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쓰는 민주주의
상당히 기분 나쁜 시대를 산 두 남자 본문
1983년 4월 15일은 나에게 참 기묘한 날이었다. 점심을 먹고 수면실(음악 감상실)에서 클래식을 자장가 삼아 한숨 자고 나와 문과대 건물인 서관으로 향했는데 한 학생이 건물에 밧줄로 매달려 있었다. 그 학생 머리 위에는 12시가 되면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래가 흘러나오는 시계탑이 빛나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진달래, 목련꽃, 개나리, 벚꽃 등 봄꽃들이 회색빛 오래된 석조 건물과 학생들을 아름답게 뒤덮고 있었다.
공중에 매달린 학생은 건물 벽에 뭐라고 쓰고 있었는데 긴장 때문인지 흔들리는 줄 때문인지 안정되게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반파쇼(독재 반대)를 쓰려고 했는데 ‘반’자를 쓰고 ‘파’자를 너무 오른쪽에 쓰는 바람에 ‘쇼’자를 중간에 써서 ‘반쇼파’(쇼파 반대)를 쓰고 말았다.
강당 안에서는 또 다른 학생이 유인물을 뿌리면서 횃불을 들고 뛰쳐나왔는데 그는 5분도 안돼서 숨어있던 사복경찰 4,5명에게 연행되었다. 건물 앞에는 구경하는 학생들이 있었고 일부 학생들은 강당에서 스크럼을 짜면서 뛰쳐나왔는데 수십 명의 사복경찰들에 의해 쫓겨서 흩어졌다. 이 모든 일들은 저속 카메라로 촬영하여 빨리 돌린 필름처럼 순식간에 일어났다. ‘반쇼파’를 썼던 학생도 또 다른 경찰들에 의해 끌어내려졌다.
학교 신문은 그 사건을 ‘디오게네스와 힐라리’라는 제목으로 실었다. 횃불을 든 학생과 밧줄을 탄 학생을 대낮에 촛불을 들고 진리를 찾아 헤매었던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와 에베레스트산을 처음으로 등정한 힐라리로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었다. 80학번이었던 그 디오게네스와 힐라리를 22년이 흐른 지금 찾아 나섰다.
디오게네스와 힐라리
한 남자는 충남 당진에서 살고 있었고 또 다른 남자는 경기도 화성에서 살고 있었다. 그때 당시 두 사람은 청계천에서 밧줄을 사고 가리방(수동 인쇄기)을 삼만 원에 사서 또 다른 남자의 집이 있는 마천동 뒷산 토굴에서 유인물을 만들었다고 했다. 횃불도 각목에 솜을 묶어 기름에 묻혀 비닐로 싸서 스포츠 가방에 넣어 두었다. 둘은 유인물 만들 때 의견이 달랐다. 그래서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여 각자 쓴 유인물을 기름종이에 필사하여 민 것을 학생들에게 뿌렸다고 했다.
그때는 대학 교정 곳곳에 많은 사복경찰들이 상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위가 쉽게 진압당하지 않는 방법, 즉 공중에 매달리거나 옥상에 올라가는 형태가 많았다. 때로는 몸에 칼을 지니고 자신을 방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시대적인 조건 때문에 시위의 형태도 기발한 것이 많았다. 어떤 학생은 신촌에서 문산 가는 기차를 타고 학생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신촌 굴다리를 지날 즈음에 기차 창문을 열고 유인물을 뿌리기도 했다. 시위를 하려고 하는 학생이 많아 적체현상을 빚기도 하여 한꺼번에 열 명이 데모를 주동하기도 했다. 재수가 없는(?) 주동자는 몇 번을 해도 안 잡혀서 잡힐 때까지 힘들게 주동을 계속하는 기현상을 낳기도 했다.
‘광주학살 원흉 파쇼정권과 미국을 타도하자’ 라는 내용의 유인물을 뿌렸던 두 남자는 경찰서에 잡혀 가서 많이 맞았다. 그날이 하필이면 김일성 생일이었던 것이다. 그 경찰서에는 악랄한 형사가
두 명이 있었다. 한 남자는 운이 좋게도(?) 악랄한 형사의 동생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덜 당해서 뺨 몇 대와 발바닥 몇 대를 맞는 것에 그쳤다.
그러나 또 다른 남자는 또 다른 악랄한 형사를 만나 뺨도 맞고 각목에 다리를 끼우는 고문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젊은 시절을 보냈던 그 시대가 ‘상당히 기분 나쁜 시대’이고 ‘산뜻한 기분으로 맞이할 수 없는 시대’라 했다.
자신 때문에 몇 번이나 반성문을 써야 했던 지도교수님에게도,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없었던 가족에게도, 늘 감시를 당했던 일반 학생들에게도 뺨을 얻어맞은 자신처럼 모두 인간적으로 대접받을 수 없는 기분 나쁜 시대였던 것이다. 그는 그 당시가 ‘위기의 시대였고 급박한 시대이기는 했지만 매우 건조하고 메마른 시대’였다고 했다. 그 시대에 자신들은 영웅도 아니었고 그냥 자신을 지키는 인간이고 싶었다고 했다. 둘은 5년 구형에 3년의 형을 받아 1년 동안 감옥에 있다가 1984년 유화국면 때 사면되어 풀려났다.
한 남자는 그 후로 부정투표로 야기된 구로구청 사건과 창원에서의 위장 취업 사건으로 세 번 더 감옥을 갔고 8년 동안의 노가다 생활을 거친 다음에 지금은 주택관리사 자격증을 따서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아버지는 막노동 일을, 어머니는 행상을 했던 관계로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동생들에게 밥을 해주고 청소를 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관리소장 일을 하면서 그는 주로 소령과 중령 등 퇴역한 군인출신들이 맡으면서 부패의 상징이 되어온 관리소장 직을 아파트 주민들을 위한 관리소장으로 새롭게 분위기를 만들었다. ‘참을 수 없는 과격함’(부인의 표현)으로 동 대표들의 부정과 싸우는 일상 속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
일상의 민주주의
노조활동을 했던 그의 부인도 주택관리사 자격증을 따서 임대아파트에서 관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녀는 노인들이 자신의 집에 못을 박아 달라고 할 만큼 아파트 주민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다.
부부는 사회운동하기 전의 첫 소원이었던 교사가 되기 위해 교육대학원을 함께 다녀 교사 자격증을 따서 시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고 했다. 자신들의 오랜 꿈이 불행한 시대와 생계문제에 부딪쳐 먼 길을 돌고 돌아 다시 첫 자리로 온 것이다.
한때 출판사에 다니면서 책 펴내는 일을 했던 또 다른 남자는 전도사로 일했으며 지금은 『케네디 평전』을 번역하고 있다. ‘가진 것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피땀 흘려 만들어놓은 역사의 성과물이 일부 사람들에게 집중됨으로써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힘들게 살고 있다. 역사라는 것이 이만큼 불공정하고 인생도 그만큼 불공정하다. 그래서 우리들의 신화는 씁쓸한 이야기’라는 그
그렇지만 그는 류시화의 ‘그때 이런 걸 알았더라면’의 시구처럼 이 결과를 알았더라도 과연 또 할까, 스스로 물어보면서 그래도 아마 다시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이번에는 한번 겪었으니까 더 유쾌하게 할 것 같다고 말하며 웃었다.
<글 / 김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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