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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쓰는 민주주의
민중가요-노래운동 진영에서 ‘노래패’가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노래패’는 민중가요 문화의 창조자이면서 수용자이고, 노래하는 사람과 노래를 만드는 사람, 반주하는 사람, 기획하는 사람이 섞여있는 공동체의 느낌이 살아있는 말이기도 하다. 민중가요문화에서 노래패가 중요한 이유는 집단성을 강조하던 전통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혼자 듣고 감상하기보다 함께 노래하는 것을 보다 더 중시해온 민중가요 문화의 전통에서 노래패는 가장 중요한 기본 단위로 인식되어왔다. 그래서 민중가요문화가 시작된 70년대 말의 대학가 노래모임부터 최초의 사회 노래모임 ‘새벽’, ‘노래를 찾는 사람들’과 ‘꽃다지’ 등 수많은 전문 노래패들이 민중가요 진영의 주요한 흐름들을 만들어 왔다. 최근 개인 가수나 밴드의 영역이 커지는 추세에도 불구..
붉은 조명이 들어오고 막이 올라가면 그들은 노동자가 된다. 노동자의 슬픔, 한, 애틋함을 담아 춤추고 노래하는 노동자가 된다. 한편으로 그들은 사장님, 자본가가 되어 있기도 한다. 노동자의 조롱과 비웃음을 받는, 그래서 관객에게 웃음과 잠깐의 위안이 되어주는 역할 또한 기꺼이 되어준다. 무대 위는 폭발할 것 같은 에너지로 가득하다. 금방이라도 무대에서 뛰어나와 함께 싸우러 나갈 것 같은 힘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노동문화예술단 일터’가 뿜어내는 열정으로 그들은 노동자와 하나가 된다. 부산 범어사역에 위치한 지하 연습실. 직접 대패질을 해서 마루바닥을 깔고 계란 판으로 방음장치를 한 투박한 모습이지만 훈훈한 사람냄새와 그들의 열기가 고스란히 배어있다. 곧 다가올 공연 연습이 한창이었던 단원들의 목소리가 ..
1960년대 이후 학생운동은 한국 변혁운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다. 사회운동 역량이 미약하던 시기에 학생운동은 대학이라는 비교적 안정된 활동공간에서 자신의 역량을 축적함으로써 사회운동의 주동력으로 자리매김해왔다. 6,70년대의 학생운동이 정의감과 도덕성에 기초한 다소 인텔리적 운동이었다면, 80년대의 학생운동은 대중적이며 조직적인 운동이었다는데 차이가 있다. 전두환 정권 당시 엄혹한 탄압으로 인해 강도 높은 서클 중심의 활동을 펼쳐오던 학생운동은 87년 6월 민주항쟁을 기점으로 전대협이라는 연대체를 구성하고 대중적 학생운동의 신화를 창조해내기 시작했다. 1기 출범식을 약 5,00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치러낸 전대협이 5년 뒤 6기 출범식을 10만에 가까운 학생들과 함께 진행한 것은 당시 학생운동의..
학부모가 되려면 아직 멀었거나 이미 학부모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면 별 관심이 없겠지만 ‘학교급식’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 자녀를 학교에 보내고 있는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학교에서 우리 아이들이 먹는 음식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재료는 어떤 것을 쓰는지, 한번쯤 고민해 보지 않은 부모가 없을 테지만 학교급식전국네트워크(이하 네트워크)를 들여다보면 그런 학부모들의 심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느낌을 받는다. 어느 통신사의 광고가 ‘고객의 입장에서……’를 내걸고 있는 것처럼 네트워크도 ‘학부모의 입장에서……’란 말이 가장 적절하게 단체의 성격을 표현해 줄 듯 싶다. “처음엔 학교급식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고민하면서 네트워크를 만들 것이란 생각은 못 했어요. 다만 내 아이가 먹는 음..
꾸밈 없는 소박한 노래들. 집 옆에 또 다른 집이 하나 둘 생겨나고 어느새 마을이 되고 좁다란 마을 길 옆 미루나무가 솟아나고 구름이 흐른다. 노래는 구름에 실려 어디론지 날아가고 사람들은 어디선지 모르게 들려오는 그 노랫소리를 듣는다. 노래가 흐르는 마을. 90년대 초반 ‘노래를 찾는 사람들’과 함께 활발히 활동하던 민중가요 진영의 대표적인 노래모임의 하나인 ‘노래마을’의 이미지는 이렇다. 꾸밈 없는 소박함. 고즈넉한 산 기슭에 여럿이 함께 오래오래 살아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삶이 만들어가는 노래들. 내가 노래마을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면 선명하게 맺히는 그림이다. 꾸밈 없는 소박함 노래마을의 시작은 86년으로 거슬러간다.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여’ 라는 대목으로 유명한 임희숙의 등 수많은 노..
