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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뒤 역사] 변죽을 쳐서 복판을 울리다 -‘변방에 우짖는 새’ 현기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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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뒤 역사] 변죽을 쳐서 복판을 울리다 -‘변방에 우짖는 새’ 현기영-

기념사업회 2003. 12. 1. 16:41

‘하나’라는 말은 두렵다. 그 ‘하나’에 속하지 않은 입장에서, 혹은 속할 수 없는 입장에서 그 말은 너무나 폭력적이다. 모든 것이 뭉뚱그려져서 ‘하나’가 되면 좋겠지만 세상살이가 어디 그런가. 살림이 복잡해지면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기 마련 아닌가. 그런데 더 여기저기서 자기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럴수록 세상엔 대립이 많아지고 소외되는 사람도 많아진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 ‘하나’라는 말을 아주 쉽게 사용한다. 민족은 민족대로,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대로, 집단은 집단대로, 통일에서도 남북이 ‘하나’가 되는 것을 지상의 과제로 여긴다. 결코 같아질 수 없는 것을 ‘하나’로 만들려니 폭력이 발생하고 억지가 생긴다. ‘하나’가 아니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이 법석을 떨지만 ‘하나’가 아니면 어떤가, 다양한 것들이 어울려 산다고 생각하면 될 것을. 그래서 일찍이 원효는 하나도 아니고(不一) 둘도 아닌(不二) 것에 세상의 이치가 있다고 했나보다.
지방을 소외시켜온 우리의 역사도 이와 다르지 않다. 중앙집중적 사고는 한편에서 중앙권력을 낳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지방의 낙후를 가져왔다. 오죽하면 “말을 낳으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까지 생겼겠는가. 예전부터 지방 곳곳에서 발생한 민란은 이런 형편에서 기인된다. 물론 조직화된 반란도 없지 않았겠으나 자신들의 목소리를 중앙에 전달할 방법이 없는 민초들로서는 구중궁궐에 앉아있는 중앙을 향해 목소리를 모아내야 했으니 그것이 민란이 된 것이다. 망이 망소이의 난이며 홍경래의 난, 진주민란 등은 중앙으로 하나여야 했던 시대에 대항했던 목소리였으며 강요된 이데올로기를 거부했던 민초들의 항거가 아니었던가. 오늘날 지방자치라는 이름으로 현실은 변화하고 있지만 여전히 중앙권력화는 심화되고 있으며 진보를 자처하는 집단 안에서도 자기중심의 폭력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현기영이 《변방에 우짖는 새》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이재수의 삶은 ‘하나’라는 폭력에 대항한 변방의 목소리였다.

