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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이중성을 패러디하는 그녀들의 힘 개그우먼 신고은, 정경미 본문
지식인의 이중성을 패러디하는 그녀들의 힘 개그우먼 신고은, 정경미 |
그녀들의 개그가 여성주의적이지는 않다. ‘자연분만’, ‘모유수유’를 외쳤던 <개그콘서트>의 ‘출산드라’처럼 여성에게 강요되는 다이어트 강박증의 사회를 고발하지도 않고, <폭소클럽>의 ‘여자이야기’처럼 여성들의 눈으로 남성들의 행태를 뒤집어 보여 웃음을 선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무표정하면서 뻔뻔한 ‘정 마담’이 고상한 척 하지만 속물인 ‘정 선생님’을 희화하면서 지식인, 그 중에서도 여성 지식인의 이중성을 조롱한다. 자칫 여성에 대한 편견을 강화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는 그녀들의 개그는 실제로 보면 전혀 여성 비하로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자꾸 보다 보면 깔끔한 뒷맛을 남기는 여성주의 개그라는 느낌마저 갖게 된다. 이상하게 여성을 패러디하지만 남성의 시선에서 여성을 비하한다는 불쾌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이 패러디하는 ‘맹한’ 여성 지식인에게조차 한심함 보다는 귀여움을 느끼게 하는 힘, 그녀들이 가진 묘한 매력이다. 그녀들은 여성을 ‘맹하게’ 여기는 남성 중심의 사회마저 패러디하는 것일까. 보면 볼수록 마음이 끌리는 그녀들을 만났다.
그 많던 개그우먼들은 어디로 갔을까
<개그콘서트>의 인기코너인 ‘문화 살롱’의 두 주인공인 신 마담, 신고은(21) 씨와 정 선생님, 정경미(25) 씨를 만나 즐거운 수다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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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계는 연예계 중에서도 여성이 살아남기 어렵기로 소문난 분야다. 때마다 반짝했던 개그우먼들은 숱하게 많았지만 오랫동안 장수하는 개그우먼을 찾기란 어렵다. 물론 김미화 씨가 개그우먼을 둘러싼 편견을 깨고 시사프로그램까지 진행하는 능력 있는 사회자로 발전하고 있고, 정선희 씨가 개그우먼 출신의 ‘메인’ 진행자로 성장하며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런 개그우먼들의 두드러짐 속에 신고은 씨와 정경미 씨는 ‘여성주의적 트랜드’를 주도하면서 ‘문화살롱’을 장수하는 개그코너로 만들어 왔다. |
“그 많던 개그우먼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녀들을 만나자 ‘단도직입적으로다가’ 물었다. 그녀들은 “그러게요”라고 입을 열더니 한마디씩 던졌다. 신 마담 아니 신고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개그우먼들이 아이디어가 부족하다고 하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면이 있죠. 어려서부터 남자들은 아랫도리를 벗고 다녀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잖아요. 하지만 여성들은 언제나 조신하게 처신해야 한다고 끝없이 잔소리를 듣잖아요. 아무래도 기발한 상상력이 필요한 개그에서는 여성들이 불리할 수밖에 없죠.” 오호라, 영특한 고은 씨는 여성주의를 따로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여성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신고은 씨가 한숨을 지으면서 이야기하자 정경미 씨가 위로했다. “그렇지만 여성들만이 할 수 있는 개그도 있다고 생각해요. 워낙 남성 위주인 사회에 살다 보니 여성들만이 갖게 되는 날카로운 풍자의 시각이 있죠.” 네 살 많은 언니 정 씨가 위로하자 동생 신 씨가 “맞아, 위기가 기회라고 여자 선배들이 많이 없으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도 많네.”라고 어리광을 피웠다.
이렇게 둘은 평소에도 ‘죽이’ 척척 맞는다. 두 사람 모두 어찌나 구김살이 없이 깜찍한지,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개그를 보는 것인지 인터뷰를 하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다.
