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쓰는 민주주의
안양유원지 쌍쌍파티 본문
질풍노도의 100일이었다. 1971년 3월부터 5월까지 대학가는 극심한 몸살을 앓았다. 최루탄과 돌멩이가 사라질 날이 없었고, 예전에는 잘 볼 수 없었던 기상천외한 사건이 벌어졌다. 가두시위, 투석전, 휴교, 휴강, 제명, 무기정학, 연행, 구속, 수배로 얼룩진 나날이 계속됐다.
학사일정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주범은 정부 당국의 교련교육 강화 조치와 3선개헌에 의해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였다. 학생들은 교련 반대를 이슈로 극렬한 데모를 벌였고, 선거 부정을 감시하기 위해 참관인단을 각 지역에 파견했다. 대학생들의 이런 적극적인 움직임이 정국 긴장을 한층 고조시켰다.
학기 초에 한 신문사 앞에서 벌어진 사이비 언론 화형식과 각 대학에서 결행된 교련복 및 군화 화형식은 그 후 전개될 학생과 언론인의 험난한 민주화 도정을 예고한 사건이었다. 예사롭지 않은 사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4월에는 집총한 경찰이 캠퍼스에 난입한 사건이 터졌고, 다음날 한 대학의 시위 진압에 헬리콥터가 뜨는 일도 발생했다. 학생들이 야당 당사를 점거해 농성을 벌인 사건도 이 시기에 일어났다.
이런 사태를 주도한 학생운동 지도부를 대거 구속·제명·수배함으로써 어지럽던 대학가가 어느 정도 조용해진 시점인 그해 6월 초순이었다. 일요일 아침 이른 시각에 서울 경복궁 후문에서 버스 한 대가 출발했다. 20여 명이 탄 이 버스는 한강인도교를 건너 곧장 안양 쪽으로 내달렸다.
이들이 하차한 곳은 안양유원지였다. 버스에서 내리는 이들의 차림새나 태도로 보아서는 영락없이 짝을 지어 야유회를 나온 젊은이들처럼 보였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짝을 이뤄 이야기를 나누며 유원지 안으로 사라졌다.
유원지에서 계곡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서울농대 연습림이 나온다. 그곳에는 행락객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작은 댐이 하나 있었다. 여름철에는 물이 차 있지만 평소에는 바닥을 드러내곤 하는 저수지였다. 아베크족 무리는 그 위쪽에 한적하고 놀기 좋은 잔디밭이 있다는 것을 아는 듯했다.
20여 명의 남녀가 짝을 지어 잔디밭에 빙 둘러앉은 모습은 매우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였다. 무리 속에서 간간히 웃음과 탄성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게임을 하거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거나 무심한 표정으로 힐끗 한번 쳐다볼 뿐 이들을 특별히 주목하지 않았다. 어떤 심각한 분위기도 음모의 냄새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이들의 면면을 보거나 대화를 엿듣는다면 사정은 달라질 것이다. 이들은 주요 대학 학생회장이나 학내 유명 활동가들이었고, 30여 년 후 장관, 국회의원 등 사회 지도층 인사가 될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그해 상반기 학생운동을 이끈 지도부가 제명·수배 등으로 궤멸된 상태에서 조직을 복원하고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해 이렇게 쌍쌍파티를 위장해 모임을 가진 것이다.
이들이 짝을 지어 모임을 가진 것은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학교가 휴교하고 많은 학생이 지명수배된 상황에서 젊은이들이 무리를 이뤄 움직였다가는 주변의 눈길을 끌어 금방 경찰 정보망에 포착될 터였다.
여학생들을 모임에 끌어들이면 이런 의심을 차단할 수 있었다. 마침 여자대학에도 의식화된 서클이 조직되고 다른 대학과 연대활동도 이뤄지던 시절이라 큰 어려움은 없었다.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여자를 이용한 사례는 민주화운동의 과정에서 자주 발견된다. 학내 시위 주동자가 다른 사람과 옷을 바꿔 입고 후배 여학생의 팔짱을 끼고 유유히 정문을 통해 학교를 빠져나간 예가 실제로 있었다. 가두에서 유인물을 뿌리다 경찰에 발각되자 군중 속에 뛰어들어 지나가는 여성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잠시만 애인이 돼 달라”고 해 위기를 넘긴 경우도 있었다.
‘안양유원지 쌍쌍파티’는 민주화운동에서 ‘남녀 공조’가 이뤄진 출발점이라고 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이들 세대를 전후해 학생운동권에는 많은 여성운동가가 배출되고 운동권 커플도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안양유원지 모임 참석자 대부분도 뒷날 운동권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운동권 커플은 남녀 간의 사랑 외에 동지적 유대감을 간직한 점에서 이상적인 결합이었다. 의도적으로 운동을 하는 상대를 피한 경우도 있지만 상당수는 운동권을 생의 반려자로 선택했고, 이들은 ‘동지적 유대가 없었다면 서로가 그 혹독한 시절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회고한다.
안양유원지 모임은 학생운동사에서 최초로 전국 규모 대학의 ‘단일대오’를 성사시킨 점에서도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학생운동권은 이원적 형태로 대학 간 연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 하나는 각 대학 학생회나 민주수호투쟁위원회 등의 이름으로 집회·시위를 주도한 조직 간의 연대였다. 다른 하나는 각 대학 이념서클 간의 교류를 통해 이뤄진 공조체제였다.
그해 상반기 강력한 투쟁력을 보인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과 범대학민권쟁취청년단 등 이런 연대조직은 추구하는 목표는 같았지만 투쟁 방법이나 수위 등에서 노선 차이를 보였고, 주도권을 놓고 보이지 않게 갈등하는 측면도 있었다. 안양유원지 모임은 여러 조직과 노선의 차이를 수렴, 전국학생연맹(전학련)이라는 하나의 조직체로 통합하는 결론을 이끌어낸 이벤트였다. 이 과정에서 파트너로 참석한 여학생들의 조정자로서의 역할이 컸음은 물론이다.
전학련은 그 후 ‘중앙정보부 해체’를 주장하는 등 하반기의 지속적인 강경투쟁을 선도하게 된다. 그해 10월 위수령 발동과 함께 해체될 때까지 4개월여의 짧은 활동에 그치지만 그 정신은 민청학련, 긴급조치 9호 시대, 1980년대까지 이어진다.
안양유원지 회합 참석자 대부분은 위수령 발동 후 군에 강제징집되고, 그 뒤 크고 작은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다. 파트너로 참석한 여학생들도 상당수는 감옥살이를 하거나 민주화 도정에서 험난한 길을 걷게 된다.
초여름 메마른 저수지 위 잔디밭에서 열린 쌍쌍파티는 겉표지만 에로물인 시대극이었다.
글 / 신동호 경향신문 뉴스메이커 편집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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