의 사고와 행동 그리고 질서를 익히고 교회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하여 산업사회와 교회가 얼마나 괴리되어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공장에서 노동을 함께한 후 공장을 교회로 삼아 수시로 드나들며 노동자들과 대화하여 협력자로서 도움을 주기도 했다. 각 공장 노동자들 중 교회에 나가는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평신도 활동을 전개하여 이들을 위한 교육과 그룹 활동, 평신도 지도자 훈련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한편 엔지니어와 중간 관리자의 모임을 꾸리기도 하였다.
특히 1964년 이후에는 각 공장에 있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만나 대화와 좌담회를 열어 교회가 어떻게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서 그리고 노동조합 활동을 위하여 협력할 수 있는지를 협의하고 때로는 노동조합에 협력하는 여러 가지 활동을 전개해 왔다.
초창기에는 개별 노동조합을 위한 프로그램, 노동조합 지도자 훈련, 노동교육 등 노동문제를 중심으로 한 활동 보다 노사 간의 분규가 생겼을 때 노동자의 편에서 노동조합을 지원하는 일을 주로 하였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인천산선)은 지난 1961년 4월, 인천 동지방 감리사이며 주안교회 담임목사로 재직 중이던 조용구 목사와 인천 서지방 감리사이며 내리교회 담임목사였던 윤창덕 목사가 동일방직공업주식회사와 한국기계공업주식회사에서 산업전도를 시작하면서 탄생하였다. 같은 해 9월 시카고 매코믹 신학교에서 산업선교 훈련을 받고 교회 중심의 선교활동을 경험한 오명걸 선교사(조지 오글 목사)가 인천에 부임하고, 1962년 인천 동·서 양 지방회의에서 산업전도를 하기로 결의하면서 산업선교 활동은 인천 동·서 양 지역의 공식 사업이 되었다.
이후 1968년 도시산업선교회로 개칭하고 중부연합회 실행위원회에서 도시산업선교위원회를 조직하여 이 사업을 본격적으로 지원하게 되었다.


목회자가 직접 공장에 다녀
인천지역 산업선교활동은 일반 교회의 선교와 달리 산업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선교활동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목회자가 직접 공장에 뛰어들어 선교활동을 전개한 것이 특징이다. 인천산선 직장 여성부 실무자로서 1966년 10월부터 동일방직에 위장취업하여 활동해온 조화순 목사(당시 인천산선 총무)는 1971년 15평짜리 목조 초가지붕 건물인 인천산선 회관에서 일꾼교회(당시 노동자교회)를 개척하여 동일방직의 노동조합운동을 지원하였다. 이후 백마교회(당시 광야교회)를 개척하였으며 송현 산마루교회와 안산 밀알교회의 개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영세 주민과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활동
1972년 조승혁 목사가 동일방직, 인천중공업, 한국베아링주식회사의 노사분규에 대한 배후 조종 혐의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 연행되어 고문을 받는 등 산업선교 자체에 대한 부당한 간섭과 탄압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인천산선은 노동자를 위한 산업선교 활동을 지속하였다.

 

1981년 전두환 정권의 폭압 속에서도 노동자의 자주적 활동을 지원하고 <민들레 선교원>을 개원하여 어린이, 노동자, 빈민을 위한 무료진료 활동과 신용조합 운영을 통하여 영세 주민과 노동자들의 권익과 생활개선을 위해 활동해 왔으며, 1996년 사회복지선교회(사회복지선교위원회)로 이름과 활동 방향을 바꾸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사료관에서는 인천산선의 귀중한 사료를 선별, 등록하여 등록 목록(메타데이타)을 만들고 데이터베이스화하여 2006년부터 웹상에서 일반인에게 공개할 예정이며, 공개된 사료는 관련 연구자들의 연구와 민주화운동의 역사정리를 위한 기초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이인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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