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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지리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12. 23. 11:27



백무동 계곡

집채만 한 바위 위에 자리를 잡은 나무의 뿌리는 지층을 향해 혹독한 삶이 그만할까 싶을 정도로 길디길게 뻗어 마침내 땅 밑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때로 먼 길을 앞에 두고 부리는 엄살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지난밤 별 총총하던 하늘은 엷은 구름이 낮게 드리웠고, 푸른 죽창의 왕대밭은 미풍조차 없이 잠잠하였다. 미처 산마루를 넘지 못한 아침 해가 동해 저 끝에 머물고 있는 시간, 계류의 물소리는 도란도란 속삭이듯 남은 잠기운을 털어내며 귓가를 즐겁게 하는 지리산 백무동 계곡의 서릿가을은 흔연한 꿈속 같았다.


늦저녁이 되어서야 백무동 매표소 어름에 닿았다. 진부령을 넘고 다시 서울에서 안의, 함양을 거쳐 다다른 백무동의 저녁은 깜깜하였으나 가로등 불빛은 돌올했고, 펜션의 불빛은 지나치게 밝고 환했다. 낡고 오래되어 오히려 정감 있던 건물들은 가차 없이 헐리고 낯설고 뜨악한 ‘펜션’이라는 이름의 집들이 우후죽순 길섶에 늘어섰고 또한 공사 중에 있었다. 고묵은 옛것에서 배우던 지혜 따위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무엇으로 하여 오늘의 우리가 있는지 되새길만한 여유조차 없는 듯 건물들은 배타적이었으며 사납도록 크고 위압적이었다.


볕은 흐린 듯 밝은 듯 숲으로 비춰 들고 있었고, 장터목대피소까지의 길은 가까운 듯 멀었으나 재촉할 일이 아니었다. 수일 전 인터넷으로 대피소에 예약을 해둔 상태였고, 오후 5시까지 도착하기만 하면 되는, 백무동 매표소에서 장터목대피소까지의 산행길 예정시간은 3시간 30분으로 되어 있었으나 내게는 적용되지 않는 시간으로 가다 쉬다를 반복하며 한갓진 늦가을의 숲길을 늦된 짐승처럼 느리고 길게 호흡하면서 걸었다.


이끼 낀 계류에 앉아 맑은 술을 아껴 마시며 까마득하게 시간을 잊었으며 하산 길의 사람들을 만나 김밥과 떡을 얻어먹고 거기에 묵은지까지 얻었으며 오래 늙어 아름다운 소나무 밑둥에 기대 누워 사선으로 비껴드는 가을볕을 간잔지런하게 눈을 뜨고 온몸으로 받아 안으면서 귓가를 간지르는 조릿대 숲의 소리를 들었다. 무엇도 오래 머물지 않았으나 또한 어느 것도 허투루 흘러가지 않았다.

상흔처럼 알알이 가슴에 저미며 스며들어 주름이 되었다. 무량대복(無量大福)의 시간이었다.


조선의 유학자 남명 조식은 지리산을 오르면서 한번 흘러간 물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고 인생의 무상함을 생각하였다고 하였으나 그것은 어쩌면 인생의 덧없음으로 하여 오늘의 이 순간을 더욱 더 정진하며 잘 살라는 충고였으리라고 되새겼다.

 

다시 오지 않을 이 가을빛과, 청신한 숲의 바람과 그리고 사람의 온기를 그리워하며 숲의 정취를 사무치도록 만끽하였다. 헤아릴 수 없는 적요 속에 산 아랫동네의 소란분주 따위는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듯 하였으나 그것이 또 그렇지만도 않은 것은 다시 산 아랫마을로 돌아가야 하는 까닭에 있었다.

 


장터목대피소
놀민 놀민 걷는 동안, 귀청을 찢을 듯한 헬리콥터의 굉음으로 신경이 곤두섰다. 대피소 매점에서 팔고 있는 물품을 실어 나르는 수송헬기였다. 산마루로 향해갈수록 비를 품은 흘레구름은 두터워졌고 바람살도 몹시 거칠어졌다.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까마귀 몇 마리, 기류를 타고 놀이하듯 천연스레 비행을 하다가는 바람 속으로 종적을 감추고 없었다. 어쩌다 그늘진 곳에 답쌓여있는 첫눈의 잔설을 만나는 기쁨은 남달랐다.


산에 오르는 일은 선을 행하는 일만큼 어렵다고 한 옛 성현들의 말씀이 떠올랐다가는 다함없는 안개 속으로 흩어졌다. 대피소 건물은 구름 속에 섬처럼 떠있었고, 사납디 사나운 바람으로 대피소 밖의 산책은 어불성설이었다. 해가 떠 있었을 하늘은 늦저녁처럼 어두웠고, 금세 손발이 시려왔다. 바람으로 인해 피난민처럼 옹기종기 등산객들이 모여 앉아 있는 대피소 안으로 들어섰다. 탁한 공기로 인해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무릎을 가드라뜨리고 앉아 옆 사람이 나눠주는 육포를 씹었다. 짜고 매웠다. 자리배정까지 시간이 남았다.


남녀가 유별한 까닭인지 잠자리는 여자와 남자가 각기 다른 방을 썼으며 방은 마치 군대 내무반을 연상케 했다. 자리를 배정받고 배낭을 옮겨놓고서야 저녁밥을 지어먹을 엄두를 냈다. 물이 귀한 장터목대피소 취사장은 사뭇 진풍경이었다. 사람의 운김과 휴대용 가스버너의 열기가 빚어내는 풍경은 도떼기시장처럼 어수선산란하면서도 한편 이상한 친밀감이 배여나 짐짓 흥겹기까지 했다. 끼리끼리 지어먹는 저녁밥 사이를 건너 술잔들이 오고가고 반찬들이 넘나들었다. 길고 고단한 산행 끝에 마시는 한 잔 술과 맑은 차 한 잔은 새로웠다.


