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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칼럼/인터뷰/문화초대석

지적인 배우, 딴따라라서 행복한 오지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9. 1. 16. 11:22
  “우리 딸 이름도 이오수린이에요.”
부모 성 함께 쓰기를 하는 기자를 만나자 그는 만으로 여섯 살배기 딸 이름으로 인사를 건넸다. “물론 호적에서는 (어머니 성을 함께 쓰도록) 안 바꿔 줘서 우리끼리 그렇게 부르죠.” 그렇게 덧붙이더니 “요즘 딸이 왜 내 이름만 네 자냐고 물으면서 반항한다.”며 웃었다.
그렇게 서른아홉의 오지혜 씨는 유명한 배우이기 전에 당당한 ‘아줌마’였다. 알다시피 이 아줌마는 연기의 달인일 뿐 아니라 달필도 지녔다. 그는 <한겨레21>에 연재한 우리시대 ‘쟁이’들의 인터뷰를 모아서 지난해 『딴따라라서 좋다』라는 책을 펴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사회를 고민하고, 세상에 발언하는 배우를 얻었다. 어쩌면 대한민국 유사 이래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 이렇게 오지혜는 스스로 ‘한국 사회가 그래도 좋아졌다’는 증거가 되었다.


아줌마의 수다는 거침이 없었다. “참, 제발 ‘우리가’라고 하지 말아 줬으면 해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주최한 행사에서 몇 번 사회를 보았다는 오지혜 씨는 “사회를 볼 때, 항상 ‘우리가 해냈다’라고 읽으면서 마음이 쓰였다.”고 말했다. 자신은 ‘우리가’라는 주어의 주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난 아니에요. 연애만 하던 여대생이었어요. 관심은 있었지만 나서지는 않았어요. 학교문제 말고는 시국집회에 나간 적도 없었어요. 그런데 자꾸 ‘우리가’라고 하니까 어쩐지 불편해요.” 그리고 덧붙인다. “물론 여러분께 너무나 감사해요. 여러분 덕분에 저도 불심검문 당하지 않고 거리를 활보하고, 라디오에서도 하고 싶은 이야기 다하는 세상이 됐죠.”

배우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 뿐

배우 오지혜는 자신을 ‘운동가’로 보는 시선에 조금은 지쳤다. 그는 민주노동당 당원으로 커밍아웃했고, 파병반대 1인시위에 나섰으며, 시민사회 단체가 주최하는 집회의 사회를 맡았다. 그러면서 이중의 갑갑함을 느꼈다고 한다. 사회단체에 가면 너무나 엄숙한 분위기에 불편했고, 어떤 사람들로부터는 “정치하려고 그러느냐?”는 불편한 질문도 받았다. 서서히 지쳐갔고, 이제는 살살해야지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솔직히 평생을 크리에이티브한 분위기에서 살다가 갑자기 무언가를 주장하는 일에 연루됐다.”며 아지(agitation)가 끝나면 솔직히 허무함도 느낀다고 말했다.

물론 딸이 살아갈 세상을 조금 더 좋게 만들고 싶고, 딸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희망은 여전하다. 하지만 무언가에 ‘올인’ 하는 일은 자신의 체질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몸을 사리겠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에서도, 운동에서도 원래 마음에 두었던 컨셉을 잊지 않고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다짐한다. 초심을 잊으면 수단과 목적이 전도된다는 것이다. “사실 저는 (운동사회에서) 영원한 용병이잖아요. 그래서 살짝 외롭기도 하고요. 한편으로는 한발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볼 수도 있죠. 운동가들의 열정, 순수, 희생은 이해하지만 가끔씩 너무 교조적으로 흐르지 말았으면, 좀더 프로기질을 가졌으면, 바람이 있어요.”


 

남편의 생활신조처럼 ‘아님 말고’ 하면서 쿨하게 살고 싶지만, 민감한 배우가 아픈 세상에 아프지 않을 리는 없다. 그는 ‘빵 공장’ 이야기를 하려다 갑자기 “나 눈물날라 그래”라며 고개를 젖혔다. “글쎄, 얼마 전에 텔레비전을 보는데, 나랑 동갑인 탈북자 여성이 자기 품에서 새끼가 굶어죽었다는 얘기를 하는데…….” 어느새 그의 눈시울은 붉어져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참, 내 팔이 짧아서……. 같은 말 쓰는 사람들한테 어쩔 수 없이 정이 가요.” 그는 평양의 ‘빵 공장’ 홍보대사다. 남쪽의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와 북쪽의 민족화해협의회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대동강 어린이 빵 공장’. 지난해 5월에는 평양으로 견학도 다녀왔다. 그리고 북한의 핵실험 문제가 터졌다. 그는 “나도 ‘우리는 하나’라는 노래에, 단군의 자손이라는 말에 불편함을 느끼지만, 북한 어린이라고 해서 돕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라고 답답해했다. 인도 어린이든, 남한 아이들이든, 북한 소년소녀들이든, 굶주리는 아이들에 대한 연민은 하나라는 것이다. 아무리 사람들이 오해를 해도, 삐뚤어진 시선으로 보아도, 세상의 아픔을 외면하지 못하는 것이 아줌마의 마음이다. “핵폭탄 보다 무서운 게 터져도, 내일 당장 전쟁이 나도, 애들은 먹여 살려야죠.” 핵폭탄은 핵폭탄이고, 빵은 빵이다, 그의 신념이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묻는다. “언제부터 사회에 관심을 가졌어요?” 질문에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 “너 같은 ‘딴따라’가 예전에는 사회에 관심이나 있었겠느냐”는. 그는 “사람들이 오해하는데, 내가 변한 게 아니라 비로소 마이크를 얻은 것뿐이죠.”라고 답했다. “만약 예전의 제가, 스물일곱의 무명 배우가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누가 귀를 기울이겠어요. .





