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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이야기/내가 만난 70년대

미완의 과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해방 60년 [윤미향]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12. 22. 13:18

미완의 과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해방 60년 [윤미향]



 

해방 60년을 맞은 올해도 어김없이 8월이 찾아왔다. 동양에서 60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인지 예년과 다르게 많은 행사가 준비되고 있다. 기억해야 하는 여러 사건들 가운데 ‘일본군 위안부’(위안부) 문제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벌써 670여 회를 거듭하고 있는 서울 종로구 일본 대사관 앞에서의 ‘수요시위’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통한의 세월을 상징하고 있다.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이 열어온 ‘수요시위’에는 매번 50여 명이 참석하고 있다. 내외국인 참가자가 계속 바뀌는 ‘수요시위’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내외의 높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위안부 범죄를 국내외에 알리고 관심을 끌어 모으고 있는 한가운데에 이렇듯 정대협이 있다. 그곳에서 사무총장으로 일하고 있는 윤미향 씨를 정대협 사무실에서 만나 보았다.


90년 11월 16일에 37개 여성·시민·종교단체와 여러 시민들이 모여 출범한 정대협과 92년 1월부터 사무국장으로 인연을 맺기 시작한 그는 정대협의 어제와 오늘을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다.
여성 신학을 전공하여 필리핀에 있는 여성단체에서 활동하고자 했던, 그래서 어학연수까지 갔던 그가 외면할 수 없었던 정신대의 실체는 무엇인가?


“정신대는 전시체제에서 일본인까지 포함한 다양한 노력 동원을 일컫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처녀 공출’이라 불린 여자근로정신대의 70% 정도는 공장으로 일하러 간 경우이고, 30% 정도는 마구 연행된 경우라고 합니다. 전자는 절차를 밟았고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나물을 캐다 끌려갔달지, 일본 경찰이 ‘어이’ 불러서 갔달지, 동네 방앗간 앞으로 모이게 해 50kg 이상이면 나이에 상관없이 마구잡이로 잡아간 후자의 경우가 대부분 위안부로 끌려간 경우입니다.”


정신대와 위안부는 다른 개념인 듯 하였다. “역사적 의미로 ‘위안부’, 범죄의 주체를 명확히 하기 위해 ‘일본군’ 해서 한자권에서는 ‘일본군 위안부’라 합니다. 영어권에서는 ‘일본군 성노예’로 불리지요. 정신대와 위안부는 다른 의미여서 단체의 이름을 가지고도 한때 고민을 했으나, 위안부를 설명하기 위해서도 정신대가 필요하기도 해서 그대로 두었지요.”


보통 우리가 말하는 위안부 문제가 정신대로 많이 알려지면서 선의의 피해자도 있었다고 한다. “근로정신대, 즉 공장에서 일하다 오셨는데 정신대 하면 모두 위안부로 오해를 해서 이혼을 당한 분도 계십니다.”


십여 년 전 TV 드라마로도 방영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소설 『여명의 눈동자』가 불현듯 떠올랐다. 여주인공 ‘여옥’이 위안부로 끌려가 겪었던 형언하기 힘든 고난을 담고 있었던 그 소설을 보면서 몸서리쳤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1931년 만주전쟁 때부터 위안부로 끌려가기 시작했으나,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본격화 되었고 1941년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앞에서 얘기한 마구잡이로 끌고 가는 방식이 극에 달했다고 합니다.” 약 20만 명으로 추정되는 위안부의 약 80% 정도가 조선 여자로 짐작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 위안부였다고 등록된 숫자는 사망자를 포함하여 215명에 불과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해방 후에 일제 식민체제의 청산에 실패하여 친일파가 여전히 우리 사회의 지도층을 형성했던 참담한 현대사의 경험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일제가 저질렀던 반인도덕 범죄행위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었겠는가!

친일 청산에 실패한 현대사
해방 후에도 고향에 못 돌아가고 식모살이, 식당일, 미군 위안부로 전전하면서 계속 따라 다니는 성병 치료를 위해 번 돈도 다 써야 하는 고통의 시간들이 이어졌다. 가족에게 보탬이 되어야 한다며 조카들을 돌본 분들도 있고 어쩌다 재취로 들어갔어도 아이들을 뒷바라지한 보람도 없이 나이 들어 설움만 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란다.
한술 더 떠서 정부의 각종 보조금 100만 원 정도를 탐내 이제야 나타나 모시겠다고 하는 경우도, 돌아가시면 가족이라고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세상인심이 얼마나 야박한지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마치 벌레 취급하며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했던 사람들이지 않았던가!
모두 심한 대인기피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할머니들의 사진을 가리키며 그는 “모두들 연세에 비해 참 젊고
고우시죠? 저분들이 그런 고초를 겪었다고 사진만 봐서는 누가 짐작이나 하겠어요!”

 

심한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는 할머니들
“92년 UN 인권위원회(UN 인권위)에 위안부 문제를 상정시키면서 정대협은 한국의 여성운동과 인권운동의 국제 활동에 좋은 선례를 남겼습니다.” 그해 8월에는 UN 인권위 소위원회에 할머니들을 모시고 갔고, 93년 비엔나 세계인권대회에는 남북의 할머니들을 모시고 가 결의문에 위안부 문제가 포함되는데 힘을 보태기도 했단다.


