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전체보기 (909)
함께쓰는 민주주의
고대 그리스의 아케데모스 숲 속에서 철학자들이 벌였던 대화의 정신을 이어받은 이들이 있다. 그들은 서로의 입장 차이를 넘어 고대 철학자들이 그랬듯이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한다. 또한 그들은 학문적인 영역에 머물러 현학적으로 되는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갈등을 비켜가지 않는다. 그러한 갈등과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해결점을 찾아내려는 것이다. 그들은 진정한 아카데미란 아카데미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사회의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실천적 지성이어야 한다는 걸 묵묵히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바로 크리스챤 아카데미를 거쳐 간 지성들이 그들이다. 중간집단 육성 프로그램의 단절 1979년 3월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커다란 시련에 부딪힌다. 크리스챤 아카데미..
채 스무 살도 안 된 앳된 소녀들이 한겨울 날선 바람에 곱은 손을 호호 불어가며 공단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한 달 내내 동굴 같은 작업장에서 먼지를 먹어가며 일해 봐야 그들 손에 쥐어지는 돈은 단 몇 푼. 그러나 소녀들은 그 돈을 아끼고 아껴 시집갈 밑천을 삼거나, 동생 학비를 보태거나, 부모님 병원비를 대거나, 한 가지도 불가능해 보이건만, 그 많은 일을 해왔다. 그리고 지금 그 소녀들은 어느덧 중년의 여성이 되어 있다. 그 많던 소녀들,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후레아 패션에 입사했던 박경이 씨도 지금은 중학생 딸을 둔 마흔 다섯의 중년의 여성이 되어 있다. 이리 수출자유지역 수출자유지역이란 세관의 수속 없이 특정지역에 상품을 반입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주고 자유롭게 상품을 처..
노동운동의 큰 일꾼, 권종대 2 한 농민의 초상 권종대에 관한 두 번째 글을 쓰기도 전에 그의 임종 소식을 전해 들었다. 어쩌면 예견된 죽음이기도 하련만,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당장이라도 녹음기의 재생 버튼을 누르면 쟁쟁하게 울려 퍼질 저 살아 펄펄 뛰는 목소리는 그럼 이제 과거에 속한 것이란 말인가. 그는 자신의 생명이 오직 산소 호흡기를 의지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자식들을 불러 모았다. “그동안 너희들 고생이 많았다. 이 세상에서 나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여한도 없고 마음도 편하다. 남은 일은 너희들이 다 알아서 하리라 믿는다. 그만 끝내자.” 권종대는 자기 손으로 직접 산소 호흡기를 떼어 냈다. “아버지!” 깜짝 놀란 자식들이 침상으로 달려들면서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그는 울부짖는 가족들..
노동운동의 큰 일꾼, 권종대 1 1960년대 초, 경북 영덕군 영해면 관어대 앞들에 한 떼의 청년들이 모를 심으며 뭔가를 신명나게 읊조리고 있다. 들에서 흔히 불리는 노동요나 잡가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4·19 혁명의 열기를 무력으로 잠재운 박정희 정권이 대대적으로 재건국민운동 바람을 일으키던 때였으니, 글 모르는 농촌 청년들이 ‘가 자에 기역 하면 각’하고 한글 깨치는 소린가 하면 또 그것도 아니다. 사상계 선언 외우며 모를 심고 자유와 평등을 근본이념으로 하는 근대적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봉건사회에서 직접 제국주의 식민지사회로 이행한 우리 역사는 세계사의 조류와 격리된 채 36년간 암흑 속에서 제자리걸음을 하였다. 그것은 자기말살의 역사요, 자기모독의 역사요, 노예적 굴종의 역사였다….’로 시작되..
노동자들의 연이은 분신을 바라보는 마음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다. 사회적 약자가 단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던져야만 겨우 사회에서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는 세상이라는 점을 너무도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1970,80년대에는 폭압적 정치체제가 그 목소리를 막고 있어서 그랬다고 치자. 지금은 뭔가. 그들의 절규를 외면하도록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인가. 죽음이란 사회나 역사 같은 사회과학적 용어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느낌을 담은 단어이다. 내 존재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을 볼 수도 만질 수도 기억할 수도 없고, 세상 사람들과 말하고 웃지 못한다. 내가 사라진 후의 세상에서 사건이 일어나고 역사가 진전한들 그게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아니, 내 존재가..