그래도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뜨면서 배우 오지혜가 알려졌고, 그때부터 내게도 마이크가 생긴 거죠.”라고 말했다그래서 자신은 조그만 달란트라도 세상을 눈꼽만큼 이라도 좋게 바꾸는데 쓰였으면 좋겠다는 희망으로 발언을 주저하지 않고 행동에 나섰다는 것이다. “심지어 미국에서도 유명 연예인이 이웃을 돕는 일이나 사회활동에 나서지 않으면 비판을 받는데, 한국에서는 오히려 사회에 관심을 가지면 이상한 시선으로 보잖아요.” 그의 하소연이다. 그는 “더구나 여자 연예인이 그러면 더욱 이상한 시선으로 본다.”고 자신이 경험한 성차별을 말했다.

‘딴따라’는 문화지식인이다

 

마침 올해, 1987년 6월항쟁 20주년을 맞는다. 그의 학번은 87. 스스로 연애만 생각했던 여대생이라고 말하지만, 대학시절부터 사회에 무관심했을 리 없다. 그의 주류사회에 대한 삐딱한 시선은 스무 살 무렵부터 시작됐다. “제 첫사랑이 운동권 선배였어요.”라며 웃었다. 당시를 재현하면, 바야흐로 때는 1980년대 후반 여대생 오지혜는 짝사랑하던 선배와 사랑이 마침내 이루어져 떨리는 가슴으로 택시에 올랐다. 오지혜의 떨리는 가슴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배가 그를 데리고 간 곳은 다름 아닌 명동성당이었다. 거기서 그는 광주항쟁 비디오를 보았다. 당연히 충격을 받았고, ‘언제나 올곧은 지식인이라고 생각했던 아버지는, 대학생이었던 사촌오빠들은 도대체 그때 뭘 했지’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반항하는 딸이 됐다.
물론 한편의 비디오 보다 한사람의 인간에 더욱 믿음이 갔다. 그는 “이념 때문이 아니라 운동하는 선배들이 참 좋은 사람들이어서 그들을 따랐다.”고 말했다. 학교에서 세미나가 끝나면 남겨진 책들을 모아서 읽었다. 그렇게 서울 강남에서 고생 모르고 자랐던 대학생 오지혜의 사회의식은 변화를 겪었고, 성장했다. 사정이 이러니, 오지혜 씨가 변한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그에게 주목하게 된 것이다. 갑자기 뜨거워졌다가 순간에 식어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오랫동안 가슴에 품었다가 서서히 뜨거워지는 사람도 있게 마련 아닌가. 1987년 이후 20년 동안 오지혜 씨는 그렇게 서서히 뜨거워져 왔다.
그는 딴따라의 동의어를 문화지식인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지식인 오지혜의 본업은 물론 배우지만, 그의 오지랖은 영화를 넘어선다. 책의 저자로, 라디오 진행자로, 텔레비전 토크쇼 패널로 자신의 영역을 넓혀왔다. 그가 진행하는 문화방송 표준FM <오지혜의 문화야 놀자>는 전신이었던 <오지혜의 문화속으로>까지 합치면 어느새 3년째 이어져오고 있다. 오지혜 씨는 자신을 ‘행복한 딴따라’라고 표현했다. “중학교 때 꿈이 배우였고, 고등학교 때 꿈이 라디오 디제이였어요.

 

그리고 친구 같은 남편을 만나서 딸을 키우면서 살고 싶었고요. 지금 제가 꼭 그렇거든요.” 그래서 그의 미니홈피 이름은 ‘내가 배우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다. 물론 그에게도 남은 갈증은 있다. 오지혜 씨는 뜻밖에 “영화가 고프다.”고 말했다. 생각해보면 <와이키키 브라더스>로 세상에 알려지며 뜨기 시작했지만 상승세를 이어갈 기회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아직도 아리따운 삼십대 여배우들은 여전히 전성기를 누리고, 예순이 넘은 노익장 배우들도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하지만, 마흔에 가까운 여배우가 맡을 배역이란 참으로 없다는, 뒤늦은 깨달음이 밀려든다.


배우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요즘엔 자꾸만 우정출연 섭외가 들어와 속상하다. 그는 “우정 안 쌓아도 되니까 우정출연 그만 할래요.”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렇게 탄탄한 배우의 내공을 썩히는 것은 사회적 손실이 아닐까.
얼마 전 그는 결혼 보다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경기도 양평의 용문산 자락으로 이사를 간 것이다. 언젠가 전원으로 가리라 생각했던 결심을 앞당겨 실행했다. 둘 다 서울내기인 부부가 시골로 들어갈 결심을 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는 “10년을 살 각오로 들어갔다.”며 “다행히 남편이 집안일을 제일로 여기고, 목수이자 철공소 직원의 역할까지 해서 시골생활에 적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남편은 영화 <이대로, 죽을 수 없다>를 만든 이영은 감독이다. 배우인 아버지 오현경, 어머니 윤소정 씨에 영화감독인 남편까지 두었으니 말 그대로 예술가 집안이다. 그에게 “딸까지 배우해서 삼대가 여배우면 멋지겠다.”고 했더니 그는 “그러면 좋죠. 그런데 우리 딸은 작가되고 싶대요.”라고 답했다. 정말로 딴따라라서 행복한 오지혜 씨는 오늘도 생각하고, 발언하고, 표현하면서 행복을 느낀다.
참, 이 솔직한 배우는 『딴따라라서 좋다』 2쇄가 나왔다는 말을 꼭 써달라는 부탁을 했다.


 

신윤동욱 한겨레21 기자
사진제공 오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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