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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쓰는 민주주의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에서 노순택(36)은 유명인사입니다. 아마도 이 곳 주민들이 알고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는 그이 뿐일 것입니다. 자신들의 얼굴을 전국에 알려주는 것도 모자라 요즘은 같은 동네에서 매일 얼굴을 마주칩니다. 얼마 전 동네에 사진관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100가구도 채 안되는 촌 동네에 왠 사진관? 사진가 노순택은 왜 이곳에 살면서 사진관을 연 것일까요? 대추리는 평택에 위치한 K-2 미군기지 바로 옆동네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한미군의 재배치로 인한 기지 확장 부지로 선택된 곳이 바로 대추리입니다. 이곳 주민들은 오래전 평택에 미군기지가 들어서면서 강제이주 당해 대추리에 정착했고 다시 그 자리에서 뿌리 뽑힐 위기에 처한 사람들입니다. 노순택은 이곳을 방문한 후로 큰 마음의 부담을 느꼈다고 ..
얼마 전 양평에 있는 사진전문갤러리 에서 사진가 김수남(57)을 만났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두 달 동안 개인전을 열고 있었고 오늘은 ‘작가와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어휴! 이거 너무 추워서 사람이 오겠나?” 올 겨울 일찍 찾아 온 추위에 양평은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은근히 걱정이 되나 봅니다. 하지만 예상을 깨고 이 추위에도 많은 사람들이 ‘굿’의 작가 김수남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사진가들은 그리 많지 않지만 그 중에서도 김수남은 비인기 종목인 다큐멘터리사진으로 널리 알려진 독특한 예입니다. 게다가 그의 사진 소재가 ‘굿’이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합니다. 1970년대에 굿은 유신정권에 의해 ‘미신타파’라는 명목 하에 없어져야 할 구습으로 취급 받았습니다. 하지만 김수남은..
양키 물건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주인아줌마는 뭔가 달랐다. 시장통 딴 아줌마들은 한결같이 옆으로 퍼진 체형이었으나, 그 아줌마만큼은 시쳇말로 ‘몸짱’에 가까웠다. 얼굴도 반지르르 마치 밀감처럼 윤이 났는데, 아마 양키 화장품 덕분이었을 터. 하지만 그 아줌마를 본 따 양키 화장품을 사 바른 우리 엄마, 이모, 숙모들은 도무지 ‘때깔’이 나지 않았다. 양키 물건은 ‘동동 구리무’와 달리 사람을 알아보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 아줌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교양이었다. “어머, 너희들 왔니?” 야들야들한 그 목소리. 마른버짐에 기계충에 국수 같은 때에 이에 서캐에 누런 콧물에, 내가 내 얼굴을 봐도 한심한 그런 놈들을 마치 귀한 손님이라도 되는 양 맞이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먹게 된 최초의 양식, 그게..
불온하다는 게 무엇일까. 문제를 하나 풀어보자. [문] 다음 중 불온하지 않은 것은? 1. 여인의 몸뚱어리, 흰 구릉, 흰 허벅지, 그대는 대지와 같은 온몸을 내맡긴다. 나는 억센 농부의 몸으로 그대를 파헤쳐 대지의 밑바닥에서 애기를 튀어나오게 만든다. 2. 사실, 나는 인간인 것에 지친다. 양복 가게에도 가고 영화관에도 가지만. 사실, 펠트제의 백조처럼 불투명해지고 느른해져 나는 원시와 진흙의 물길을 따라 흘러간다. 3. 나는 어디에 도착하였나, 나는 그들에게 물어본다. 이 생명 없는 도시에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지난 날 나를 사랑해 준 미치광이 아가씨의 거리도 지붕도 발견할 수 없다. 4. 나는 쓸 수가 있다, 오늘밤엔 가장 슬픈 시를. 나는 어느 여인을 사랑했고 그 여인도 몇 번인가 나를 사랑했..
1980년, 그 해 봄은 유난히 어수선하고 뒤숭숭했다. 정국의 향방은 오리를 넘어 십리 안개 속에 있었고, 온갖 억측과 소문이 발 없이도 한반도 남쪽 땅을 뒤덮었다.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을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구명 작업이 은밀히 벌어지는가 하면, 벌써부터 진원을 알 수 없는 쿠데타설이 생각 있는 이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래도 봄은 봄이었다. 특히 대학가의 봄은 마치 이 때가 아니면 영영 봄이 없다는 식의 불안감을 부추기며 서둘러, 황급히 그리고 노골적으로 퍼져나갔다. 감옥에 갔던 동료들이 무더기로 돌아왔다. 지하서클이 버젓이 간판을 내걸었다. 교수들의, 특히 학생 지도를 담당하던 교수들의 태도가 비굴하리만치 달라졌다. 그 와중에도 영어회화 카세트며 세계사상전집을 파는 외판..