당신은 지금 누군가에 의해 혹은 어떤 체제나 조직에 의해 억압받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만일 그런 생각으로 고통 받고 있는데 스스로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해 힘겨워 하고 있다면 이런 연극에 참여해 보는 것은 어떨까? 지난 97년 한국을 방문한 브라질의 연극 이론가이자 참여적 실천가인 아우구스또 보알은 사회에서 억압받는 계층을 위해 자신의 연극 이론과 방법론을 적용하기 위한 워크숍을 가졌다. 그가 주장하는 에서는 ‘관객이 극의 주체가 되어 자신의 억압을 인 식하고, 자신을 억압하는 현실을 바꾸어 볼 수 있다. 연극은 현실의 모사가 아니라 현실 그 자체이며, 관객은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을 얻게 된다’고 한다. 당시 함께 참여했던 노지향(극단 ‘해’ 대표) 씨를 비롯한 몇몇 이들이 보알의 연극이론에 영향을 받아..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했다. 그 말씀은 분명 시였으며 이야기였으며 노래였으며 춤이었을 것이다. 또한 비였으며 바람이었으며 햇살이었으며 눈보라였을 것이다. 상상해보라. 머언 고대의 사내들과 여인들이 풍성한 수확을 놓고 난장으로 얽혀 기쁨을 나누던 자리, 그득그득 술잔은 넘치고 왁자지껄 이야기꽃 피어나는 순간. 말씀은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는 노래가 되고 노래는 춤이 되고 땀이 되고 하늘이 되는 순간, 살아 있는 땅 위의 모든 것들은 한 몸으로 숨쉬는 대동의 맘판이었을 것이다. 입에서 입으로 이어지며 개인을 집단으로 옹골차게 묶어주었을 노래의 힘은 오늘 우리가 광장에서 함께 노래하는 순간 다시 살아난다. 독창적인 ‘힘’으로 대중 압도 홀로 불러도 아름다운 노래와 함께 불러야만 비로소 아름다워지는 노래로 크게 ..
대학 노래패 시절 암묵적인 몇 가지의 금기가 있었다. 예를 들자면 될 수 있으면 대중가요를 부르지 않는 다든지 (예외가 있다면 술자리의 뽕짝만이 너그러웠다) 통기타와 북 이외의 악기를 쓰는 일도 그러했다. 지금 생각하면 꼭 그래야 했을까 싶지만 그 당시에는 왠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던 일이다. 민중가요는 이래야 된다는 일종의 관습법이 있던 시절이랄까. 민중가요가 대중가요와 다른 대학생들의 독자적인 노래문화로 자리 잡는 70년대 후반 이후, 대중가요를 극복하는 대안문화로, 의식적인 노래운동으로 발전하는 80년대에 이러한 류의 관습은 꽤나 견고했다. 최초의 사회노래모임이었던 ‘새벽’이 공연에서 신디사이저를 썼던 문제로 대담이 마련되는가 하면,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대중가요의 편곡 관행을 받아들이며 드럼과..
이른 봄 햇살에 여유로운 졸음을 만끽하며 도착한 101번 버스 종점. 타고 내리는 사람 없이 줄지어 기다리는 버스의 시동소리만 요란하다. 종점을 돌아서자 좀처럼 보기 힘든 슬라브 지붕의 기름집이 눈에 들어온다. 철재 간이의자에 앉아 장기를 두는 두 노인의 모습까지 영락없이 시골 읍내 풍경이다. 난곡은 그렇게 오랜 세월을 서울이면서도 서울이 아닌 모습으로 보내왔다. 조금 걷다보니 이 곳과는 안 어울릴 듯한 세련된 마트가 보이고 산 꼭지에 자리한 윗동네에서는 크레인과 커다란 건설 장비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난곡은 그렇게 서울이 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남은 사람들을 찾아 가파른 언덕길로 향한다. 높이 올라갈수록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은 거의 없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는 그들이 살..
아우슈비츠(Auschwitz) 이후 더 이상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한 아도르노(Theodore W. Adorno)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홀로코스트는 살아남은 자들을 구속하는 20세기의 가장 어두운 기억이다. 그것이 남긴 수많은 슬픔과 상처가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홀로코스트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기억이란 항상 망각을 동반하는 선택적 작업이다. 망각 또한 기억의 한 형태인 것이다. 어떤 사회에서 무엇이 기억되고 무엇이 망각되는가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언제나 미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전제로, 현재의 문맥에서 과거를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박물관으로 남은 홀로코스트의 현장 아우슈비츠는 그런 의미에서 과거이면서 현재이자 동시에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