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쓰는 민주주의
소백산과 죽령을 오고가다 본문
어린 풀꽃들이 아등그러지는 한여름 뙤약볕 속이었다. 소백산 희방사매표소 입구까지 찾아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시내버스와 직행버스를 무려 여섯 번을 갈아타고서야 간신히 그곳에 닿을 수 있었다. 모든 도로는 서울을 향해 있었고, 변방에서 변방으로 뚫어놓은 도로들 또한 궁극은 중앙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강원도 거진읍에서 경북 풍기읍의 희방사까지 길은 힘에 겨웠다. 때맞춰 여름휴가의 막바지 피서인파와 겹치는 바람에 단양버스터미널에서 요기를 하려던 콩국수를 딱 한 젓가락 입에 넣고서는 부리나케 풍기로 향하는 버스를 향해 뛰어야 했다.
예정시간보다 두 시간 연착이었고, 언제 다음 버스가 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안내에 따른 결과였다. 고속도로가 밀리는 것과는 정반대로 시외버스터미널은 한겨울 원두막처럼 텅 비었으나 온달산성을 향해 가려던 걸음을 두 번 다시 생각할 것 없이 거두어들였다. 아스팔트는 뙤약볕 속에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었으며 버스 안의 에어컨 바람 또한 후텁지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찌물쿠는 땀 속에 정신은 흐트러졌고, 차창 밖의 풍경들 역시 미욱해 보였다. 달리는 버스 안에 앉아 차표를 확인하니 ‘풍기’가 아니라 ‘영주’였으며 불행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연속되었다.
두세 번 거듭 확인하는 과정에서 지청구를 들어가면서 풍기에서 내렸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희방사행 버스 타는 곳을 물었다. 차표를 팔고 있던 수다한 할머니께서 엉뚱한 곳을 일러주어 이번에는 걷지 않아도 되는 길을 한참 걷고 난 뒤에 가까스로 희방사행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오고가는 사람 없는 버스 정류장에 무방비로 볕을 피해 의자에 앉았으나 머릿속은 번철 위의 기름처럼 자글자글 들끓었다. 무엇보다 배가 고팠으며 하다못해 흔한 빵집조차 눈에 띄지 않았고, 걸음을 옮기는 것조차 귀찮았던 까닭에 가만히 넋을 놓고 앉았다.
어느 해 여름, 소백산 산행에 나섰으나 끝내 ‘희방계곡’까지도 오르지 못하고 되돌아서 풍기읍내 냇가에 누워 산행에 나선 일행들을 기다려야 했던 행복하지 않았던 이력까지 겹쳐 떠올랐고, 대체 어느 곳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수다한 할머니에 따르면 희방사 매표소 부근에 가면 자는 곳, 먹는 곳 널렸으니 쓸데없는 걱정 따위는 하지 말라고 했으나 이미 믿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버스 종점이기도 한 희방사 매표소 앞에서 버스를 내렸다. 오후 3시, 산행을 하기에는 늦은 시간이었고 하릴없이 휴식을 취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죽령휴게소 민박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모텔은 성수기이면서 주말이라는 이유로 2인 1실 5만원의 숙박료를 요구하면서도 한껏 생색을 냈다. 시간 반 남짓 구불구불한 길을 걸어 죽령휴게소에 닿았다. 영남의 관문이면서 호서와 경계를 나누는 길머리로써 죽령은 철도와 고속도로에 밀려 구실의 쇠퇴를 피할 수 없었으나 고개를 넘나드는 인마의 흔적은 여태도 뚜렷하였다. 휴게소 민박집은 단체손님을 받은 까닭에 내어줄 방이 없단다. 고개 주변에서 노점하는 아주머니들께 부탁하면 하룻밤 민박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조언을 들었으나 오던 길을 되짚어 다시 희방사 매표소 입구를 향해 걸으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사위질빵 꽃그늘 아래 앉아서 더운 땀을 식히며 쉬었어도 좋았을 것을. 액땜은 이쯤하면 되었다 싶었다.
비로봉을 향해 나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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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등마루를 나눠 가지면서 저쪽과 이쪽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영 뜨악한 일이었으나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어스름 새벽의 기운을 느낄 사이도 없이 희방계곡의 야영객들이 내놓은 쓰레기더미와 오물로 인한 악취에 떠밀려 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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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수를 준비하는 동안 만(卍)자를 새긴 난간 아래서 잠자리를 잡아 아침을 먹는 다람쥐와 눈길이 마주쳤다. 누구의 먹이가 되기도 하고 또 무엇을 먹어야 살 수 있는 것은 수수만년 이어온 생명활동의 법칙일 것이다.
