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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쓰는 민주주의
긴급조치 9호 세대에게는 너무나 유명한 26동 사건은 그러나 가장 엉터리 같은 사건 중 하나다. 이 사건을 수사한 경찰, 단죄한 재판부, 그리고 사건 당사자인 학생들도 그 전모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심포지엄 중에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인 데다 강의동이 폐쇄돼 기관원이나 교직원이 현장을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농성 현장에 있다가 연행된 학생들도 곧이곧대로 증언할 리 없다. 조서가 어떻게 꾸며지느냐에 따라 훈방이냐 구속이냐가 결정되는 판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학생들도 뒤죽박죽 진행된 농성사태의 전말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는 바로 이 사건 현장인 26동에 있다가 연행된 400여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학내 강력한 지하서클의 핵심 인물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는 그에게 강도 높은 조사가 따르는 것은..
음모, 반역, 작당, 배신, 밀고, 투옥, 욕설과 괴담 뒤의 충격적인 결말……. 그리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마지막 반전, 30여 년 전 서울 시내 한 사립 남자고등학교에서 일어난 괴이한 사건이다. 유신체제가 정점을 향해 치닫던 1974년, 이 학교에 두 가지 이변이 일어난다. 그 하나는 만년 이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즉 ‘뺑뺑이 1세대’를 맞이한 것이다. 고교입시제도 하에서는 감히 유치하지 못할 우수 인재를 대거 확보한 학교 당국은 꿈에 부풀었다. 재단 이사장은 의욕에 넘쳤고 학교장은 투지에 불탔다. 사건의 단초는 여기서 싹텄다. 교사들의 ‘의욕치’가 높아질수록 죽어나는 것은 학생들이었다. 교정은 서서히 입시지옥으로 변했고, 학생들은 ‘점수 따는 기계’로 전락해갔다. 이때 세상 물정 모르..
해방으로 전진하는 사람들“고개 숙여! 이년들아, 어느 년이 고개 드는 거야! 아침부터 맞아 뒈져볼래, 미친년들!” 우리는 90년 5월 붉은 태양이 작열하는 공장 운동장 한복판에서 ‘우리는 하나’가 씌어진 붉은 셔츠를 입고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조합원 여러분 힘내요! 조금만 참아요, 조금만!” 공장 정문 밖에선 개처럼 질질 끌려 내동댕이쳐졌던 조합원들이 울며불며 소리치고 있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누구 한 사람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물이 콧등으로 흘러 콧물과 함께 뭉개져 시멘트 바닥에 ‘뚝뚝’ 떨어져도 손으로 훔치지 못했고, 그냥 대책 없이 흘려보내야 했다. “야! 이 개새끼들아 우리 들여 보내줘!” 공장 문밖의 조합원들이 구사대에게 빙 둘러 갇혀 있는 우리들에게 힘을 주느라 아우성이었..
누구는 여름날이면 이십년 전 사건을 떠올린다. 더울수록 그 기억을 새록새록 떠올리며 더위를 식힌다. 납량특집도 그런 납량특집이 없다. 무시무시한 기억이다. 소름이 쫙 끼친다. 그러다가 종래에는 더 더워진다. 부르르 주먹을 떨다가도 이내 맥을 놓는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한숨을 쉬며 빙그레 웃고 만다. 부질없다는 듯 입맛을 쩍쩍 다시는 것도 싱거워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다 지난 일이다. 1986년이면 제5공화국의 전횡이 가히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였다. 당시 민심은 미국의 자본, 금융, 상품시장 개방 강요를 위한 갖은 압력으로 인하여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굴욕적이게도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은 하수인 노릇을 자처하였다. 이른바 ‘5·3 인천민주화운동’ 등 민족자주·민중민주세력을 무..
그는 왕이었다.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는 ‘지존’이었다. 그가 뜨기만 하면 학내의 내로라하는 ‘가다’들은 모두 꼬리를 내렸다. 감히 대적할 자가 없으니 그는 캠퍼스의 ‘총가다’이자 왕이었다. 학내의 주먹 실력은 럭비부
흰 얼굴에 긴 생머리, 서글서글한 눈매에 광대뼈가 약간 튀어나온 그녀는 활달하면서도 조금은 새침해 보이는 여학생이었다. 서클룸이나 술집에서 종종 기타를 치며 약간 쉰 듯한 목소리로 ‘오월의 노래’를 부르는 그녀의 모습은 존 레논의 연인 오노 요꼬처럼 매력적이었다. 그녀가 팝송을 부른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나는 우연히 길거리에서 흘러나오는 ‘댄싱 퀸’에 맞춰 그녀가 저도 몰래 몸을 격렬하게 까닥이는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기는 했다. 알고 보니 그녀는 팝송 매니아에다 클래식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고, 나중에 고백한 바에 의하면 피아노 연주 실력도 수준급이었다. 그녀에게 우리는 ‘카수’라는 별명을 붙였다.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 ‘영산강’, ‘기지촌’, ‘맹인가수부부’……. 담배와 막걸리 냄새에 찌든 ..