이 과정에서 국제 네트워크인 ‘아시아연대회의’(연대회의)가 92년 8월에 결성되었다. 창립을 한국이 주도한 연대회의에는 지금 필리핀, 중국, 대만,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동티모르, 한국, 북한, 일본 등 9개국의 단체가 가입해 있다. 위안부의 상처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이다. ‘사실 인정과 배상 권고’와 관련된 UN 인권위의 각종 결정은 연대회의가 주도했으며, ILO(국제노동기구)의 권고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이끌어 가고 있다고 한다.
“특히 2000년에 시작되어 이듬해 12월에 최종 판결이 난 네덜란드 헤이그 여성국제법정에서의 일본군성노예전범 확정 판결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국제사회가 관심을 갖게 한 중요한 계기였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국제적 관심은 높아 가는데 한국 정부의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다고 한다. “저희는 외교부 산하의 법인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UN 인권위 참가 경비 지원을 신청했는데, 거절당했지요. 일본과의 외교 문제 때문이라나요? 대만의 경우는 정부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국내에서 여건이 여의치 않아 독일기독교재단에서 지원을 받았는데, 우리나라가 OECD에 가입하자 부자 나라로 분류되어 지원 받기가 어려워졌다고 한다.
“미디어나 책, 배지를 팔아 모금을 하고 있다고 하면 이해를 못해요.

심지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정부기구냐고 묻는 경우도 있지요.”일을 하면서 어려움은 없었을까?

“97년에 검찰 조사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할머니 몇 분이 오해가 있어서 ‘저와 어떤 대표가 많은 것을 가로채고 있다.’고 고소를 했어요. 검찰 조사 결과 인건비 30만 원, 사무실 관리비 등등 전혀 문제가 발견 되지 않았지요. 검사가 역고소할 수 있다고 했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고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제가 단체 활동을 접었지요.”
등록된 215명 할머니 중에는 허수도 있다고 한다. 특별히 관련 자료도 없고 오래된 일인지라 처음에는 보건복지부에 신고만 하면 무조건 등록이 되었기에 발생한 결과라고 한다. 나중에는 한국정신대연구소와 자료집을 만들면서 진위가 가려졌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불미스러운 사건이었다고 그는 말을 이었다.
다른 단체들에서 일을 하다가, 피해의식이 강할 수밖에 없는 그분들의 삶을 이해해야지 싶어 2002년 1월부터 다시 정대협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얼마 전 언론을 통해 또 다시 근거 없는 음해가 있었으나, 이번에는 예전만큼 힘들지는 않았다고 한다.

 

불미스런 사건으로 상처도 받아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사업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무엇보다도 할머니들의 여생이 편안할 수 있게 도와드리는 것입니다. 더불어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박물관)을 건립하는 일이지요. 교육사업, 일본 정부에 압력 넣기, 연대사업을 계속 이어가려면 정대협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픈 역사를 알리고 이를 통해 전쟁과 여성 인권 유린을 막아야 합니다. 우리가 국제사회로부터 도움을 받았기에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 즉 전쟁과 인권 유린으로 신음하고 있는 이들을 지원하고 싶습니다.”


정대협의 활동과 최근 논의되고 있는 ‘일제 침략관’이라는 형식의 기념관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정대협도 민족운동이라고 할 수 있으나, 한편으로는 우리 민족문제에만 매몰되지 않고 전쟁과 인권으로 관심을 확장해야 한다고 느끼기에 또 다른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아버지가 알고서도 자신을 위안부로 팔아 넘겼다고 지금도 원망하는 할머니가 계십니다. 그분처럼 여성이기에 감내해야 했던 측면도 있기에 위안부 문제는 ‘일제 침략관’과 무조건 섞어버릴 수 없는 특수한 면이 있습니다.”


한국여자농구연맹과 공동으로 여자프로농구 여름 리그 내내 모금행사도 벌이고 있는 정대협은 박물관 건립을 위하여 거리 서명을 받으면서 모금도 하여 여론을 형성해 나가려고 한다. 할머니들의 이동이 힘들어 봉고차를 모 자동차 회사로부터 협찬을 받고자 했으나, 일본과의 무역관계 때문에 힘들다며 거절을 당한 사례를 들며 기업을 통한 모금은 힘들다고 했다.


모금만을 통한 박물관 건립은 불가능하므로 정부의 지원이 꼭 필요한데, 지금까지의 과정을 볼 때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한다. 물론 노력을 아끼지는 않겠지만 박물관 건립을 둘러싼 여건이 좋지 않기에 ‘일본 침략관’이 생기고 이 기념관의 한 부분만 내줘도 얼마든지 잘 활용할 수 있다며 소박한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부족한 정부 지원
‘종군 위안부는 북한 공작원’이라는 일본 새역모 후지오카 노부카츠 부회장의 최근 발언은 일본의 과거 역사 인식의 천박함과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기를 게을리 하는 사회나 개인이 지니는 뻔뻔스러움과 야만성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일본 정부가 저지른 위안부 범죄를 해결하기 위한 윤미향 씨와 정대협의 남다른 노력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일제 잔재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뼈아픈 현실이기도 하다.


수많은 여성들을 국가적 차원에서 조직적·강제적 방식으로 일본군의 성노예로 삼은 일본의 잔악한 범죄행위의 진상은 온전히 밝혀져야 한다. 또한 이로 인해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를 받았던 여성들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 위로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우리 사회와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보다 많은 관심과 연대의 정신을 표방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해방 60년을 맞이하면서 일제의 범죄행위의 직접적 피해자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우리들의 최소한의 인간적 예의가 아니겠는가? 참기 어려운 인간적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연대의식이 없다면, 어떻게 인권과 평화가 보장되는 세상을 꿈꿀 수 있을 것인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황정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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