신들메를 고쳐 매고, 배낭을 가든하게 정돈했다. 어느 봉우리까지 거리가 짧다는 것은 가풀막 길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이미 산행(山行)이 아니라 등반(登攀)이었다. 훼손된 등산로를 복구하면서 계단을 만들었고, 지금도 나무계단 공사가 한창이었다. 쇠파이프를 자르는 불보라가 사방으로 훌뿌려졌다. 숲은 노각나무, 약재로 수난을 당하고 있는 느릅나무, 야광나무, 황벽나무, 물푸레나무 등 넓은잎나무로 울창하였다. 아침 볕뉘의 기운이 도드라져 빛나는 순간도 잠시 삽시간에 안개가 몰려들어 숲은 밤처럼 어두워졌다, 햇귀 솟는 아침처럼 환해졌다, 반복하였다.
연화봉에 이르렀다. 떼를 지어온 어느 산악회 회원들의 기념촬영이 한창이었다. 일사천리, 속전속결로 기념사진을 찍은 다음 쏜살같이 앞을 향해 치달아갔다. 양손으로 스틱을 찍으면서 마치 경주를 하는 토끼들처럼 내달려갔다. 길섶에 멈춰 서서 일행들이 지나가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오고간다는 소식 없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때서야 비로소 안도하면서 무리지어 핀 연분홍빛 둥근이질풀과 눈 맞출 수 있었다.
이질풀은 옛 시절 전염성 병균인 이질이 발생했을 때 민간에서 약용으로 쓰던 풀로 그 쓰임새 그대로 이름이 된 경우다. 서장초라고도 불리는 까닭은 풀의 잎이 쥐의 손과 닮았기 때문이다. 우리 산하에 자라는 어떤 풀도 약용 가능하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겠으나 어떤 설사병에도 이질풀을 달여 마시면 말끔하게 듣는 덕분에 일본에서는 5대 민간 영약으로 친다고도 하며 또한 우리 민간에서는 종기와 피부병에 사용하던 풀이라고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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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하는 사이, 알고도 모르는 척 하는 사이, 이권에 밝은 다른 나라에 우리 것 다 내어주고 거꾸로 우리 것을 이용하여 만든 것들을 이제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역수입하는 일이 다반사이니 우리 산하에 자생하는 식물의 종자주권을 지켜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내 주머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아보는 것이 순서인 것처럼 우리 산하에 무엇이 죽고 살아왔는지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임은 두말할 필요 없다. 그런 다음 관계의 평등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일 테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 야기되는 불평등한 관계의 고리를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것은 아마도 필연일 것이다.
산등성이 길을 걷고 또 걷고
멀리, 말의 갈기처럼 흘러 다니는 안개들 사이로 휘우듬하게 굽어진 등성이길 끝에 비로봉의 산마루가 아슴푸레하게 들어왔다.
산의 기스락에서 만난 호랑버들, 노각나무, 검팽나무, 서어나무, 느릅나무, 야광나무, 황벽나무, 사스래나무, 복장나무는 등성이길에서는 흔히 볼 수 없었다. 흔치 않기로는 소나무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넓은잎나무들이 숲의 우듬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남녘에는 ‘소나무 에이즈’라고 불리는 소나무 재선충병으로 소나무들이 시뻘겋게 말라 죽어가고 있으며, 지구온난화의 결과로 수십 년 뒤면 쉽게 소나무를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 섞인 걱정이 결코 빈말이 아님을 확인하는 자리가 편할 리 없었다. 비로봉 아래 주목군락지 또한 울타리 밖에서 구경해야 하는 까닭에 나무의 질감은 말할 나위 없었고, 수형조차 확인할 수 없는 것 역시 또 다른 안타까움이었다.
나무가 없는 산을 좀처럼 상상할 수 없었으나 소백산 비로봉 주변에는 풀밭일 뿐, 나무 한 그루 볼 수 없는 민둥산이었다. 숲은 수풀, 즉 나무와 풀이 있어서 온전한 숲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백산 등성이길에는 바람이 넘나드는 길은 있었으나 꽃과 나비가 어우러지는 숲은 없었던 것이다.
사진 황석선
글 김 담
강원도 고성 출생
1991년 임수경통일문학상 소설부문 우수상 수상 작품집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현재 강원도 고성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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