1997년 1월 17일 '김영삼 정권은 눈 먼 질주를 멈추라'는 성명서를 발표한 문학인 849인워 현장 시국선언

<순이 삼촌>
제주도 출신의 소설가 현기영. 그가 젊은 날을 살던 시대는 실로 망각의 시대였다. 과거를 들춰내는 일은 곧 반역이었으며 과거를 기억하는 일조차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피해망상의 시대였다. ‘유신’의 억압은 수많은 사람을 벙어리로 만들었고 젊은 영혼들은 자기 역사를 잊은 채 서구의 역사를 쫓아 미망 속을 헤맸다. 현기영 또한 우리 전통의 남루한 유산을 버리고자 했으며 그 처음의 작업이 고향을 잊는 것이었다. 그는 단편소설 <해룡 이야기>에서 “그 악몽의 현장, 가위눌림의 세월, 그게 그의 고향이었다. 그러니 고향은 한마디로 잊고 싶고 버리고 싶은 것의 전부였고 행복과 출세와는 정반대의 개념으로 이해되었다”라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지긋지긋한 섬을 떠나 중앙에 진출해, ‘유신’이라는 혹독한 현실에 만나면서 오히려 고향이 자신의 모태임을 깨닫는다. 악몽 같은 기억이 선연한 고향을 떠나 고향을 객관화 시키면서 오히려 자신이 겪었던 불행들이 결코 감출 수 없는 것들임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제주 4․3항쟁이었다. 그때까지 현기영에게도 4․3은 다른 제주도 출신의 사람들처럼 결코 발설할 수 없는 금기였다. 열패감, 자기부정 같은 것들이 있어 중앙에 대한 맹목적인 두려움과 선망 때문이기도 하였으나 내면에 존재하는 살아남은 자로서의 피해의식이 더 큰 이유였다. 그렇지만 고향을 떠나와 오히려 강해진 고향에 대한 애착, ‘유신’을 통해 각성된 사회의식, 폭도와 빨갱이라는 누명을 쓴 채 죽어간 억울한 영혼들의 기억에 이르자 그는 아예 다른 이야기를 쓰는 것을 죄악으로 느낄 정도로 4․3에 매달리게 된다. 그리하여 쓰여진 4․3관련 첫 작품이 <순이 삼촌>이었다.
<순이 삼촌>은 30년 동안 묻혀있던 4․3항쟁의 진실을 최초로 공론화한 문제적 소설이다. 순이 삼촌은 학살현장에서 두 아이를 잃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으나 일평생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자살에 이르는 인물로 나오는데, 이 소설은 음력 섣달 열여드레인 할아버지의 제사에 맞추어 고향인 제주도 서촌 마을에 내려간 ‘나’를 화자로 내세워 30년 전 향리에서 벌어진 양민학살을 사실적으로 고발해내고 있다. 이 사건은 실재 1948년 음력 섣달 19일 북제주군 조천면 북촌리에서 벌어진 양민학살을 모델로 삼고 있다. 현기영은 순이 삼촌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며 제주도 4․3의 불행이 엄연한 현실에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죽음은 한 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30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30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30년 우여곡절한 유예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었다.(<순이 삼촌> 중에서)

음력 섣달 열여드레, 그날 마을 사람들은 국군들에 의해 학교운동장에 모였고 군인 가족, 경찰, 공무원, 대동청년단 등이 차례로 분리되자 이윽고 마을은 불길에 휩싸이고 나머지 오륙백 명이 참살 당했다. 이념에 대한 맹신이 빚어낸 이 사건 이후 순이 삼촌은 경찰에 대한 기피증, 환청에 시달린다. 실로 현기영의 표현처럼 ‘완강한 패각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채 시간을 견뎌내고 있을 따름이었던 순이 삼촌의 죽음은 그렇게 단지 한 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30년 전의 죽음이었으며 망각된 역사의 현장으로 오늘의 우리를 이끌어가는 죽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현기영은 망각된 과거를 현재로 끌어냈다. 과거를 잊지 않으면, 입을 닫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던 그 ‘유신’의 시대에서 현기영은 말문을 트고 사람들로 하여금 기억하라, 기억하라며 제주도의 아픈 역사를 끌어댔다. 저 멀리, 희대의 희극이 벌어진 장충체육관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제주도 작은 마을의 비극적 역사를 환기시킴으로써 중앙의 정수리를 쳤던 것이다.

YMCA 위장결혼사건
1978년 발표된 <순이 삼촌>으로 억눌려있던 독자들로부터 뜻밖의 좋은 반응을 얻은 현기영은 지속적으로 4․3을 정면으로 다루게 된다. 작품을 통해 던져진 발언을 취소하기 어려운 작가로서의 입장과 독자에게 영향을 끼친 작가는 반드시 독자로부터 영향을 받게 된다는 진리 때문이었다. <순이 삼촌>을 계기로 그는 고향출신의 청년들을 사귀게 되었고 이들의 격려에 힘입어 잇달아 <도령마루의 까마귀>, <해룡 이야기> 등을 발표했으며 1979년에는 이 작품들을 묶어 첫 창작집 《순이 삼촌》을 발간하게 된다.
이맘때쯤 민주화운동권의 인사들에게 하나의 청첩장이 배달되었는데, 11월 24일 명동 YMCA회관에서 치러지는 것으로 되어있는 홍성엽이라는 총각의 결혼 청첩장은 이른바 위장결혼사건의 초대장이었다.
10․26사건으로 혼란이 계속되는 와중에 전국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집회와 시위를 허가제로 핍박하는 상황에서 열린 이날 결혼식에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해직교수 협의회, 제적학생이 중심이 되어 천여 명이 모였다. 유신 정부의 퇴진과 거국내각 조직을 요구하는 성명이 발표되었고 이윽고 무더기 연행과 구속으로 이어졌다. 이 날의 상황은 현기영의 소설 <위기의 사내>에 생생하게 기록된다.