그의 별명은 ‘피터팬’이다. 어른이 돼서도 아이의 꿈을 잃지 않는 피터팬처럼 그는 마흔이 넘어서도 스물의 꿈을 잃지 않았다. 청년필름 김조광수(43) 대표는 그런 사람이다. 영화사 대표라는 ‘브루조아적인’ 직함을 달고 있지만, 직함과 어울리지 않게 운동의 현장에 자주 얼굴을 드러내곤 한다.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정책위원을 하면서 스크린쿼터폐지 반대 1인시위에 나서는 것도 모자라, 스크린쿼터폐지 반대집회에서 사회를 보고 행진을 할 때는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선동’하기도 한다. 그의 운동은 영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2004년에는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영화인선언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파병반대 집회에서 대학후배인 임종석 열린우리당 의원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했고, 2002년 대선 때는 ‘노무현을 지지하는 문..
1993년 도시빈민문화제 사회자로 데뷔하고, 1995년 민주노총 창립 문화제라는 기념비적인 행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널리 알린 이래, 최광기(38)는 늘 ‘거리의 사회자’였다. 그는 쉽고 직설적인 언변, 탁 트인 목청, 그 만큼이나 시원시원한 말투로 집회 현장을 가득 메운 수천, 수만의 인파를 사로잡았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반대 당시 촛불집회의 마이크를 잡으면서 집회 사회자로는 이례적으로 자신의 이름 석자를 일반인들에게도 각인시켰다. 그랬던 그가 지난 5월, 거리가 아닌 방송에서 본격적으로 마이크를 잡기 시작했다. SBS 라디오의 아침 시사 프로그램인 ‘SBS 전망대’(평일 오전 6~8시)의 진행을 맡게 된 것이다. MBC 라디오의 간판 프로그램인 ‘손석희의 시선집중’과 같은 시간대에 맞붙는 시사 프로..
오프라 윈프리를 꿈꾸는 방송인 김미화 아무래도 아파 본 사람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어릴 때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였다. 지지리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소녀시절 시장통에서 야채행상도 해보았고, 절치부심 스무 살에 개그우먼의 꿈을 이루었으나 가난한 살림에 쫓겨 밤무대를 뛰다가 방송국 피디에게 ‘찍혀’ 그의 꿈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설움을 겪었으며, 여성으로 한창 행복할 나이에는 이혼의 아픔을 겪고 두 딸을 혼자 키우고 있다. 남부럽지 않게 성공했지만, 남 못지않게 고생도 해본 그는 그래서 다른 사람의 통곡 소리에 귀를 막지 못한다. 옆집 노인이 아프면 내 어머니가 아픈 것처럼 슬프고, 앞 동네 여성들이 호주제로 고통 받으면 남의 일처럼 여길 수가 없다. 다행히..
영화배우 최민식(44) 씨의 근황을 알기 위해서는 신문의 ‘영화면’보다 ‘사회면’을 펼쳐보는 게 빠르다. 그가 본업인 영화 촬영 현장을 떠나 스크린쿼터 원상회복과 한미FTA 저지 투쟁의 현장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7일 정부의 스크린쿼터 축소 발표에 반발해 영화 출연으로 받은 옥관문화훈장을 문화관광부에 반납했을 때만 해도 많은 이들이 ‘최민식 과격하네, 저러다 말겠지…….’ 했다. 하지만 그는 지난 5월 ‘스크린쿼터 칸 원정단’으로 프랑스를 방문해 칸 영화제 운영위원회로부터 스크린쿼터 투쟁에 대한 공식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는 등, 반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이 스크린쿼터 원상회복 투쟁의 맨 앞자리에 서 있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한미FTA범국민운동본부(이하 범국본) 산하 단체들의 집회를 찾아..
지식인의 이중성을 패러디하는 그녀들의 힘 개그우먼 신고은, 정경미 그녀들의 개그가 여성주의적이지는 않다. ‘자연분만’, ‘모유수유’를 외쳤던 의 ‘출산드라’처럼 여성에게 강요되는 다이어트 강박증의 사회를 고발하지도 않고, 의 ‘여자이야기’처럼 여성들의 눈으로 남성들의 행태를 뒤집어 보여 웃음을 선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무표정하면서 뻔뻔한 ‘정 마담’이 고상한 척 하지만 속물인 ‘정 선생님’을 희화하면서 지식인, 그 중에서도 여성 지식인의 이중성을 조롱한다. 자칫 여성에 대한 편견을 강화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는 그녀들의 개그는 실제로 보면 전혀 여성 비하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자꾸 보다 보면 깔끔한 뒷맛을 남기는 여성주의 개그라는 느낌마저 갖게 된다. 이상하게 여성을 패러디하지만 남성의 시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