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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쓰는 민주주의
얼마 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20주년 기념행사의 진행을 도운 일이 있다. 아직 30대 초반인 필자에게 민통련은 사실 특별한 감흥을 주기보다는 80년대의 전설 같은 막연한 느낌만을 주는 조직이었다. 기념행사 당일에 준비한 문화프로그램을 직접 보면서 느낀 점도 많았지만 그보다는 그날 자리를 가득 메웠던 분들의 면면이 오히려 더 많은 울림을 주었다. 그날 행사장에 오신 분들의 평균 연령은 대략 40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아마 그 연배도 젊은 축에 속했을 것이고 더 나이 드신 분들도 많았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민통련 부문 조직을 소개할 때였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의 순서가 되어 당시 회원들이 우루루 등장했는데 세상에! 청년은 아무도 없고, 중년의 아저씨들만이 가득 했다. 세월이 그만큼 흐른 것이다..
비극의 역사를 향한 장난 같은 질문 "천년의 수인" 만약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했던 안두희와 비전향장기수 그리고 5·18민중항쟁의 진압군이 얼굴을 마주보고 함께 살아야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연출가 오태석의 연극 은 이런 상상에서 출발해서 한국 현대사의 뿌리를 되짚어보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알려진 것처럼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했던 안두희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3개월 뒤에 15년 형으로 감형되었고 한국전쟁이 나자 석방되어 포병장교로 복귀한다. 그는 이후 곽태영 백범독서회장, 권중희 민족정기구현회장에게 테러를 당하며 도피 생활을 한다. 하지만 결국 1996년 10월에 인천의 자택에서 시민 박기서 씨에게 피살된 그는 암살 배후에 대한 자백을 하기도 하고 백범 묘소를 강제 참배하..
386세대의 치열한 자기고백 문진오의 첫음반 길 위의 하루 지난 호와 비슷한 질문으로 글을 시작해보자. 70년대 민중가요를 대표하는 작가가 김민기라면 80년대 민중가요를 대표할 수 있는 작가는 누구일까? 민중가요의 전성시대였던 80년대를 한 두 작가로 정리하는 것은 자칫 민중가요를 서열화하는 위험한 발상일 수 있지만, 대중적 파급력만을 놓고 본다면 단연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노찾사는 팀으로서 여러 장의 음반을 내며 통일된 음악적 색깔을 유지했고, 무엇보다도 당시 활화산처럼 분출했던 민주화 열기를 대변하는 ‘솔아 푸르른 솔아’, ‘광야에서’, ‘사계’ 등의 레퍼토리로 운동과 민중가요의 대중화에 획기적으로 기여했기에 8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결코 ..
아이들을 향한 김민기의 말 걸기 "우리는 친구다" 만약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단 두 명만의 작가를 고르라고 한다면 당신은 누구를 택하겠는가? 누구를 좋아하냐는 질문이 아니라 누가 한국 대중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묻는 질문이라면 말이다. 아마 많은 대중음악인들의 이름이 거론되겠지만 같은 질문을 대중음악평론가들에게 던진다면 십중팔구 김민기와 한대수를 거명할 것이다. 김민기와 한대수, 이제 음악활동 경력 30년을 훌쩍 넘기는 이들은 한국 대중음악의 가장 대표적인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어떤 아이콘 같은 이름들이다. 이들은 비록 비슷한 시기에 음악활동을 시작했지만 겉으로 보이는 경향은 다르고도 또 같다. 김민기가 지식인적인 고뇌로 당대를 끌어안고 이에 맞서려고 했다면, 한대수는 보헤미안과도 같은 자유..
뚝심으로 새긴 역사의 기억 구본주 1주기전 별이되다 모든 기억은 상처를 동반한다. 기억이 발생했던 순간에서 멀어지며 현재에서 과거로 전이되는 순간 기억은 생명력을 얻게 되지만 기억이 기원에서 멀어지는 것은 돌아갈 수 없는 시간에 대한 불가능한 회귀의 꿈으로 스스로를 상처 입히며 자신을 지우고, 변형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우리가 기억이라 믿으며 간직하는 것은 늘 몇 개의 이미지에 가까운 조각들이 아니던가. 그래서 사람들은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겨, 기억을 온전히 보존하려 안간힘을 쓴다. 그것은 기억을 과거에 묻어두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을 복원함으로써 오늘과 대화하려는 끈질긴 노력에 다름 아니다. 2004년 12월 8일부터 28일까지 가나아트갤러리와 덕원 갤러리, 사비나 미술관에서 함께 열린 조각가 구..
