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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서울의 봄 그리고 시뻘건 『무크 실천문학』 본문

인물/칼럼/인터뷰/문화초대석

80년 서울의 봄 그리고 시뻘건 『무크 실천문학』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12. 23. 11:08

1980년, 그 해 봄은 유난히 어수선하고 뒤숭숭했다. 정국의 향방은 오리를 넘어 십리 안개 속에 있었고, 온갖 억측과 소문이 발 없이도 한반도 남쪽 땅을 뒤덮었다.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을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구명 작업이 은밀히 벌어지는가 하면, 벌써부터 진원을 알 수 없는 쿠데타설이 생각 있는 이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래도 봄은 봄이었다. 특히 대학가의 봄은 마치 이 때가 아니면 영영 봄이 없다는 식의 불안감을 부추기며 서둘러, 황급히 그리고 노골적으로 퍼져나갔다. 감옥에 갔던 동료들이 무더기로 돌아왔다. 지하서클이 버젓이 간판을 내걸었다. 교수들의, 특히 학생 지도를 담당하던 교수들의 태도가 비굴하리만치 달라졌다. 그 와중에도 영어회화 카세트며 세계사상전집을 파는 외판원들이 바지런히 돌아다녔지만, 세상이 어느 때인지 짐작할 필요가 없는 멍청한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난생 처음 보는 대자보가 교정 곳곳에 나붙었다. 계엄사의 검열을 겨우 통과한 학교 신문과 교지가 학생들의 손에 들어갔다. 미팅을 하긴 해야 할텐데 걱정하는 신입생들은 그런 대학언론의 행간이 무엇을 말하는지, 아직 깨달을 만한 경륜(?)이 부족했다.


그때, 소문으로만 듣던 김지하의 시 ‘타는 목마름’이 대자보로 처음 나붙었을 무렵, 목련은 아직 꽃봉우리조차 영글지 않았지만 햇살만큼은 별스럽다 싶을 정도로 따스하게 내리쬐던 어느 날, 나는 더불어 문학을 공부하던 벗으로부터 책 한 권을 소개받았다. 어디서 샀을까. 아니, 내 손으로 내 돈 주고 샀을까. 지금은 모든 게 불분명한 기억 저편의 일이지만,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다. 아니, 너무 분명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일 정도로 생생하다.


시뻘개!
표지부터가 초경의 흔적 같아 나를 흥분시켰다.
실, 천, 문, 학.
아아, ‘실천문학’이라니! 아아, 감히 ‘실천문학’이라니!


부제마저 감히 ‘역사에 던지는 목소리’였는데, 한술 더 떠, 제목 바로 밑에는 작지만 선명한 활자체로 감히 ‘민중의 최전선에서 새 시대 문학운동을 실천하는 부정기간행물(MOOK)’이라고 적어 놓고 있었다. 모든 게 낯설기만 했다. 아니, 낯선 정도를 넘어서서, 마치 만져서는 안 되는 미끈등한 남의 살을 만졌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실천, 역사, 민중, 최전선, 문학운동, 부정기간행물.....


도대체 이게 무엇일까.
아무리 독재자가 사라졌다
지만, 이래도 되는 것일까,

   

감히!
그 전 해 가을 짧은 기간이었지만 내 푸르디푸른 영혼이 감금되어 있던 구치소 옥상이 저절로 떠올랐다. 거기, 시리도록 눈부신 가을 하늘 아래 병든 닭처럼 쪼그리고 앉아 오돌오돌 떨고 있던 내 젊은 영혼.-- 세상은 끝났다. 나는 밤마다 무덤 같은 감방 안에서 주먹이 비정상적으로 크게 태어난 주먹장군 똘이가 되는 꿈을 꾸었다. 주먹이 점점 자라나 쌀가마니처럼 커졌을 때, 나는 마침내 단단한 감방 벽을 한 주먹에 깨부술 수 있었다.


아아, 하필이면 왜 꼭 그 순간에 기상나팔이 울었던 것일까.