손님들은 ‘신랑 그만하면 잘 생겼는걸’, ‘혹시 신혼여행은 빵깐으로 가는 거 아냐’하고 농담을 걸며 입장하고, (…) 돌연 단상에 현수막이 내리 걸리고 잇따라 강당 곳곳에서 삐라가 분수처럼 솟아올라 사람들 머리 이로 떨어지고 마이크에서 격정적인 목소리가 폭포수처럼 터져 나오고, (…) 대회장은 연행조의 난입으로 금방 수라장으로 변하고 (…) 상황은 끝나고 호송차량 두 대가 연행자로 만원이었다.

이날 지인들을 위해 창작집 몇 권을 들고 결혼식장에 갔던 현기영은 무사히 귀가 했으나 이틀 뒤 직장인 서울사대부속고등학교 교실 앞 복도에서 연행되었다. 처음에 중부서로 끌려간 그는 제주 출신 친목회를 겨냥한 수사거니 생각했으나 며칠 뒤 서빙고동 보안사 합동수사본부로 인계돼 혹독한 고문에 처하게 된다. 거기에서 급기야 <순이 삼촌>을 소위 ‘빨갱이 작품’으로 몰아붙였다. 그간 4․3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들을 현기영은 스스로 ‘도전’(<나의 문학적 비경 탐험>)이라 표현했는데 결국 권력이 그의 도전에 응답했고 ‘그들은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는 듯이’(위의 글) 그를 낚아채 갔다. 합수사 지하실에서 그는 삼 일간 주야로 고문당하고 피멍이 사라질 때까지 이십 일간 포고령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유치장에 갇혀있었다. 그날을 그는 “나는 한 마리의 똥개나 다름없었다. 온몸을 잉크빛으로 검푸르게 멍들게 한 그 가혹한 매질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놀란 새처럼 가슴이 조마조마 해진다”(위의 글)라고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전주곡에 불과했다. 1980년 8월 21일 여름방학이 끝나고 운동장에서 조회를 하던 현기영은 종로서로 연행 당한다. 광주항쟁 이후 때때로 교실에서 울분을 토했던 그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관계기관의 내사였다. 출판사에서, 고향에서 먼저 알려올 정도로 공개적인 수사였다. 이십 일 동안 계속된 뒷조사에 그는 “나를 잡으러 이제나 오나 저제나 오나, 그야말로 도마에 올라 칼맛을 기다리는 생선 신세”로 체중이 팍 줄어 걸음걸이가 휘청거릴 지경이었다고 한다. 두 번째의 연행으로 결국 창작집 《순이 삼촌》은 판금도서가 되어 전국 도서관과 서점으로부터 회수 당했고 금서로 묶이게 되었다.

