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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마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12. 20. 01:45
꾸밈 없는 소박한 노래들. 집 옆에 또 다른 집이 하나 둘 생겨나고 어느새 마을이 되고 좁다란 마을 길 옆 미루나무가 솟아나고 구름이 흐른다. 노래는 구름에 실려 어디론지 날아가고 사람들은 어디선지 모르게 들려오는 그 노랫소리를 듣는다. 노래가 흐르는 마을.
90년대 초반 ‘노래를 찾는 사람들’과 함께 활발히 활동하던 민중가요 진영의 대표적인 노래모임의 하나인 ‘노래마을’의 이미지는 이렇다. 꾸밈 없는 소박함. 고즈넉한 산 기슭에 여럿이 함께 오래오래 살아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삶이 만들어가는 노래들. 내가 노래마을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면 선명하게 맺히는 그림이다.


꾸밈 없는 소박함

노래마을의 시작은 86년으로 거슬러간다.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여’ 라는 대목으로 유명한 임희숙의 <내 하나의 사랑은 가고> 등 수많은 노래를 만들었던 작곡가 백창우가 작은 집을 하나 지으며 시작됐다. 듬성듬성 집이 지어지긴 했지만 아직 마을이란 이름이 어색하던 시절.
 

첫 음반을 내고 주로 성남지역을 무대로 활동하던 노래마을이 비로소 여러 사람들의 가슴에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는 것은 그로부터 4년이 지난 90년대 초반의 일이다.
90년 <우리의 노래가 이 그늘진 땅에 따뜻한 햇볕 한 줌 될 수 있다면> 이라는 무지막지하게 긴 제목을 달고 나온 2집 음반은 같은 이름의 머릿곡이 큰 인기를 모으면서 사람들에게 널리 퍼졌다.
작곡가이자 팀의 선장 역할을 하던 백창우의 관심이 드러난 <아기 염소>, <콩밭 개구리>같은 동요들과 나 최근 탄핵반대 노래 등으로 지금도 민중가요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알려진 윤민석의 당시 인기곡 <백두산>,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그리고 박종화의 절창 <파랑새>가 실린 2집 음반은 소박한 노래마을의 색깔을 잃지 않으면서도 당시 노래운동의 흐름을 잘 결합시키면서 신선한 충격으로 대중들에게 다가왔다. 여기에 대중 가요계의 뛰어난 편곡자였던 연석원과 함춘호의 편곡이 더해지면서 음반은 소박함에 윤기를 더했다.
이러한 노래마을의 색깔은 진지하고 조금은 엄숙했던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노래들과도 달랐고 노동현장의 전투적인 목소리를 생생하게 그려냈던 김호철과 다른 현장 지향의 노래모임과는 다른 질감을 드러내며 사람들의 가슴에 조용히 내려 앉았다. 어느 공연장에서건 노래마을은 자신의 질감을 잃지 않았고 자신의 색깔로 사람들을 설득해 나갔다.
이러한 노래마을의 색깔은 93년 발매된 3집 음반에서도 계속 유지되었다. 멤버가 조금 바뀐 점, 동요적인 색채가 조금 옅어진 점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3집의 변화가 있다면 조금 더 강해지고 슬픔이 좀 더 -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반영하듯 - 강해진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90년대 중반 이후 멤버들의 변동이 잦아지고 팀의 선장격인 작곡자 백창우가 빠지면서 노래마을 역시 흔들렸다. 또 다른 작곡자이자 프로듀서로 김현성이 그 자리를 메운 98년에 발매된 4집 음반에서도 이러한 흐름은 이어지지만 노래마을의 독특한 느낌이 많이 약화된 듯 보였다. 4집 음반을 발매하고 공연활동을 하던 노래마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공식활동을 중단한다.
노래마을의 음악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70년대 포크의 양대 흐름이라 볼 수 있는 사회비판적인 포크의 흐름을 수용하면서도 자연 친화적인 서정적인 포크를 자신의 음악적 자양분으로 독특한 음악세계를 펼쳐나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노래마을의 이미지는 아무래도 이 그룹을 주도했던 시인이자 작곡가 그리고 음반 프로듀서를 맡았던 백창우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노래마을의 구성원들의 개인적인 색채들이 더해지면서 풍성한 모습으로 드러난 것이 아닐까 한다.


  마치 밑그림과 덧칠한 색깔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수채화처럼. 여기서 자연 친화적인 서정적인 포크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이쁘기만한 낭만적인 그림은 아니다. 흔히 포크음악에서 드러나는 낭만적인 전원생활이나 그 속에서 떠다니며 고독을 씹는 그런 관조의 음악이 아니다. 그건 흙냄새 나는 조화로운 세상이고 그 속에서 일하며 생활하는 사람의 느낌이다. 이것이 노래마을이 꿈꾸었던 세상이라 생각한다.
이런 노래마을의 독특한 음악적 색깔은 노래마을이 공식적인 활동을 중단한 뒤에도 노래마을 출신 가수들의 개인적인 활동에서도 잘 드러난다. 백창우의 동요 작업과 시 노래 모임 나팔꽃의 작업들.


노래마을 출신으로 솔로 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이지상과 손병휘, 윤정희, 이정열 등 수많은 가수들의 음반에서도 이런 노래마을의 색깔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색깔이 그들의 음악에서 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건 아니건 말이다. 그들 역시 조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노래마을의 꿈을 잊어버리지 않았다고 할까? 세상을 냉소적으로 보기보다 좀 더 긍정적으로, 극복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좀 더 나은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바꾸려는 모습.
노래마을 사람들은 자기가 어디에 서 있건 자신들만의 태도와 시각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 비판과 자연 친화적 서정을 결합

마치 6,70년대 이촌향도의 물결 속에서 마을을 떠나 도시 속으로 떠나온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에 고향이 있듯 한때 마을을 이루던 꿈을 놓지 않고 건강한 세상을 지향하는 노래마을의 모습은 앞으로도 민중가요의 중요한 흐름으로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화려하지 않지만 소박하게 남아 있는, 마음 한 켠의 고향과 같은 노래마을의 노래가 좀 더 많은 울림으로 가질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이는 이제 도시에 올라와 스스로 터를 잡고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다시 모이는가에 달려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 모이지 않는다 한들 어떻겠는가. 그 그림과 마음 속에 자리잡은 꿈이 사라지지 않는 한 마을 사람들의 노래가 잊혀질리 없지 않은가?

 

 

<안석희>
유인혁이라는 이름으로 <바위처럼>
<우산><노래만큼 좋은 세상>
<이 길의 전부>등의 노래를 만들었다.
희망의 노래 꽃다지 음악감독을 지냈고
2000년부터는 유정고밴드에서 활동했다.
음악작업을 하는 틈틈이
노래에 대한 글을 연재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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