민중가요-노래운동 진영에서 ‘노래패’가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노래패’는 민중가요 문화의 창조자이면서 수용자이고, 노래하는 사람과 노래를 만드는 사람, 반주하는 사람, 기획하는 사람이 섞여있는 공동체의 느낌이 살아있는 말이기도 하다. 민중가요문화에서 노래패가 중요한 이유는 집단성을 강조하던 전통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혼자 듣고 감상하기보다 함께 노래하는 것을 보다 더 중시해온 민중가요 문화의 전통에서 노래패는 가장 중요한 기본 단위로 인식되어왔다. 그래서 민중가요문화가 시작된 70년대 말의 대학가 노래모임부터 최초의 사회 노래모임 ‘새벽’, ‘노래를 찾는 사람들’과 ‘꽃다지’ 등 수많은 전문 노래패들이 민중가요 진영의 주요한 흐름들을 만들어 왔다. 최근 개인 가수나 밴드의 영역이 커지는 추세에도 불구..
1960년대 이후 학생운동은 한국 변혁운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다. 사회운동 역량이 미약하던 시기에 학생운동은 대학이라는 비교적 안정된 활동공간에서 자신의 역량을 축적함으로써 사회운동의 주동력으로 자리매김해왔다. 6,70년대의 학생운동이 정의감과 도덕성에 기초한 다소 인텔리적 운동이었다면, 80년대의 학생운동은 대중적이며 조직적인 운동이었다는데 차이가 있다. 전두환 정권 당시 엄혹한 탄압으로 인해 강도 높은 서클 중심의 활동을 펼쳐오던 학생운동은 87년 6월 민주항쟁을 기점으로 전대협이라는 연대체를 구성하고 대중적 학생운동의 신화를 창조해내기 시작했다. 1기 출범식을 약 5,00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치러낸 전대협이 5년 뒤 6기 출범식을 10만에 가까운 학생들과 함께 진행한 것은 당시 학생운동의..
꾸밈 없는 소박한 노래들. 집 옆에 또 다른 집이 하나 둘 생겨나고 어느새 마을이 되고 좁다란 마을 길 옆 미루나무가 솟아나고 구름이 흐른다. 노래는 구름에 실려 어디론지 날아가고 사람들은 어디선지 모르게 들려오는 그 노랫소리를 듣는다. 노래가 흐르는 마을. 90년대 초반 ‘노래를 찾는 사람들’과 함께 활발히 활동하던 민중가요 진영의 대표적인 노래모임의 하나인 ‘노래마을’의 이미지는 이렇다. 꾸밈 없는 소박함. 고즈넉한 산 기슭에 여럿이 함께 오래오래 살아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삶이 만들어가는 노래들. 내가 노래마을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면 선명하게 맺히는 그림이다. 꾸밈 없는 소박함 노래마을의 시작은 86년으로 거슬러간다.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여’ 라는 대목으로 유명한 임희숙의 등 수많은 노..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했다. 그 말씀은 분명 시였으며 이야기였으며 노래였으며 춤이었을 것이다. 또한 비였으며 바람이었으며 햇살이었으며 눈보라였을 것이다. 상상해보라. 머언 고대의 사내들과 여인들이 풍성한 수확을 놓고 난장으로 얽혀 기쁨을 나누던 자리, 그득그득 술잔은 넘치고 왁자지껄 이야기꽃 피어나는 순간. 말씀은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는 노래가 되고 노래는 춤이 되고 땀이 되고 하늘이 되는 순간, 살아 있는 땅 위의 모든 것들은 한 몸으로 숨쉬는 대동의 맘판이었을 것이다. 입에서 입으로 이어지며 개인을 집단으로 옹골차게 묶어주었을 노래의 힘은 오늘 우리가 광장에서 함께 노래하는 순간 다시 살아난다. 독창적인 ‘힘’으로 대중 압도 홀로 불러도 아름다운 노래와 함께 불러야만 비로소 아름다워지는 노래로 크게 ..
대학 노래패 시절 암묵적인 몇 가지의 금기가 있었다. 예를 들자면 될 수 있으면 대중가요를 부르지 않는 다든지 (예외가 있다면 술자리의 뽕짝만이 너그러웠다) 통기타와 북 이외의 악기를 쓰는 일도 그러했다. 지금 생각하면 꼭 그래야 했을까 싶지만 그 당시에는 왠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던 일이다. 민중가요는 이래야 된다는 일종의 관습법이 있던 시절이랄까. 민중가요가 대중가요와 다른 대학생들의 독자적인 노래문화로 자리 잡는 70년대 후반 이후, 대중가요를 극복하는 대안문화로, 의식적인 노래운동으로 발전하는 80년대에 이러한 류의 관습은 꽤나 견고했다. 최초의 사회노래모임이었던 ‘새벽’이 공연에서 신디사이저를 썼던 문제로 대담이 마련되는가 하면,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대중가요의 편곡 관행을 받아들이며 드럼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