1983년 4월 15일은 나에게 참 기묘한 날이었다. 점심을 먹고 수면실(음악 감상실)에서 클래식을 자장가 삼아 한숨 자고 나와 문과대 건물인 서관으로 향했는데 한 학생이 건물에 밧줄로 매달려 있었다. 그 학생 머리 위에는 12시가 되면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래가 흘러나오는 시계탑이 빛나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진달래, 목련꽃, 개나리, 벚꽃 등 봄꽃들이 회색빛 오래된 석조 건물과 학생들을 아름답게 뒤덮고 있었다. 공중에 매달린 학생은 건물 벽에 뭐라고 쓰고 있었는데 긴장 때문인지 흔들리는 줄 때문인지 안정되게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반파쇼(독재 반대)를 쓰려고 했는데 ‘반’자를 쓰고 ‘파’자를 너무 오른쪽에 쓰는 바람에 ‘쇼’자를 중간에 써서 ‘반쇼파’(쇼파 반대)를 쓰고 말았다. 강당 안..
질풍노도의 100일이었다. 1971년 3월부터 5월까지 대학가는 극심한 몸살을 앓았다. 최루탄과 돌멩이가 사라질 날이 없었고, 예전에는 잘 볼 수 없었던 기상천외한 사건이 벌어졌다. 가두시위, 투석전, 휴교, 휴강, 제명, 무기정학, 연행, 구속, 수배로 얼룩진 나날이 계속됐다. 학사일정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주범은 정부 당국의 교련교육 강화 조치와 3선개헌에 의해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였다. 학생들은 교련 반대를 이슈로 극렬한 데모를 벌였고, 선거 부정을 감시하기 위해 참관인단을 각 지역에 파견했다. 대학생들의 이런 적극적인 움직임이 정국 긴장을 한층 고조시켰다. 학기 초에 한 신문사 앞에서 벌어진 사이비 언론 화형식과 각 대학에서 결행된 교련복 및 군화 화형식은 그 후 전개될 학생과 언론인의 험난한 민주..
연옥 언니 사람들은 살면서 무수한 사람들을 만난다. 그런데 그중에는 정말 보고 싶은데 못 보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여자에게 연옥 언니는 보고 싶어도 못 보는 그런 사람이다. 아버지가 남의 집 과수원 일을 해주며 겨우겨우 살아가는 집의 장녀였던 여자는 사실 고등학교도 겨우 다닐 수 있었다. 여자에게는 아래로 동생이 셋이나 있었다. 여자와는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질 않던 남동생은 공부를 썩 잘했다. 여자는 돈을 벌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열아홉 겨울, 아직 고등학교 졸업식도 안 끝난 여자는 어느 새벽 청량리행 열차를 타기로 하고 가방을 싼다. 여자의 아주 오랜 친구 명희가 환타 한 병과 정말 동그랗던 보름달 빵을 사서 건넨다. 병에 든 환타를 기차 안에서 어떻게 먹어야 하나 여자는 잠시 난감했다. 기차를 타기..
백무동 계곡 집채만 한 바위 위에 자리를 잡은 나무의 뿌리는 지층을 향해 혹독한 삶이 그만할까 싶을 정도로 길디길게 뻗어 마침내 땅 밑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때로 먼 길을 앞에 두고 부리는 엄살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지난밤 별 총총하던 하늘은 엷은 구름이 낮게 드리웠고, 푸른 죽창의 왕대밭은 미풍조차 없이 잠잠하였다. 미처 산마루를 넘지 못한 아침 해가 동해 저 끝에 머물고 있는 시간, 계류의 물소리는 도란도란 속삭이듯 남은 잠기운을 털어내며 귓가를 즐겁게 하는 지리산 백무동 계곡의 서릿가을은 흔연한 꿈속 같았다. 늦저녁이 되어서야 백무동 매표소 어름에 닿았다. 진부령을 넘고 다시 서울에서 안의, 함양을 거쳐 다다른 백무동의 저녁은 깜깜하였으나 가로등 불빛은 돌올했고, 펜션의 불빛은 지나치게 밝고 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