김지하(왼쪽) 씨와 함께

인간은 기억으로 산다
필화사건 뒤 현기영은 4․3의 중압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먼 과거 속의 시간 여행을 떠난다. 거기에서 만난 사람이 이재수이며 그렇게 맺은 결과가 첫 장편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였다.
4․3이 일어나기까지의 제주도, 그 과거의 역사를 들춰보면서 현기영은 변방인 제주도의 내면에 접근해 갔다. ‘왕조실록’의 제주도는 사람보다 말에 대한 기록이 더 많았다. 국마들은 제대로 사육되고 있는가, 수효, 크기, 털빛 등등 그러나 이런 공마제(貢馬制)로 인해 고통 받는 백성들의 얘기는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인간을 위한 행정이 아니라 말을 위한 행정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섬땅에서는 학정을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민란을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삼는 사례가 있었음을 발견하고 이재수의 난 또한 4․3의 연장선상에 있었음을 포착했던 것이다.
변방에도 인간은 산다. 그 인간들의 삶에도 중앙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모순이 바람처럼 스쳐가며 괴로움 또한 함께 느낀다. 비단 과거의 문제만이 아니라 미디어와 네트워크가 발전한 현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지방의 다양함을 수용하지 못하는 중앙권력이야말로 지역갈등의 씨앗이며 지방의 역사를 한낱 변방의 역사로 치부하는 사회일수록 획일화되기 쉬운 것이다. 이것을 막고자 현기영은 자신의 문학적 전략을 “변죽을 쳐서 복판을 울리게 하는 것”이라 하는 모양이다.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제주도는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의 모순적 상황이 첨예한 양상으로 축약되어 있는 곳이므로, 고향 얘기를 함으로써 한반도의 보편적 상황의 진실에 접근해보자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변함없이 유효한 전략임이 분명하다.

망각의 시대는 지났다. 기억은 현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동력이 된다. 기억을 늘 환기함으로써 우리는 안주하는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권력에 대항했던 기억, 각이한 삶 하나하나를 사랑했던 기억, 분노와 통한의 기억까지. 그 기억을 놓치지 않고 사는 길이 민주화의 길이 아닐까? 그 기억을 항상 환기시키고자 했던 선각자 중의 한 사람이 현기영이다. 그가 환기시킨 불행한 과거가 치유되고 변방의 삶이 그대로 중심의 삶이 되는 그날이 올 때 우리 사회의 소외와 갈등 또한 사라질 것이다.

현기영
1941년 1월 16일 제주시에서 출생했다. 제주 오현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했다. 제주 4․3연구소 소장, 제주사회문제협의회 회장,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원장을 맡고 있다.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아버지>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다. 이후 <꽃샘바람>(1975), <실어증>(1975), <초혼굿>(1975), <소드방놀이>(1976), <순이 삼촌>(1978) 등을 잇달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1978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첫 창작집 《순이 삼촌》을 발간했다. 이후 <도령마루의 까마귀>(1979), <길(1981)>, <어떤 생애>(1983), <아스팔트>(1984) 등을 발표했다. 1981년부터 1982년까지 장편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를 <마당>지에 연재하였고, 이를 1984년에 발간했다. 작품집으로 《아스팔트》(1986), 《바람 타는 섬》(1989), 《마지막 테우리》(1994), 《지상에 숟가락 하나》(1999) 산문집 《바다와 술잔》 등이 있다. 현기영은 등단 이후 줄곧 자신의 고향인 제주도를 문학적 주제로 삼고 있다. 그는 초기작인 <순이 삼촌>, <도령마루의 까마귀> 등을 통해 제주도가 안고 있는 정신적 상처를 외지인의 시각이 아니라 제주도민의 시각으로 제기함으로써 문단에 깊은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는 4․3사건이 무고한 양민의 집단학살을 가져온 광기와 폭력의 시기였으며, 이로 인해 현재에까지 제주도민 모두가 깊은 상처를 안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제주도민의 가슴 속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4․3의 상흔을 소설화함으로써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 4․3의 역사적인 재규명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글_ 신동호
강원도 화천 출생. 시인. 1984년 강원고 재학시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0년 '오월문학상'를 수상했으며 1992년 <창작과 비평>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활동 시작. 시집 <겨울 경춘선>과 <저물 무렵>, 문화평론 <전유성論-디오게네스와의 희극적만남> 등을 출간. 한양대 국문과에서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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