그녀들만이 할 수 있는 개그
사실 그녀들이 작심하고 여성들끼리 개그를 해보자고 나선 것은 아니었다. 2005년 한국방송 개그맨 공채시험에 합격해서 감격에 젖은 것도 잠시였다. 남자 동기들이 벌써부터 인기를 얻고 있을 때, 두 사람은 방송국의 소파만 박박 긁는 지진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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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는 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두 사람이 어찌 자존심이 상하지 않고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겠는가. 하릴 없이 소파에 앉아서 아이디어를 짜는 ‘나머지 공부’를 하던 신 마담과 정 선생은 이때부터 서로를 알아보고 눈이 맞았다. 여자들끼리 의기투합해서 아이디어를 짜보자고 작당했고 의기투합의 결과물이 ‘문화살롱’이었다. 이미 정경미 씨는 개그우먼 강유미 씨 등과 함께 ‘여자 이야기’를 하면서 여성들끼리 만드는 개그에 재미를 들인 상태였다. 정 씨는 “여자들끼리 아이디어를 짜다보면 허물없이 별의별 이야기를 다 해도 되니까 새로운 아이디어도 나오게 되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여자들끼리 여성의 방식으로 카페에서 수다를 떨면서, 찜찔방에서 밤을 새면서 ‘노닥거리다’ 보면 아이디어가 자연스레 나온다는 것이다. 이렇게 여성들끼리 동고동락하면서 만든 아이디어는 ‘문화살롱’을 장수프로그램으로 만드는 힘이 됐다.지난해 10월에 시작한 ‘문화살롱’은 <개그콘서트>의 장수코너로 자리를 굳히면서 신인개그우먼인 두 사람을 세상에 알렸다. |
정 씨는 “솔직히 요즘엔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바야흐로 신인으로 봐주던 호시절은 가고 프로의 벽을 넘어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정 씨는 “솔직히 이번에 못해도 다음에 잘하면 되지 뭐, 하는 생각을 했는데 정말 프로답지 못한 생각이다”라고 ‘각성의 바늘’을 찔렀다. 신 씨도 “요즘 들어서 문화 살롱 녹화 때 자꾸 실수를 하는데 아무래도 풀어진 것 같다.”며 스스로를 나무랐다. 그녀들의 선배들이 여성으로 살아남기 힘든 풍토에 지쳐 이제는 쉬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 험난한 길을 포기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요즘엔 ‘문화살롱’의 인기를 이어갈 새로운 작품을 짜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끊임없이 공부하는 선배들이 모델
그녀들에게 힘이 되는 여자 선배가 있다. 새로운 유형의 여성개그를 개척한 ‘출산드라’ 김현숙 씨가 얼마 전 <개그콘서트>를 떠나면서 그녀들에게 희망을 주고 의무를 안겼다. 신 씨는 “김현숙 선배가 내가 처음 개그콘서트를 할 때만 해도 여성들이 별로 없어서 외로웠는데, 너희들이 잘 해주니까 정말 고맙다.”면서 “이제는 개그도 여성이 이끌어가자는 말을 남겼다.”고 전했다. 이들에게 역할 모델이 되는 여자 선배도 있다. |
그녀들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세상 일에 대해서도 무관심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정말 깊이 있는 개그를 하고 싶어서 신문도 챙겨 읽고 시사주간지도 보려고 애쓴다. 두 사람을 처음 만나서, 신 씨가 정 씨를 보며 “경미 언니는 시사주간지도 열심히 읽어요.”라고 말했을 때, 솔직히 시사주간지 기자를 만나서 하는 인사치레인줄 알았다. 그래서 농담 삼아 “어떤 기사 보셨어요?” 물었더니 정 씨는 이런저런 기사의 내용을 말해서 기자를 놀라게 했다. 실제로 만나면 인기 개그우먼이 아니라 깜찍한 대학생이 더욱 어울리는 신고은 씨는 “그런데 나는 왜 자꾸 삼천 원 주고 시사주간지를 사는 대신에 천 원 하는 퍼즐 맞추기를 사고 싶지?”라며 발랄하게 능청을 떨었다. 그녀들은 너무 예뻤다. 스타 의식 없이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모습이 예뻤고, 무언가를 끝임 없이 배우려는 자세가 예뻤다. 무엇보다 그녀들이 지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개그는 내 운명”이라고 말할 때 예뻤다. 그녀들이 십 년 후에도, 삼십 년 후에도 무대에서 웃음을 선사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정경미, 신고은이 21세기의 여성판 ‘서수남, 하청일’로 기억되기를……. 신 마담, 정 선생 파이팅! |
글 신윤동욱 한겨레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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