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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쓰는 민주주의
기념관의 명칭 : 평화기념공원(Peace Memorial Park) 기념관의 위치 : 島市中中島町1-2 기념관의 규모 및 면적 : 평화기념공원 122,100㎡, 평화기념자료관 11,713㎡ 히로시마 평화문화센터 http://www.pcf.city.hiroshima.jp/hpcf/index.cgi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http://www.pcf.city.hiroshima.jp/ . 1945.8.6 히로시마 원폭투하 . 1949.8.6 주민투표 90% 이상의 지지를 얻어 히로시마기념도시건설법 제정 . 1952.3 평화기념공원 가운데에 항구평화를 기념하는 평화기념관, 평화기념자료관, 공회당, 원폭 위령비가 착공됨 . 1955. 평화기념관과 평화기념자료관이 개관 자료수집을 지원하는 시민단체들이 생겨남 . 19..
일본군위안부역사관 [日本軍慰安婦歷史館 , The House of Sharing]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원당리에 있는 역사 자료관. 1998년 8월 14일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원당리 나눔의 집에 개관한 세계 최초의 성노예 주제 인권박물관이다. 잊혀져 가는 일본의 전쟁 범죄행위를 고발하고 피해자 할머니들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그리고 후손들에게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지상 2층 지하 1층, 약 350㎡ 규모로 일반시민과 뜻있는 일본인들의 성금을 모아 건립되었다. 설립연도 : 1998년 소재지 : 경기 광주시 퇴촌면 원당리 65 규모 : 총 350㎡ 관람시간 : 오전 10시∼오후 5시 설립배경과 과정 나눔의 집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본격적으로 한국사회에 제기되던 90년부터 태평양전..
전쟁에 관한 사적과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1991년에 착공하여 1994년 6월 개관한 기념관. 설립연도 : 1993년 12월 완공, 1994년 6월 10일 개관 소재지 : 서울 용산구 용산동 1가 8 규모 : 연건평 2만 5천 평 관람시간 : 3~10월 09:00- 17:00 (1) 배경 우리민족은 개국 이래 오늘날까지 5천여년의 긴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주변국가들로부터 외침을 받아 전쟁으로 많은 시련을 겪었으나 슬기롭게 이를 극복하고 세계에서 보기 드문 단일민족국가로서의 정통성을 유지하여 왔다. 이와 같이 오늘의 한국이 있기까지에는 외침으로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강인한 민족정신과 희생정신으로 목숨바쳐 싸운 수많은 선열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후손들은 선열들의 호국전쟁에 관..
- 상무 신도심 개발과 관련하여 광주시민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정부가 국유지 10만평을 민주화 기념공원 부지로 무상 양여함에 따라 5.18 기념문화관을 유치하여 5.18 명예회복과 교훈의 올바른 계승과 발전을 위한 기념공원으로 조성하였다. - 위치 : 광주광역시 서구 치평동 상무 택지개발 지구내 - 조성면적 : 62,000평 - 주요 시설 5.18기념문화관(연면적 3,201평, 지하 1층, 지상 3층) : 1997~2001 용도 : 국제회의장(800석), 전시실, 중회의장, 동시 통역실, 프레스센터 등 5.18 현황조각, 추모승화 공간 (부지 1,000평) : 1997~1999 용도 : 5.18 당시 상황 조각 표현, 5.18 희생자 대리석에 각명 5.18 상징시설(부지 500평) : 1997~1999 ..
피(P) 언로가 차단되었던 1970~80년대, 정의와 진실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은 ‘불법 인쇄물’이 유일했다. 그것은 대중을 향한 유일한 선전수단이었고, 군사정권의 서슬 퍼런 감시망을 피해 점 조직으로 활동해야 했던 민주화 운동 세력의 용이한 지침서였다. 운동권 내부에서도, 그것을 감시하고 적발하기에 바빴던 형사들에게도 그러한 유인물들은 ‘피(P)’로 불렸다. 영어 ‘Paper’의 첫 글자를 딴 것이었지만, 군사독재에 대한 피 끓는 적개심과 분노를 표출하는 데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상징적인 이름이었다. 그 시절, 시위 현장에서 어김없이 뿌려졌던 그 수많은 유인물들이 비밀리에 탄생한 곳이 바로 을지로 인쇄골목이다. 지금도 명보사거리를 중심으로 한 원통골목 곳곳에 들어서 있는 인쇄소마다 연말을 ..