청춘은 실패투성이였다. 장발은 잘리고, 청바지는 찢어졌다.
혁명은 불가능했다.
시계바늘을 돌릴 수만 있다면, 하나님, 맹세하건대, 두 번 다시 불온한 생을 살지 않겠나이다. 나는 아침 점호를 받기 위해 차가운 마루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으면서, 남루한, 그렇지만 더없이 절실했던 기도를 올렸을 것이다.


『실천문학』은 그런 기억을 불러일으키며 내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애써 가다듬으며 첫 장을 펼쳤다.
심장이 멎어버리는 것 같았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눈물이 나왔을까. 무단(舞丹)이라고 했다. 누구일까, 이 시인은?
벽시(壁詩)라고 했다. 무엇일까, 도대체 이런 시는?

 

수두룩한 검열의 흔적
나는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런 시와 그런 시를 쓴 시인, 그리고 그런 시를 실은 잡지의 운명을…… 아니나 다를까, 잡지는 맨 처음의 그 시부터 시작해서 수두룩하게 검열의 흔적을 담고 있었다. 본문 속에 난데없이 끼어드는 상자형 광고가 그 신생 문학지의 운명을 예고하고 있었다.

 

훗날 개정판에는 ‘3행 삭제/ 2행 삭제/ 5행 삭제’라고 대체된 그 흔적은 그 자체가 명백한 ‘발언’이었다. 문학이 그토록 엄중한 것이었다.


나는 밤새워 읽고 또 읽으며 어떤 마음의 결심을 굳혔을 것이다.
뒤늦게 나는 『실천문학』의 정체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잡지는 1974년 출범한, 민주화를 위해 싸우는 문인들의 단체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기관지였다.
고은, 김병걸, 신경림, 염무웅, 백낙청, 이문구, 조태일,

 


박태순, 황석영, 이시영, 송기원 등이 그 단체의 주요 멤버였고, 당시 유일한 진보적인 문학지로서 외로운 싸움을 벌이던 계간 『창작과비평』과 별도로 문학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쳐나갈 진지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창간되었고, 무단은 그 단체의 대표 간사 고은의 필명이었고, 고은은 한때 제주에서 일 년에 천 병의 소주를 폭음한 『해변의 운문집』의 그 성(聖) 고은이었고,

 

무크(MOOK)라는 낯선 체제는 정기간행물이 필연적으로 지니게 되는 여러 가지 제약을 과감히 부숴 버리자는 의도로써 정기간행물(잡지: Magazine)과 단행본(책: Book)의 머리글자를 짜맞추어 만든 신조어였고, 그런 만큼 비상한 시국에서는 유격전의 선봉에서 탄력 있게 싸워나갈 수 있겠다는, 어찌 보면 무모하리만치 용감한 도전 정신의 산물이라는 사실 등등.



 

용감한 도전정신의 산물

어떤 인연인지, 그 이듬해 가을, 나는 바로 그 『실천문학』을 펴내는, 이제 갓 출판사 등록을 마친 실천문학사에 편집부원 없는 편집장으로 입사했다. 얼마 후 사무실을 옮겼는데, 그 자리가 또 기막히게도 서대문 형무소가 눈 아래 빤히 내려다보이는 현저동이었다.


“김남일 씨, 자꾸 저기만 내려다보지 마. 이제 그만 싸워. 우리도 먹고 살아야지.”
이따금 불어터진 자장면으로 점심을 때운 뒤 그 젓가락으로 고물 선풍기의 날개를 돌려 겨우 더운 바람을 만들어냈을 때라든지 추적추적 비라도

뿌리는 날 오후 같은 때, 해직기자 출신 사장이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문득 빠져든 회상 속에서 나를 건져내곤 했다.
보안사 요원들이 나를 잡으러 온 것도 그 실천문학사였다.


그렇게 해서 『실천문학』은 여리디 여린 문학청년이었던 내 운명까지도 송두리째 바꾸어놓게 되는데…… 한 권의 불온서적이 생을 좌우한다. 독자들이여, 어쩐지 불온한 기운이 감도는 책은 부디 신중하게 펼쳐보시기를! 그런데 요즘도 그런 책이 있기는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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