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인물/칼럼/인터뷰/문화초대석 (150)
함께쓰는 민주주의
우리 눈이 만들어내는 시각적 착각을 착시현상이라고 한다. 누구나 체험할 수 있으며 그 원인과 조건을 알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신학철 화백의 가 그렇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시각적 착각 그 자체라기보다는 우리 현대사가 빚어낸 질곡의 기억이 만들어 낸 것이다. 질곡의 기억이 만들어 낸 착시 현상. 우리는 를 통해 그런 현상에 빠져 들었다. 신 화백의 는 1989년 이후 거듭된 재판 과정의 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사건을 잠시 살펴보면, 이 그림은 1987년에 제작되어 1989년 ‘통일염원 전’에 출품되었다가 공안당국에 의해 작가의 체포와 작품 압수로 사건화 되었다. 1, 2심에서의 무죄판결은 최종적으로 대법원의 유죄판결로 작가에 대한 선고유예가 내려졌다. 이후 2004년 UN인권위원회의 작품반환 및 ..
“우리 딸 이름도 이오수린이에요.” 부모 성 함께 쓰기를 하는 기자를 만나자 그는 만으로 여섯 살배기 딸 이름으로 인사를 건넸다. “물론 호적에서는 (어머니 성을 함께 쓰도록) 안 바꿔 줘서 우리끼리 그렇게 부르죠.” 그렇게 덧붙이더니 “요즘 딸이 왜 내 이름만 네 자냐고 물으면서 반항한다.”며 웃었다. 그렇게 서른아홉의 오지혜 씨는 유명한 배우이기 전에 당당한 ‘아줌마’였다. 알다시피 이 아줌마는 연기의 달인일 뿐 아니라 달필도 지녔다. 그는 에 연재한 우리시대 ‘쟁이’들의 인터뷰를 모아서 지난해 『딴따라라서 좋다』라는 책을 펴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사회를 고민하고, 세상에 발언하는 배우를 얻었다. 어쩌면 대한민국 유사 이래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 이렇게 오지혜는 스스로 ‘한국 사회가 그래도 좋..
지금은 개발이 되어 흔적조차 찾기 어렵게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세종문화회관 뒤편에는 멋진 한옥들이 꽤 많이 남아 있었다. 당주동이라 했던가. 1979년 어느 날, 거기 사는 벗의 집에서 나는 눈이 번쩍 뜨이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황토』(한얼문고, 1970). 그것도 김지하 시인이 엠네스티(국제사면위원회) 활동을 하던 벗의 부친에게 직접 서명까지 해준 시집이었다. 아아, 빨간 표지가 선명한 그 시집을 꺼내 들었을 때의 그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이라니!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김지하의 시 한 편을 온전히 읽은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이런저런 평론에서 토막으로 인용된 시 몇 줄을 겨우 훔쳐 읽곤 했을 뿐이었다. 김지하는 말 그대로 지하의 인물, 밝은 대낮 햇볕 속에서 공공연히 거론해서는 안 되는 금기 그 자..
설레임 그랬다. 사춘기적 감성처럼 묘한 설레임이 가슴을 뭉클거리게 했다. 발제자와 토론자들 면면이 묵직한, 그래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 보이는 시대의 색다른 어둠을 뚫고 나갈 송곳 같은 메시지를 기대하게 했다. 1980년대 중반쯤, 정경모 선생의 『찢겨진 산하』가 던져 준 충격적인 감동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면 너무 허풍 떠는 것인가. 지난 2002년도 일로 기억된다. 그이는 남북이 분단된 조국에, 그것도 검열을 통과하고 들어와야 하는 남쪽의 초청에 응하지 않았다. 그 꼬장꼬장한 줏대가 다시 떠올랐다. 무슨 말씀들을 들려주실 것인가. 지난 6·15기념 광주행사에서 지근거리로 뵈었던 백낙청 선생의 말도 상당히 기대되었다. 북측이 핵실험을 하고 난 뒤 선생은 이미 어떤 매체에 특유의 어법으로 북의 핵..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다양한 변화와 움직임을 민주화와 산업화의 관점에서 보여주는 「광복 60년 기념전-시련과 전진」이 지난 달 14일(일)부터 28일(일)까지 15일 동안 국회에서 열렸다. 국무총리실 산하 「광복6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의 사업으로 진행된 이번 기념전은 지난 60년 세월의 치열한 삶의 궤적을 통해 거룩한 시련의 과거를 회고하고, 현재를 성찰하며 위대한 전진의 미래를 다짐하자는 의미가 깔려있는 전시다. 특히 국회 이전 30주년을 맞아 국회의 문이 유례없이 큰 규모로 활짝 열렸다는 것에 더 의미 있다 하겠다. 국회에서 이 같은 전시가 있었던 것은 아마도 처음이지 않나 싶다. 여의도를 지날 때 마다 저 멀리 국회 건물의 기이한 지붕이 눈에 띄고 그 버섯 같고 혹..