황산벌 몇 해 전부터 史劇이 TV 드라마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시초가 된 것이 이라고 기억하고 있는데 이전의 사극이 장년층을 주 대상으로 했다면 이후의 사극은 국민적인 드라마가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영향 탓인지 영화에서도 심심치 않게 사극을 만날 수가 있더군요. 사극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시대적 배경만이 과거일 뿐 스토리 자체는 완전히 허구인 경우, 또 하나는 역사적 사실을 주제로 극을 만든 경우입니다. 요즘 영화로 비교하자면 전자는 이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고, 후자는 이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극이 부딪치는 문제, 고증 하지만 어떤 경우이든 사극이 흔히 부딪치는 문제는 고증의 문제입니다. 전자의 작품인 경우 대부분 복식 등 외형적..
‘하나’라는 말은 두렵다. 그 ‘하나’에 속하지 않은 입장에서, 혹은 속할 수 없는 입장에서 그 말은 너무나 폭력적이다. 모든 것이 뭉뚱그려져서 ‘하나’가 되면 좋겠지만 세상살이가 어디 그런가. 살림이 복잡해지면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기 마련 아닌가. 그런데 더 여기저기서 자기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럴수록 세상엔 대립이 많아지고 소외되는 사람도 많아진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 ‘하나’라는 말을 아주 쉽게 사용한다. 민족은 민족대로,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대로, 집단은 집단대로, 통일에서도 남북이 ‘하나’가 되는 것을 지상의 과제로 여긴다. 결코 같아질 수 없는 것을 ‘하나’로 만들려니 폭력이 발생하고 억지가 생긴다. ‘하나’가 아니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이 법석을 떨지만 ‘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의해 구로구에 수출산업단지가 조성되기 시작한 건 1965년이다. 지금도 많은 공장이 공업단지 지역 외곽의 구로동, 고척동, 신도림동, 오류동, 개봉동에 널려있으며, 서울의 금속기계 공장의 4분의 1 이상이 구로구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구로구에는 대규모 공구상가도 자리 잡고 있어 가히 공업도시라 일컬을 만하다. 그래서 7,80년대 구로지역은 잿빛이었다. 단순히 이미지로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랬다. 하지만 구로는 변했다. 이제는 잿빛의 이미지보다 서울의 여타 지역과 비교해도 뚜렷이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보편적인 이미지를 지닌 곳으로 바뀌었다. 잘 정비된 가로와 길을 걷는 사람들의 화사한 옷차림, 세련된 마감재로 우뚝 선 고층 건물들은 과거의 흔적을 모두 지워버렸다. 하..
옛 서울대 문리대 터, 마로니에 공원 -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르셀은 차에 적셔먹는 마들렌이라는 과자를 통해 과거를 복원해낸다. 마들렌만의 독특한 맛과 향이 그와 관련된 과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만의 마들렌을 가지고 있다. 때로는 씁쓸하기도 하고 때로는 달콤하기도 하다. 그리고 때로는 씁쓸하면서 달콤하기도 하다. 그래서 마로니에 공원을 찾는 사람들의 표정은 다양하다. 누군가는 씁쓸한 기억을 가지고 누군가는 달콤한 기억을 가지고 이곳을 찾는다. 그리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 가운데 박건이 부른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을 흥얼거리는 이가 있다면, 그는 분명 마로니에 공원에 관한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게다. 한일 회담 반대운동의 진원지 마로니에..
“지금 농촌은 돈에 화신이 들린 것 같아. 열대여섯 살 고사리 손들이 돈을 벌겠다고 도시로 나간다. 식모살이로, 공장으로 말이다..... 어린 자식은 돈을 벌겠다고 도시로 나갔으니 일손은 모자랄 것이고 제 아비 값싼 곡간에 자식 놈 값싼 노임이라 죽어라 빌어먹을 놈들 가난할 수밖에 , 이래도 농민은 게을러서 못사는 것일까? 곡가는 다른 물가에 영향이 크니 인상 할 수 없고, 농촌에서 사용하는 생활필수품은 날만 새면 올라가니 또 한번 가난해 질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70년대 이후의 진보적 기독교 사회운동에 관한 고찰」중에서, 서영섭)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정책은 외향적으로는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것은 우리사회의 일부분을 포기한 채 이루어낸 반쪽자리 성공이었다.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은 실제로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