동양 최대 규모의 감옥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가려면 서울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에서 내려야 한다. 역사관을 포함하고 있는 독립공원이 그곳에 있고, 독립공원은 독립문 때문에 조성된 곳이니 역 이름이 독립문역인 것은 새삼스러울 일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이곳에 취재를 오면서 독립문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관계가 새삼스러워졌다. 전자는 우리나라가 중국, 일본, 러시아와 그 밖의 서구 열강과 마찬가지의 자주독립 국가임을 국내외에 선포하기 위해 1897년에 완공하였고, 후자는 그 11년 뒤인 1908년에 일본이 항일세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당시로서는 동양 최대의 규모로 지은 감옥이다. 이 둘이 한 공간 안에 있다. 원래 독립문은 현재 위치에서 동남쪽으로 70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어쨌든 서대문형무소, 당시의 이름..
지리적 여건에서 받아들인 천주교 전북 익산시에 속해 있는 여산은 면 소재지로 충남 논산과 접해 있다. 내게는 생소한 지명이었으나, 천주교도들에겐 순교성지로 잘 알려져 있다. 천호성지에 이어 전주교구의 제 2의 성지라고 한다. 예로부터 여산은 충남과 전북을 잇는 호남의 첫 관문이어서 사람의 왕래가 잦았고, 같은 이유로 천주교의 전래도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빨랐다. 1866년부터 1871년까지 계속되었던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인 병인박해 당시 여산 인근의 산골짜기마다 숨어 지내던 수많은 신도들이 끌려와 처형을 당했다. 숲정이, 동헌과 기금터, 옥터, 배다리, 뒷말 치명터 등 여산 전체가 성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한 역사적인 영향 때문인지 지금도 면을 한 바퀴 돌다보면 성당, 교회, 원불..
1975년 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이 나라의 헌법을 제멋대로 난도질하며 독재를 횡행하다 마침내 10월 유신을 통해 자신의 영구집권 야욕을 충족시키고 포만감에 젖어 있을 때, 쉬쉬하며 숨죽여 엎드린 세상을 향해 ‘공포의 병영국가’가 도래했음을 고발하며 자신의 배를 가른 지성이 있었다. 그가 김상진(서울대 68학번, 당시 4학년으로 26세)이다. 폭염 속을 돌아다니며 고(故) 김상진 군의 할복사건을 취재하는 동안, 필자의 머릿속에는 러시아 네차예프사건에 관한 상념이 내내 자리하고 있었고, 그것은 지금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꽃다운 젊음이 고뇌 끝에 선택한 죽음에 대해 그 사실을 기록하기야 간단한 일이겠지만 그 진실을 말하는 일은 쉽지 않은 까닭일 터이다. 네차예프사건은 1869년 겨울, 제정러시..
탄압에서 터져 나온 분노의 파도 같은 현대중공업 노조 울산의 노동자들은 1987년 7·8월 대투쟁을 통해 이 사회의 주인임을 선포하였고, 노조를 통해 민주화운동의 한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당한 숱한 고난과 탄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해고자 사무실에서 야구방망이와 각목으로 구타하고 집기를 부수는 등의 폭력이 벌어졌는데 그 배후에는 현대중공업이 고용한 노조파괴 전문가인 한국계 미국인 제임스 리(한국명 이윤섭)가 있었다. 그는 1987년부터 노동자들이 있는 현장에 나타나 노조 결성을 방해하거나 노조를 좌경 불순세력으로 몰아 폭력을 유도하는 교육을 하기도 했다. 이런 모진 탄압 속에서도 울산의 노동자들은 투쟁을 통해 노동운동의 중심으로 성장, 발전하였다. 이로 인해 흔히 울산은..
울산! 과연 어떤 곳인가? 울산의 19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을 소개하기 전에 울산의 지리적 환경에 대해 설명을 하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울산은 말 그대로 산으로 울타리가 쳐져 포근하게 가두어진 천혜의 고장이다. 구한말 삼대 개항지의 하나인 염포(동해에서 서해처럼 염전방식으로 소금을 만들었던 곳이다)가 있으며 이곳에 현대자동차가 들어서 있다. 고래로 유명한 이곳 태화강 상류 반구대 암각화에는 고래 모양의 상형문자가 있을 정도로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고, 달천에는 철을 제련했던 곳이 발견되어 요즘 쇠부리 문화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울산은 온화한 남쪽 해양성 기후의 영향과 비옥한 토양, 풍부한 해양자원이 있어 살기에 좋았으니 국어교과서에 나오는 처용의 모습과 표현처럼 낙천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