입동이 지난 요즘 이곳 신지도에 사람들이 꽤 찾아옵니다. 학꽁치를 잡으러 오는 낚시꾼들인데 평일에도 적지 않게 옵니다. 주말이면 날씨와 상관없이 학꽁치 낚시터엔 비집고 들어갈 틈 없이 그야말로 만원사례입니다. 전문 낚시꾼이 아닌 경우가 더 많은 듯해 보입니다. 바람 불고 너울 센 날에는 입질이 잦지 않다는 데도 그렇습니다. 제 철을 만난 것이지요. 동해안 쪽에선 봄철에 많이 낚이는 어종인데 남해안에서는 10월부터 11월 사이에 잡습니다. 갈매기도 학꽁치를 낚아 채가기도 합니다. 수면 가까이서 유영하는 학꽁치를 부리로 물고 날아가는 장면이 종종 목격됩니다. 워낙 잘 낚이어 마릿수 또한 만만치 않은 터라, 사람들 사이에 입소문이 났다고 합니다. 서울 번호판이 붙은 차까지 보입니다. 지난 주말에는 형님과 친구..
송 형(兄)! 며칠 전, 안부 끝에 ‘다리 언제 개통하느냐’고 물으셨지요? 그 전화 받고, 언제쯤이라고 누군가 알려준 시기를 전해주면서도 딴에는 공사가 지연되고 또 몇 차례나 임시 개통이 이뤄지지 않은 탓에 정작 언제일까? 저도 곰곰히 생각하고 있는데, 동료 중 한 분이 저녁 어스름에 개통되기 전의 신지대교(완도와 신지도 간의 연륙교)를 한 번 건너볼 동지들 모집한다며 엄지손가락을 내보이더군요. 거기 잡으면 한 패가 되는 거잖아요. 좋을 듯싶어 엄지손가락 잡는 시늉을 해보였습니다. 동료 몇이서 다리를 건넜습니다. 바람이 세차게 불더군요. 아주 강하게 불면, 물살 빠른 해협 가운데로 날아가 버릴 지도 모르겠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띄었습니다. 아래로 내려다보려는데 무서움증이 확 다가..
아침 들녘에 산책을 나갔습니다. 한가위가 지난 들녘이지만, 곡식이 아직 무르익진 않았습니다. 올 추석은 예년보다 빠르게 찾아와 그렇습니다. 설익은 곡식들이 이른 절기를 말해 줍니다. 곧 익겠지요. 넉넉하진 않으나 한가로운 풍경입니다. 여느 섬인들 이처럼 유유자적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들녘 끝 어디에서건 만나게 되는 신지도의 바닷가에 서면 서러운 상념들이 떠오를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 곳 신지도에 깃들어 있는 유배지로서의 역사가 아련히 다가오는 까닭입니다. 섬의 이름마저 상흔을 간직한 곳이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역사의 상흔이 깃든 섬 신지도란 이름은 본래 지도(智島)였습니다. 같은 지명을 지닌 곳이 또 있는데, 나주의 지도라는 곳이지요. 오래전 나주는 전라도에서 두 번째로 큰 고을이었습니다. 나주목(..
여름은, 지금 겪는 여름이 제일 덥게 느껴집니다. 몇 십 년 만의 폭염이라고 해마다 방송에선 호들갑을 떨곤 하지만, 올 여름보다 덜 더웠던 듯이 기억되곤 합니다. 입추가 지난 지 꽤 되었음에도 한낮 더위는 여전합니다. 바닷바람까지 불어오는 이곳 신지도 역시 풀무질하고 있는 대장간 속 같습니다. 이런 더위 속에 중학교 운동장에서 잔치가 열렸습니다. 섬 전체가 들떠 하루 종일 달리기와 씨름, 줄다리기에다 술추렴 판이 이어졌습니다. 각 리 단위의 차일이 십수 개 펼쳐져 있습니다. 운동장 주위 담벼락과 나무들 사이에 마을 사람 모두 나온 듯이 빼곡합니다. 작은 마을은 작은 마을답게, 큰 마을은 또한 큰 마을이랍시고 거들먹거리지 않고 수굿하게 모여 앉아 있습니다. 1만 명 넘던 인구가 4,000여 명으로 줄어 든..
친구 이병천의 소설 『사냥』의 표제작 「사냥」에는 날짐승, 들짐승, 물고기 등속을 잡는 여러 형태의 방법이 나옵니다. 은어를 낚는 법, 약빠른 여우는 어떻게 잡는가, 물코라는 덫을 외나무다리에 놓아 족제비를 유혹하는 과정이며 겨울날 펑펑 내린 눈 속의 꿩을 곤경에 빠뜨리는 풍경 등등. 스타일리스트답게 아주 산뜻하고 유려한 문체로 그려 놓았습니다. 거기에 ‘세상의 모든 것과는 반대로 사냥은 원시적인 형태일수록 문화성을 갖는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여름철, 모래밭이나 질퍽한 뻘밭 혹은 연근해에서 숭어와 멸치, 낙지, 모래고동, 대합 등 어패류를 낚거나 캐는 장면을 보노라면 그 말이 딱 들어맞는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일전에 동료 한 분이 학교에 그물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혹여 애들 데리고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