어떤 통제 속에 놓인 시간은 길고 지루하였으며 비상등 불빛과 낯선 잠자리는 괭이잠을 자게 했다. 손석풍 같은 바람은 맵짜게 휘몰아쳤고, 바람 속 안개들은 꿈결처럼 흘러 다녔다. 여명이 밝지 않은 새벽 5시의 산마루는 구름이 벗개지면서 달빛은 자지러지도록 환해졌다. 동행을 기다리는 사이, 보지 못했던 새집 같은 빨간 우체통이 눈에 뜨였다. 멀고도 가까이 있는 연인에게든 마음이 통하는 지기에게든 엽서 한 장 쓰고 싶어졌다.


천왕봉을 향해 갔다. 좁고 가파른 산길을 올라 등성이에 이르러서는 헤드랜턴을 껐다. 가깝고도 먼 숲길 사이로 반딧불이 같은 랜턴의 불빛들이 흔들리면서 줄느런히 다가왔고 또한 멀어져 갔다. 시리면서도 명징한 달빛과 별빛 사이, 눈물과 콧물로 범벅인 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아득한 시간의 처음을 생각했다. 날것의 짐승인 채 숲 속을 뛰놀던 부끄럼 없던 시절을 그리워했다. 산 아래 마을의 가로등 불빛조차 사뭇 애틋했다. 울멍줄멍한 바윗돌 틈을 걷는 사이, 먼데 지평선이 점차 환해져서 가까운 나무들을 식별할 수 있었다.



 

중산리 계곡
천왕봉 바윗돌 사이에 기대고 서서 동터올 해를 기다렸다. 따귀를 때리듯 바람은 사나웠고, 급강하한 기온으로 페트병의 물은 얼어붙었다. 아스라한 태고의 신비 같은 새벽 기운의 한편에는 왁자지껄한 시장판을 방불케 하는 소음이 난무했다. 무엇을 바라고 새벽잠을 줄여가며 강추위 속에서 애써 기다리는 것일까. 수많은 골과 마루를 거느린 지리산은 더할 수 없이 거대했고, 어디선가 이름 없이 역사 속으로 스러져간 어린 영혼의 음성 같은 새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일출 예정시간 십여 분을 넘긴 뒤에야 비로소 두터운 구름장을 뚫고 햇귀가 반짝 솟아올랐다. 주황빛의 불덩이가 감추고 있을 어떤 내면이 궁금했던 것처럼 햇살 뒤의 알 수 없는 무량한 공간 또한 몹시도 갑갑궁금했다. 웅혼한 우주 속 한 톨 명개 같은 인간의 그림자가 눈물겨웠다. 약속하지 않는 십여 분을 기다리지 못해 대피소로 돌아간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인간의 기다림이란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인가. 수억 광년을 건너와 유성으로 사라진 별들은 차라리 사치였다.


동살 비추는 기념 돌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 사이를 비켜 해를 등지고 서서 한없이 뻗어나간 등성이 끝 저 멀리 밝은 구름타래가 이룬 풍경을 바라보았다. 기이하면서도 더할 수 없이 신비로웠다. 앞만 보았더라면, 사방을 둘러보지 않았더라면 결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취재용 사진을 찍기 위해 장갑을 벗은 손은 시리다 못해 아팠다.

무엇도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없었다. 썰물처럼 사람들이 다 돌아간 천왕봉 봉우리를 마지막으로 떠났다.
중산리까지 내리막길은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는 대신 내내 강팔랐다. 굽이져 흐르는 진주 남강은 금빛으로 찬란하였고, 등성이 사이사이를 구름의 띠가 바람길을 따라 흘러서갔다. 한겨울 혹한 속 같았던 산마루를 차츰 벗어나자 이번에는 만추로 가득한 오색단풍의 풍광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청한 푸른빛은 눈물겹도록 시렸으며 무엇도 그립지 않은 바람결 가운데 어디에도 티끌 하나 물들지 않을 듯한 가을물 속에 마침내 두 발을 담그고 앉았다.

하루해가 이울 듯 어느 덧 저무는 한해를 목전에 두었다. 가고 싶었으나 원천봉쇄 당한 길도 있었고, 뜻하지 않았던 산길을 걸어도 보았다. 숲길에 만난 인연으로 내 삶의 풍경이 일신한 경우도 없지 않았고, 치를 떨며 걸어야 했던 여름 산길조차 이제는 아슴아슴한 추억이 되었다. 숲의 생멸이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듯 인간의 삶 또한 그냥 되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었다. 이것으로 또 저것으로 가느다란 누망처럼 얽히고설켜 있는 것이 바로 자연과 인간의 삶이 닮은 점일 것이었다.


세상이 아프면 내 몸도 그처럼 아픈 법이었다. 말한다고 하여 다 드러낼 수 없듯 또한 말하지 않는다고 하여 드러내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었다. 어느 숲길에서 잠시잠깐 스치더라도 무심히 지나치지 말고 가볍게 목례하며 서로를 격려하며 살아갈 수 있는 그러한 삶이었으면. 꽃들 새들, 나무들 짐승들 어느 것 하나 곱고 어여쁘지 않은 것 없듯 사람과 사람의 관계 또한 그와 같이 어여쁘게 맺어진다면, 한생이 조금 더 풍요로워질 것이었다.

 

 

사진 황석선

김 담
강원도 고성 출생
1991년 임수경통일문학상 소설부문 우수상 수상 작품집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현재 강원도 고성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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