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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칼럼/인터뷰/문화초대석

목수망치 사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12. 23. 11:33

누구는 여름날이면 이십년 전 사건을 떠올린다. 더울수록 그 기억을 새록새록 떠올리며 더위를 식힌다. 납량특집도 그런 납량특집이 없다. 무시무시한 기억이다. 소름이 쫙 끼친다. 그러다가 종래에는 더 더워진다. 부르르 주먹을 떨다가도 이내 맥을 놓는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한숨을 쉬며 빙그레 웃고 만다. 부질없다는 듯 입맛을 쩍쩍 다시는 것도 싱거워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다 지난 일이다.


1986년이면 제5공화국의 전횡이 가히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였다. 당시 민심은 미국의 자본, 금융, 상품시장 개방 강요를 위한 갖은 압력으로 인하여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굴욕적이게도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은 하수인 노릇을 자처하였다. 이른바 ‘5·3 인천민주화운동’ 등 민족자주·민중민주세력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농민, 노동자, 학생, 민주인사들에게 갖은 고문을 통해 용공조작과 구속을 서슴없이 저지르던 시절이었다.


농민들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도처에서 목숨을 끊었다. 수입 소고기 파동으로 소 값은 똥값이 되었다. 정부에서 권장한 소 사육의 꿈으로 부풀어 있던 농민들은 뒤통수를 맞고 나가 떨어졌다. 자포자기한 농민들은 소를 때려잡아 빚잔치를 벌였다. 그때만큼 농촌에서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한 때가 있었을까. 그렇게 탈탈 털고 후식(?)으로 농약을 마시는 경우도 있었다.

 

수입 소고기 파동
궁벽한 경상도 산간 오지 소도시인 안동에까지 최루탄이 입성하여 처음으로 매운 맛을 퍼뜨린 것도 1986년의 일이었다. 근 10년 동안 활동을 꾸준하게 펼쳐온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의 ‘성과’ 중 하나였다. 또한 안동농민회와 연대활동을 벌이던 안동대학교 학생들 중 10여 명은 5?3 인천민주화운동으로 수배를 받고 있던 무렵이었다. 그때 ‘목수망치 사건’이 터졌다.
7월 20일 일요일이었다. 삼복더위가 시작되고 모두들 산으로 들로 피서를 떠난 한가로운 휴일이었다. 안동농민회관에서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 주최로 농촌문제 해결을 위한 지도자 연수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 자리에 안동대학교 학생들이 농축산물 수입반대를 주제로 한 마당극을 올리기로 했다. 농민회관에서는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고 마당극패는 강변에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살인 농정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농민 죽이고 나라 망치는 농축산물수입정책 즉각 중단하라!”
이런 점잖은 구호를 외치는가 하면, “레이건을 박살내고 전두환을 때려잡자!” 등 사뭇 선정적인 구호도 곁들인 마당극 최종 리허설을 하고 있을 때였다. 종이로 만든 미사일로 성조기를 두른 백악관 관장에게 똥칼을 먹이는 장면도 있었다.
그때 20대 청년 두 명이 한 판 시원하게 수영을 하고 나와 구경을 했다. 마당극패가 풍물을 두드리며 신명나게 노는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풍물소리에 맞춰 제법 추임새도 넣으며 어깨춤을 추기도 했다. 그런데 갈수록 내용이 그들에게는 심상찮았던지 시비를 걸었다.


“야, 요것들 봐라! 이제 보니 순 빨갱이 새끼들이네!”
“이 새끼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지랄들이여!”
그러나 운동권 마당극패라고 어디 만만한가. 그들을 얼러 쫓아버렸다.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모두들 땀을 뻘뻘 흘려가며 연습을 마치고 농민회관으로 향했다.
“어! 아까 그 놈인데, 한 판 붙자는 모양인데?”
아닌 게 아니라 그 중 한 청년이 방죽 위에서 비비화 신발 끈을 고쳐 매며 노려보고 있었다. 그 청년은 이소룡 같은 폼으로 선제공격을 했다. 마당극패도 뒤질 새라 북채와 쪽수로 밀어붙이며 천방으로 올라섰다. 티격태격하며 몇 합씩 주고받는데 멀리서 한 청년이 무언가를 돌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비비화 신발과 한패인 그 청년이었다. 그는 마치 로데오의 사나이처럼 머리 위로 무언가를 휘돌리며 오는데 맙소사, 자루가 길고 날렵하게 생겨 먹은 목수망치였다.
그때부터 사태는 역전이 되고 말았다


“여자들은 빨리 피해.”
삽시간에 들이닥친 망치 세례로 마당극패는 사분오열 오합지졸이 되었다. 패를 이끌던 수장은 북채로 합을 겨루며 수차례 가격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머리에 한 방 맞고 그로기였다. 로데오는 닥치는 대로 망치를 휘둘렀다.
‘척후병’이 사태가 심상찮음을 알고 농민회관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 중 용감한 운동권 선배 하나가 달려 나왔다. 마침 농민회관 진입로 가로수 부목으로 대어 놓은 긴 쇠파이프를 뽑아 휘두르며 대항했다. 그러나 긴 무기는 다음 동작이 어려웠다. 로데오는 한 방 맞고 달려들어 두 방 때렸다. 머리와 등짝 할 것 없이 무차별 가격이었다. 그때 교육을 받던 농민들이 우르르 달려 나오자 그들은 퇴각했다.
부상자 3명은 즉각 안동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사태가 진정되고 마당극을 올렸지만 주요 출연자의 부상으로 기가 막힌 상황이 연출되었다. 배우 하나는 아예 대본을 들고 읽을 수밖에 없었다. 마치 대본에 대본을 들고 읽으라는 지문이 있는 것처럼.

 

기가 막힌 상황의 마당극
얼이 빠진 한 배우는 전두환의 가방을 들고 따라다니면서 시종 실수를 저질렀다. 전두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러게나 말입니다. 홍홍.” 해야 하는데 계속 “그러나게 말입니다. 홍홍”을 연발했다. 그 덕분에 전두환 역을 맡은 배우에게 “그러나게가 아니고 그러게나 라니까, 그러게나!”라는 핀잔을 들으며 연신 두들겨 맞았다. 그래도 정신이 안 드는지 “그러나게 말입니다. 홍홍”이 계속 이어져 나왔다.
그때를 생각하니 한번은 소름이, 한번은 분노가, 한번은 웃음이 스쳐 지나간다. 공권력 앞에서는 그렇게도 용감하던 마당극패들이 시민의 망치에는 약한 모습을 보인 경우였다. 누군가도 쇠파이프를 뽑아 들었지만, 한 차례도 가격하지 못하고 맞기만 하였다.


그 사건은 합의로 끝났지만, 단순 폭력 사건의 조서를 정보과의 낯익은 형사들이 꾸몄다. 그러나 그 청년들이 지불하겠다던 치료비는 아직도 미불로 남아 있다. 그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같은 세대의 다른 모습은 그 시대의 씁쓸한 삽화로 아직 누군가의 머리에 새겨져 있다.

 

 

글 안상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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